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이의 셔츠를 빨아널었다.
화초들위로 물방울들이 떨어져내려 잎새를 적신다.
싱그럽게 피어나는 초록잎새들...

창넘어 파란 하늘이 높다랗다.
캔버스처럼 펼쳐진 하늘에 수채화를 그리고 싶다.
20여년 전으로 돌아가 풋풋한 젊은날을 스케치 하고 싶다.
어느 골목길을 돌아나온 바람과 마주쳤던 낯선 그 느낌들을..

마흔 둘..
나는 꿈을 꾼다.
손에 잡히지 않는 먼 먼 그곳의, 추상적인 꿈이 아닌,
구체적이며 사실적인 꿈을 꾸는 것이다.
아직도 꿈꾸며 살 수 있는 내가 참 예쁘다.

꿈을 이루기 위해 달려가는 길목에 교묘하게 위장하고 앉아있는 허방이 두렵지 않다.
삽다리를 건널때처럼 가만 가만히,,, 시퍼런 강줄기를 바라보지 않고
앞을 보며 걸어갈 것이다.
아직은 길이 아닌 길을... 내가 만들며 갈 것이다.

여기... 
어느 이름없는 여인이 길 아닌 길을 걸어갔다고,,
그래서 발에 이슬을 뭍히지 않고서도 같은 길을 갈 수 있게 되었다고..

하늘을 보면 슬퍼질때가 있다.
그냥,, 아무 이유없이... 눈물이 툭 떨어질때가 있다.
파란 하늘을 올려다보며 맑은 눈물 한방울 떨굴 수 있는 여자가 있었다고..

1945년 8월 15일, 
온 백성들이 열망하던 해방이 되었다. 미륵이가 살고있는 첩첩산중 갓지기네 집에도 어김없이 밀려온 해방의 물결... 아랫마을 감나무집은 산과 과수원, 많은 농토를 가진 지주집안이다. 갓지기란 산을 지키는 사람을 일컫는말로, 할아버지는 감나무집의 갓지기이다. 품팔이를 해서 근근히 생계를 이어갔지만 엄마와 어린 두 동생과 함께 산기슭 작은 오두막에서 흙을 일구며 자연에 기대어 살아가는 미륵이네 가족은 그런대로 행복했다. 징용을 피해 바람처럼 사라진 아버지의 빈자리가 느껴지긴 했어도 .... 미륵이에겐 갓지기가 아닌 ’미륵’이란 이름을 불러주는 다정한 동무 영대가 있어 든든했다.

해방의 기쁨으로 잔치를 벌인지 사흘 후부터 야시골엔 무서운 이데올로기 전쟁이 벌어진다. 일본치하에서 괄시받으며 숨죽이고 살던 가난한 농민들이, 일본의 앞잡이 노릇을 했거나 지주로서 가난한 백성들을 헐벗게 했던 지주집안을 쑥대밭으로 만들어 놓은 것이다. 분노한 사람들은 지주인 감나무집의 갓지기라는 이유로 산골짝 미륵이네 집까지 찾아와 행패를 부린다. 사람들을 피해 야시굴에 숨어든 감나무집 식구들은 언제부턴가 밤엔 미륵이네집에 내려와 잠을 자고 낮엔 야시굴로 숨어드는 생활을 하게된다. 차차 마을이 조용해지자 다시 예전 평화롭던 마을로 돌아간듯하다. 감나무집 식구들도 조용하게 가라앉은 아랫마을로 내려간다. 

삼팔선 이북엔 소련이, 이남엔 미군 점령군이 들어와 일본이 차지했던 자리를 채웠다. 겨울을 맞은 야시골엔 얼음썰매를 타고 노는 아이들의 함성으로 채워졌다. 그러나 어른들의 세계는 치열한 이데올로기 싸움으로 서로 혈안이 되어 있었다. 

"머슴도 가난뱅이도 다 평등하게 사는 세상이 올 끼라고 허무맹랑한 소리를 지껄이고 다니맨스러 미군정과 이승만 박사를 반대하는 놈들인기라요. 그라이 빨갱이들은 무조건 때려잡아야하니더."
"미륵이 아부지가 참말로 빨갱이잉교?"
.
.
.

"지도 그러고 싶지만도 서로 원하는 세상이 다르이께네 그러는 기 아잉교. 이승만 박사가 대통령이 안 되만 일본에 조금이라도 협조했던 사람들은 모조리 쫓겨나는 기라요. 그라이 죽기살기로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세울라 카는 기 아잉교."

미륵이는 자신의 이름을 불러주는 유일한 친구인 영대 삼촌으로부터 우연히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된다. 그리고 알 수 없는 불안함과 영대삼촌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 거리감을 느끼게 된다. 빨갱이가 뭔지도 모르면서 본능적으로 느껴지는 불안감을...

산속에 눈이 많이 쌓인 어느날 밤, 탈진한 여우 한마리가 미륵이네 집을 찾아든다. 산속에 올무를 놓아 고기를 먹는 미륵이네 생활이지만 집으로 찾아든 동물들은 절대 살생하지 않고 살려보낸다. 배고픔을 이기지 못해 찾아든 여우에게도 마찬가지다. 할아버지는 쥐굴에 불을피워 생쥐를 잡아 여우에게 던져준다. 그렇게 할아버지와 가족들의 도움으로 탈진했던 여우는 기운을 차리고 며칠만에 산속으로 사라졌다.  할아버지와 가족들은 야시처럼 산속을 헤매며 배고픔에 허덕일지도 모를 아들과 아버지를 생각했을 것이다. 

한겨울이 지나고 아랫마을에서 논과 밭에 들불을 놓고 잔치를 벌이던 날, 미륵이는 영대와 다른 친구들과 어울려 훔쳐온 막걸리를 나누어 마신다. 푸짐하게 개장국 맛을 볼 수 있겠다고 기대에 부풀었던 미륵이는 막걸리에 취해 잠들었다 깬 후 텅비고 쓸쓸한 들판을 둘러보며 말할수없는 허전함을 느낀다. 배곯아본 아이만이 느낄 수 있는 깊은 비애와 슬픔을..
"우짜만 좋노, 으이. 우짜만 좋노!"
맛있는 고깃국과 전을 먹을 수 있는 기회를 놓쳐 버렸다. 미륵이는 눈물이 찔끔찔끔 나왔다. 
어린 미륵이가 막걸리 사건을 계기로 어른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은 것은 아닐까? 

띄엄띄엄 바람처럼 아버지가 다녀가지만, 혁명에 목숨을 건 아버지에겐 가족보다 더 크고 절실한 소망이 있다.
할아버지는 미륵이를 데리고 장 구경을 간다. 그저 장구경이 아닌 겨우내 짚으로 만들어 놓았던 망태기나 짚신을 내다 팔기 위해서다. 할아버지는 ’혁명’에 목숨을 건 아들대신 어린 손자 ’미륵이’에게 세상을 가르치기 시작한 것이다. 미륵이는 난생 처음 나가보는 장구경에 마냥 설레인다. 장마당에선  우익과 좌익이 서로 자신들의 입장을 주장하며 시끄럽다. 

할아버지는 짚신 두 켤레를 판 돈으로 값싼 우무 한그릇을 미륵이에게 사준다. 겨우 짚신 몇 켤레를 팔고 장을 나서는 길, 선 채 한사발 막걸리를 들이켜는 할아버지.. 할아버지의 점심인 셈이다.  긴 장마가 찾아왔다. 산속에 화전을 일구어 씨앗을 뿌렸던 미륵이네는 큰 비에 흔적도 남지않은 밭을 보고 절망하지만, 곧 다시 희망을 품고 밭을 고른다. 절망하고 앉아있으면 곧 식구들이 굶주리게 된다는 것을 모두 알고 있기 때문이다.  어른들의 세계는 치열한 전쟁상태였지만 영대와 미륵이의 우정은 여전히 이어진다.

그러나 46년 가을, 그런대로 평화롭게 지내던 마을에 토벌대가 들어온다. 그리고 여름장마에 쓸려간 화전밭을 일구다 허리를 다쳐 불편한 할아버지와 엄마를 끌고간다. 급작스러운 사태로 산골짜기 오두막엔 미륵이와 어린 두 동생만 남게된다. 토벌대를 이끌고 마을에 들어온 영대 삼촌은 더이상 조카에게 미륵이와 놀지 말라고 하고... 정확한 이유를 알 수 없는 어린 두 동무는 삼엄한 분위기에 조금씩 거리를 두기 시작한다.  

배고프고 무서워 우는 어린 두 동생들을 돌보며 미륵이는 자신이 원치않아도 절로 어른이 되어간다. 그 어린것의 고뇌와 절망, 막막함에 가슴이 먹먹하다. 토벌대에 끌려갔던 할아버지와 엄마는 일주일 째 되는 날 저녁 집으로 돌아온다. 그러나 모진 고문으로 더이상 할아버지는 기운을 차리지 못하고 앓아눕게 된다. 장병엔 오래 묵은 똥물이 약이란 말을 듣고 미륵이는 물어 물어 ’동화사’란 절을 찾아간다. 

"똥물은 벌써 동이 났지러. 사방에서 지서에 끌려가 맞아 죽는다꼬 아우성이니께네 장독 풀어 주는 똥물이 남아 있을 리가 없제. 참, 이기 무신 큰 난리고. 나무관세음보살."

절망하는 미륵이를 보며 노스님은 안타까운 마음으로 배고픈 미륵에게 떡 한덩이를 보시한다. 그러나 어린 두동생과 가족들이 걸려 미륵이는 백설기 한덩이를 먹지 못하고 봇짐속에 챙겨 넣는다. 결국 거지가족에게 강제로 빼앗기게 되고.. 
가을걷이가 끝나갈무렵, 약 한첩 써보지 못하고 할아버지는 따순 가을볕속에 사르르 눈을 감는다. 아버지가 없는 집에 기둥처럼 든든하던 할아버지를 잃은 미륵이의 가슴은 내려앉는다. 

결국 엄마는 도시로 돈을 벌기위해 집을 떠난다. 산 속 오두막엔 미륵이와 어린 두 동생만 남았다. 고픈 배를 달래가며 땔나무를 내다팔아 근근히??들은 추운 칼바람속에 밭을, 들판을 헤매며 이삭을 주워 허기를 때? 썩은쥐를 뜯어먹는 일이 생긴다. 들순이는 며칠을 앓다 그만 꽃잎처럼 지고 만다. 엄마도 없는 집에서 막내 동생의 시체를 윗목에 밀어놓고 꼬부리고 앉아있는 미륵이의 등이 말할 수 없이 슬프다. 그렇게 들순이를 떠나보내고 두 오누이만 남는다.

설이 다가오자 도시로 떠났던 엄마가 병색이 짙은 채로 돌아온다.  해가 바뀌고 봄이 왔다. 바람처럼 아버지가 나타났지만 그 밤으로 아버지 냄새만 남겨두고 떠나간다. 이동하면서 지서에 불을 지르고.. 그? 미륵이를 원망하며 미워하게된다.  토벌대는 미륵이네 오두막을 찾아와 집을 불태운다. 불탄 집의 광에서 살며 불안한 나날을 보내던 어느날 운문산에서 산사람들과 토벌대간의 전투가 벌어진다. 미륵이는 아버지의 시체라도 찾아보려고 운문산을 찾아가 헤매지만 결국 아버지의 시체는 찾지못한다. 나중에 감나무집 할아버지를 통해 아버지가 운문산에서 죽었다는 소식만을 듣게 된다.

할아버지도, 아버지도, 어린 막내동생도 죽고 없는 집에 병든 엄마와 둥생과 미륵이만 남았다. 이젠 미륵이가 가족의 생계를 떠맡게 된 가장이다.  미륵이는 땔나무를 하러 산에 갔다가 나무를 하고 있는 영대를 만난다. 중학교에 보내주겠다 약속했던 삼촌이 죽었으므로 자신은 이제 학교에 다닐 수 없다면서.. 예전의 날카롭던 영대가 아니다. 

"너거 아부지 운문산에서 죽었다는 소문 들었데이." 

영대는 자신보다 더 큰 아픔을 당한 친구 미륵이를 진심으로 이해하게 된 것이다. 추운 겨울을 앞두고 또다시 토벌대가 오두막을 찾아와 떠날것을 명령한다. 추위를 피해 산사람들이 내려올 것을 대비해 집을 없애버리려는 것이다. 두려움에 떨며 미륵이 가족은 결국 야시굴로 찾아든다.  야시굴로 떠나기전 미륵이는 영대를 찾아가 어린 날 서로 했던 (야시굴을 찾아가자던) 약속을 일깨운다. 

"미륵아, 잘 가래이! 니캉 한 약속 꼭 지킬 끼데이!"

산골짝에 얼음이 풀리고 봄이 저만치 올 때, 야시굴에 자리를 잡은 미륵이네는 산을 일궈 씨앗을 뿌릴 준비를 한다. 끈질긴 생명에의 끈을 놓지않으려 애쓰는 모습들이 너무나 가슴아프다. 
그러던 어느날 영대가 찾아온다. 미륵이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찾아온 것이다. 미륵이가 야시굴에 숨어 살고있는 모습을 보고 마음아파한다. 나무를 하러간다며 가끔 야시굴을 찾아오던 영대는 어느날 토벌대가 산을 이잡듯 뒤지고 있다는 정보를 알려준다.  당장 필요한 살림살이를 챙겨 또다시 미지의 땅을 찾아 이동한다. 겨울에 돈 벌러 갔던 일이 있어 찾아갈 곳이 생긴 미륵이네 가족은 대구로 목적지를 잡는다. 다행히 대구의 밥집주인은 미륵이네에게 호의적이다. 미륵이는 등짐을 져주고 받은 돈으로 보리쌀을 사와 오랫만에 따뜻한 보리밥으로 배를 채운다. 절망과 두려움에 떨고 앉아있을 여유가 없다. 미륵이는 열심히 일하면 가족들과 배불리 먹고 동생 공부도 시킬 수 있으리란 희망을 품는다. 
"미륵이는 알고 있었다. 절망만으로는 이 험하고 무서운 세상을 헤쳐 나갈 수 없다는 것을. 식구들을 지킬 수 없다는 것을......

이 책 야시골 미륵이는 내가 김정희씨의 ’노근리 그 해 여름’을 읽고나서 그분의 전작이 궁금해서 읽게 되었다. 노근리 사건을 배경으로 쓰여진 노근리 그 해 여름의 기억이 하도 생생해서 그 책이 나오기 전 발행된, 시기적으로도 앞선 야시골 미륵이가 궁금했기 때문이다.
이 책의 배경은 해방직후로 혼란스럽던 좌우익의 싸움이 대두된다. 미륵이라는 어린 소년과 그 가족이 겪는 아픈 역사를 통해서 우린 죄없이 죽어간 수많은 영혼들을 위로하는 기도라도 올려야하지 않을까? 빨갱이가 무슨 뜻인지도 모르면서 아버지를 잃고, 할아버지와 동생을 하나씩 잃어가는 미륵이의 상처를 어찌 감싸줄 수 있겠는가. 

나는 아이들의 배를 채워줄 양식을 구하기위해, 결국 돈을 벌기위해 어린 자식들을 두고 떠나는 엄마의 마음이 얼마나 아픈지..꺼이꺼이 울었다. 그리고 결국 병을 얻어 돌아온 엄마가 어린 두 남매만 남겨두고 세상을 떠나면 어쩌나.. 얼마나 가슴을 졸였는지 모른다. 
다행히 엄마는 건강을 회복하고, 더이상 어린 아들이 아닌 든든한 가장이 된 미륵이는 강한 책임감으로 엄마와 동생을 돌보는 입장이 된다. 나는 상처로 얼룩졌던 미륵이네 가족이 이어진 전쟁의 폐허속에서도 꾿꾿이 살아남아 아픈 역사의 증인이 되어주었으리라 굳게 믿는다.
이데올로기란 무엇이기에 이토록 가슴아픈 상잔의 비극을 일으킨단 말인가. 결국 6.25로 이어지는 싸움이었으니까 말이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돌아가신 아버지를 생각했다. 일제시대에 아버지는 징용에 끌려가셨단다. 외아들을 두셨던 할아버지는 아버지를 징용에 보내놓고 화병으로 돌아가셨다고 한다. 아버지는 감시하는 어린 일본군을 죽게 패주고는 어렵게 도망쳐 나왔다고 한다. 씨름에 나가면 소를 타왔다는 아버지는 천하장사였다. 그렇게 돌아온 집에 아버지는 돌아가시고 그때부터 나의아버지는 어린 동생들과 어머니를 지키는 가장이 되었다고 했다. 

이 책의 첫 부분에 징용에 끌려간 아들 이야기를 하는 석구 아버지의 말이 꼭 아버지의 얘기처럼 느껴진다. 나의 아버지는 돌아오셨지만, 그렇게 끌려간 전장에서 개죽음을 맞은 수많은 우리 아버지들의 얘기이기에...

작가는 이 책을 완성하는데 12년이란 긴 세월이 걸렸다고 썼다. 사실이 바탕이 되어야하는 역사동화의 작가로서는 어쩌면 당연한지도 모르겠다.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는 전쟁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되고 있다. 그들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무엇일까? 이념이나 사상보다 더 우위에 두어야할 것은 분명 생명에 대한 경외감과 사람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