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도에 흠뻑 빠져들었던 유년이 있었다. 하루 종일 지구본을 돌리며 세상을 꿈꾸는 것만으로도 즐거웠던 시절이다. 그 때 유독 눈에 들어왔던 섬이 하나 있었다. 온통 새하얀 색으로 그려진 커다란 섬, 그린란드다. 북극에 가까이 붙어있어 궁금했지만, 가볼 수나 있을까 엄두조차 내지 못했던 꿈 속의 섬이었다.
그런데 우연찮게도 2011년 그 꿈같은 기회가 찾아왔다. 그린란드 탐험대 동반 취재팀에 참여하게 된 것이다. 한 달여 그곳 주민들의 삶을 기웃거릴 수 있었고, 순백의 동토가 뿜어내는 거대하고 아름다우며 때론 숭고함마저 느낄 수 있는 지상 최고의 풍경을 넋을 잃고 바라볼 수 있었다.
‘북극의 허풍담’은 그 그린란드를 무대로 하는 책이다. 장엄하고 경이로운 대자연 속에서 투박하고 원색적이고 단순한 인물들이 만들어내는 황당하고 우스운 이야기들이다. ‘허풍담’이란 새로운 장르에 대해 저자 요른 릴은 “추억담도 아닌, 상상도 아닌, 진실일 수 있는 이야기”라고 했다.
혹독한 추위와 몇 달간 이어지는 흑야, 절대적인 고독 등이 책의 밑그림이다. 주인공들은 그곳의 원주민이 아닌, 덴마크 노르웨이 아이슬란드 등에서 건너와 자발적 고립을 선택한 유럽의 사냥꾼들이다. 바다표범과 북극곰, 사향소, 북극여우 등을 잡아 그 모피를 파는 이들은 1년에 한번 수송선을 타고 오는 외지인을 만나는 것이 유일한 낙이다.
책은 이곳을 찾는 외부인들의 거만한 시선을 조롱한다. 새로운 질서를 세우려는 사람들은 대가를 톡톡히 치르고 이곳의 질서, 다시 말해 무법의 질서를 받아들이게 된다. 민병대를 구축하겠다고 온 한센 중위나 ‘사파리’에 나선 레이디 헤르타 등은 호된 신고식을 거치며 문명의 오만함에 대한 대가를 치러야 했다.
사냥꾼들은 군사 훈련을 보채는 한센 중위를 끌고 눈 언덕 위로 데리고 갔고, 중위는 정탐 초소를 세우러 앞서 가다 그만 눈에 덮여 보이지 않는 히든 크레바스에 빠지고 만다. 끝 모를 깊이의 얼음 구덩이 속에서 오랫동안 밧줄에 매달려 대롱거렸던 중위의 이야기를 읽으며, 나 또한 탐험을 따라 갔다 빠져 나름 죽을 고비를 넘겼던 히든 크레바스를 떠올렸다.
고립된 사냥꾼들의 반문명의 세계를 읽으며 배꼽을 잡고 웃다 보면 저절로 내가 처한 문명의 사회를 되돌아보게 된다. 그들이 ‘저 아랫동네’라 부른 복잡한 현대사회가 얼마나 갑갑한 곳인지 말이다.
호된 뱃멀미에 죽다 살며 그린란드에 도착한 변호사 볼메르슨. 백작의 유산을 전해주기 위해 찾아온 그는 그만 그린란드의 매력에 흠뻑 빠지고 만다. 그는 난생 처음으로 세상에 한계가 없다는 걸 느꼈다. 천상이 무한하고 색채에는 온갖 뉘앙스가 있으며 마시는 공기에 맛이 있다는 걸 발견했다. 그는 코펜하겐의 널찍한 집과 사무실을 떠올리고, 도시의 소음과 소란, 무거운 공기, 정치인들과 권력자들을 생각했다. 노란 한밤의 태양 아래 펼쳐진 인간의 자취에 때 묻지 않은 순결한 산을 응시하며 그는 자기 내면으로부터 절대적 침묵의 메아리를 느끼게 된다. 결국 그의 선택은 행복한 잔류였다.
유독 세상이 갑갑하다고 느끼고 있어서인가, 눈물 겹도록 볼메르슨이 부럽다. 다시 그곳을 찾을 기회가 있으려나. 올 여름도 유난히 덥다고 한다. 그린란드 빙하 위에서 맞던 북극의 찬바람이 더욱 그리워질 것 같다.
이성원 사회부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