12월 중순 친구 맹의 생일이었다. 혈기왕성했던 예전 같으면 생일이라며 떼로 모여서 난리였을 테지만 나이가 들고 점점 사는 게 바빠지면서 이젠 주변 사람들 생일 까먹는 건 보통이다. 그런 쪽으로는 나름 비상한(?) 기억력을 지닌 나 역시 이젠 자주 깜박깜박한다. 그러다보니 이젠 생일을 기억하고 축하 문자 하나 보내주는 것만으로도 고맙고 반갑다. 이런 게 나이드는 거구나 싶긴 하지만, 그래도 아직은 기억하고 축하해주는 이들이 있으니 그리 나쁘지는 않다.
친구 맹은 고딩 1학년 때 만나 지금껏 함께 하는 친구다. 대학 때도 근처에서 자취를 했었고, 졸업 후 시기는 다르지만 다시 집으로 돌아온 것도 비슷하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살아도 각자의 삶에 치여 자주 볼 수 있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속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는 친구가 부르면 달려올 수 있는 거리에 머무르고 있다는 건 마음 한 켠에 큰 위안이 된다. 그런 맹은 생일날 밥 한끼를 같이 하는 생일 동지이기도 하다. 내 생일에는 맹이, 맹 생일에는 내가 밥을 산다. 그래서 우리는 적어도 11월, 12월에는 한 번씩 만나게 된다.
다정다감하신 햇살박이 씨는 그래도 매년 밥과 함께 책이나 음반, 다른 소소한 선물들을 건네곤 한다. 반면 맹에게 받은 생일 선물은 대딩 새내기 때 다른 친구와 함께 건넸던 이병우 기타 연주집 테잎이 유일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다행히 그때 받은 음반으로 이병우를 처음 알게 됐고, 그 음반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음반 중 하나로 자리매김하고 있어 용서는 해줬지만. 올해 내 생일에 맹과 저녁을 먹으면서 너도 선물이라는 걸 좀 해봐라!라고 타박을 줬더니만 실실 웃으며 본인 입으로 나는 한결같이 밥만 사잖아!라고 대꾸한다. 무심한 친구 같으니!라고 대꾸해 주고는 피식 웃어버렸다. 그래도 그 밥이 매번 맛있었던 것 같아 용서해 주기로 했다. 사실 같이 밥이라도 먹는 게 어디냐, 이 나이에.. 하면서 말이다.
지지난주 맹의 생일날 전화를 해 밥이라도 한끼 같이 해야지, 했더니 감기에 심하게 걸려 거의 죽어간단다. 몸조리 잘 해서 얼른 낫고 다음에 괜찮을 때 연락하라고 이르고는 전화를 끊었는데 그뒤로 감감무소식이다. 며칠 전 갑자기 생각나서 이번 주말까지 연락없으면 밥 얻어먹는 기회는 날아가는 거라며 좀 놀릴랬더니, 어라, 어째 눈치를 챘는지 문자를 보내기도 전에 전화가 왔다. 일이 있어 근처 도서관에 왔다고. 짜식, 밥 얻어먹을 복은 있구나 칭찬해주고는 해저물어 어둡고 추운 겨울밤, 맹에게 밥을 사주기 위해 나갔다. 가는 도중 비도 부슬부슬 내려 대략 난감.
슬슬 뿌리길래 조금 오다 말겠지 했던 빗방울이 제법 굵어져 걷다보니 옷도 제법 젖어든다. 뭐 먹을까, 근처에 감자탕집에나 갈까 하며 걷다가 교차로 건너 얼마전 새로 오픈한 BBQ 간판이 눈에 띄었다. 순간 맹이 치킨 먹으러 가자고, 오랫만에 닭이 먹고 싶단다. 생각해 보니 나도 치킨 먹어본지 오래구나. 오냐, 그러자 하며 횡단보도를 두 번 건너 치킨집에 들어갔다. 빗물을 대충 툭툭 털어내고 직원이 가져온 메뉴판을 정독하며 분석하다가 결국 전국민의 애용 메뉴인 ’후라이드 반 치킨 반’ 소위 ’반반’을 주문했다. 콜라도 한 잔 추가하고.
샛길로 빠지는 말이지만, 예전에는 ’통닭’이란 단어가 더 익숙했는데, 후라이드와 양념 치킨이 일상화되면서 ’치킨’이라는 단어가 닭튀김계를 평정한 듯하다. 아직 치킨이 그리 익숙치 않은 나는, 그래서 이글을 쓰면서도 통닭,이라고 썼다가 다시 지우고 치킨,이라고 적는 일을 반복하고 있다. 하긴 옛날옛적에 정말로 ’통’으로 닭을 구워주던 시기가 지나고 이젠 조각조각 난 닭을 튀기고 때론 양념 옷을 입히는 시대니 통닭이란 단어는 조금 안 어울릴 수도 있겠다. 그럼 튀김닭은 어떨까. 하지만 그간 반복학습된 ’치킨’의 늬앙스를 ’튀김닭’이 그대로 담아내지 못하는 듯한 느낌이 남는 건 어쩔 수 없다. 샛길에 샛길이지만 나는 종종 치킨과 키친을 바꿔서 말하곤 한다. 간혹 그런 실수를 하더라도 단어의 뜻을 몰라서 그러는 건 아님을 알아주시길. 부디!
여튼 반씩 다른 옷을 입은 닭튀김 조각들이 그릇에 담겨 나오고 우리는 여전히 수다를 떨면서 동시에 열심히 닭을 뜯었다. 밖에는 비가 내리고 우리는 닭을 뜯고. 치킨이 배달을 선호하는 메뉴이다 보니 매장에 손님은 우리 뿐이었다. 몰랐는데 우리가 들어갔던 리뉴얼된 BBQ에서 치킨 뿐만 아니라 피자까지 판매하고 있었다. 치킨과 피자라, 얼마전 대기업의 횡포를 대표하는 뜨거운 감자였던 이마트 피자와 롯데마트 통큰치킨이 동시에 떠올랐다. 그들의 상반된 운명까지도. 양심없는 대기업의 행태는 반대하지만 치킨 한 마리에 일만칠천원은 조금 비싼 감이 있지 않나 싶다. 가끔 집에 조카들이 놀러와 주문을 할 때면 매번 올라가는 가격에 깜작깜짝 놀라곤 한다.
열심히 열심히 닭고기를 음미했으나 결국 남겼다. 둘이서 한 마리를 다 먹기는 예상했듯이 역부족이었던 터. 남은 양념 세 조각과 후라이드 두 조각을 포장해 들고 나왔다. 그날 처음 만들었던 핸드메이드 천연비누와 함께 생일선물로 맹에게 주려 했더니 다시 도서관으로 들어가 봐야 한다며 나보고 가져가란다. 도서관에서 닭냄새 풍기는 것도 주변인들에게 민폐이기에 결국 내가 가져왔다. 9시를 향해가는 시간, 아침형 인간이신 부모님은 취침 준비를 끝낸 채 티비 드라마를 보고 계셨고 저녁이면 더없이 기분이 좋아져 힘이 넘쳐나는 꼬꼬마 조카만 분주하게 돌아다니고 있었다.
요즘 나날이 힘은 넘쳐나면서도 밥을 죽어라 안 먹으려고 해 할아버지 할머니를 깊은 시름에 잠기게 하고 있는 꼬맹이 조카가 그날 저녁도 시원찮게 먹었다길래 가져온 후라이드 치킨의 꺼내 껍질을 뜯어내고 살코기만 살짝 먹였더니, 요녀석이 잘 먹는다. 그맛이 마음에 들었는지 아예 앞에 자리를 잡고 앉는다. 꼬맹이라도 안 먹어본 것, 밖에서 만들어 집밥과는 다른 맛을 내는 음식들을 금세 알아챈다. 후라이드 치킨이 제법 짭짤해 반찬 삼아 밥이랑 같이 먹였더니 저녁밥을 뚝딱 다 먹어치운다.
그리고 결국, 따듯한 방 안에 퍼지는 닭냄새의 유혹을 견디지 못한 엄마와 엄마가 들고 오신 소주에 군침이 돋으신 아빠가 치킨 야식에 동참하셨다. 나는 조카를 먹이고, 부모님은 치킨 조각을 안주 삼아 다정히 소주잔을 기울이셨다. 맹과의 저녁 식사 후 싸온 치킨 5조각이 야식으로 변신하면서 온가족이 훈훈해진 저녁이었다. 때아닌 야식 타임, 情 타임이 됐다. 비록 방 안은 음식냄새로 가득 차고, 부모님은 다시 양치를 하셔야 했지만. 치킨과 밥으로 배가 든든해진 꼬꼬마 조카는 듬성듬성 난 앞니에 닭고기 낀 채로 더 신이 났다.
사실 울엄마는 소고기나 돼지고기보다 닭고기를 더 좋아하신다. 특히 치킨을. 나랑 달리 달거나 기름에 튀기고 구운 것도 좋아하신다. 하지만 고혈압 때문에 평소에는 자제 모드 발동 중이다. 이렇게 좋아하시는데 그래도 가끔 한 번 쯤은 괜찮았을 텐데. 약간 식은 채 가져온 치킨을 맛있게 드시는 엄마를 보면서 무심한 딸년이라 죄송한 마음이 들었다. 평소 지은 죄도 많은데 그거 갚으려면 아직도 갈 길이 너무 멀다.
그리고 며칠 전 우리는 다시 치킨을 마주했다. 이번에도 역시 반반의 옷을 입은, 그러나 이번에는 치킨 한 마리를 통째로. 그날 밤의 치킨 몇 조각이 무척이나 달았던지 엄마가 가족 송년회도 할 겸 치킨 한 마리를 시키잖다. 예전 같으면 언니네 가족들과 동생까지 온가족이 모두 모여 시끌벅적한 송년회를 했겠지만, 이젠 조금 멀리 이사도 가고 각자 가정을 꾸리고 살다보니 그것도 쉽지 않아졌다. 언니네가 다시 이쪽으로 돌아오는 내년이면 도 상황이 달라질 수도 있겠지만. 여튼 부모따라 꼬꼬마 조카도 떠나고 조용해진 연말, 엄마 아빠 나 이렇게 셋이서 치킨 한 마리와 함께 단출하고 오붓한 가족 송년회를 했다.
방바닥에 신문을 깔고 도착한 치킨 봉지를 펼쳤다. 치킨은 역시 이렇게 방바닥에 신문 깔고 옹기종기 모여 앉아 뜯어먹는 게 제맛이다. 상자를 여니 주문대로 후라이드 반 양념 반이 모습을 드러낸다. 가장 무난하면서도 가장 적절한 선택. 그런데 오늘 양념 치킨은 주방장 아저씨가 너무 신경을 쓰셨는지 양념이 바닥에 넘쳐나서 부담스러울 지경이었다. 튀김옷도 눅눅해지고. 조금만 신경을 덜 쓰셔도 좋았을 것을. 양념 치킨은 너무 달았지만 후라이드는 역시나 맛있었다. 여전히 좀 짠 건 안습이지만. 가족 송년회인 만큼 빠질 수 없는 소주군이 부모님 사이를 오락가락하고, 나는 같이 온 콜라를 마실까 잠시 고민하다가 안병수 님의 책내용을 기억하고는 콜라를 밀어두고 치킨무를 열심히 먹었다. 물론 그책 생각하면 콜라 뿐만 아니라 닭튀김과 치킨무 모두 밀어둬야겠지만, ’이런 훈훈한 분위기에는 잠시 잊으셔도 좋습니다!’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흐흐,
초반의 우려와 예전의 수순과 달리 올해는 올해를 정리하고 새해를 기약하는 시간 없이 그냥 웃고 즐기고 먹는 가운데 가족 송년회를 끝냈다. 다행이다. 내심 조마조마했던 나로서는 안도의 한숨을.. 앞서 말했지만 지은 죄가 많다, 내가. 새해에는 그 죄들을 갚기 위해서라도 열심히 뛰어야지, 하고 생각했다. 소주 한 병 반을 가뿐하게 비우신 부모님은 얼큰하게 취하셨다. 기분도 좋다. 남은 닭조각들을 다 먹어치우고 불쑥해진 배를 두드리며 티비를 보다가 뒷정리를 했다. 치킨 한 마리만 있어도 이렇게 즐겁다. 이렇게 2010년이 저물었고 2011년이 밝아온다. 사랑하는 나의 가족들 새해에는 모두 건강하고 행복했으면 좋겠다. 그리고 열심히 한 해를 보낸 후 또 이렇게 맛난 음식 앞에 두고 가족끼리 마주앉아 조촐하지만 따듯한 가족 송년회를 했으면 좋겠다. :)
야식,
치킨,
가족송년회,
야식은사랑을타고,
새해복많이받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