ㆍ사기 | 사마천

“세상의 사나이들은 기둥 하나를 세우기 위해 산다.”

조금 당돌하고 거침없는 표현으로 시작되는 나의 졸시 ‘사랑하는 사마천 당신에게’를 쓴 것이 1990년대 초반이다. 시 속에 남근(男根)이라는 시어가 또한 화제가 되었다. ‘투옥당한 패장을 양심과 정의에 따라 변호하다가 남근을 잘리는 치욕적인 궁형(宮刑)을 받고도 방대한 역사책 <사기>를 써서 인간이란 무엇인가를 규명해낸 사나이를 위한 노래’라는 긴 부제가 붙어 있다.

당시 막 개방된 해외여행 붐을 타고 동남아 일대로 관광을 떠난 일부 한국 남성들이 곰 발바닥이나 뱀 등을 사먹는 사례가 문제가 되어 사회면을 장식한 것을 보고 쓴 작품이다. 그때 나는 마침 중국여행을 계획하고 있던 터이기도 했다.

중국이란 어떤 나라이며 누구인지 알고 떠나면 황하나 만리장성이 더 뚜렷하게 보일 것 같아 <사기>를 읽고 있었다. 그런데 읽으면 읽을수록 <사기>는 역사서인 동시에 깊은 인간학임을 알 수 있었다.

방대한 3000년을 52만6500자로 압축한 책이라는 점에서 한 글자 한 글자를 피로 새긴 인류 최대의 지혜서였다. 더욱 감동적인 것은 <사기>가 참담하게 닥친 인간관계의 비극을 극복한 빛나는 정신의 승리를 보여준다는 점이었다. 신체의 기둥을 잘리고 역사 속에 진정한 기둥을 세운 사나이가 사마천이다. “사람은 누구나 한번 죽지만 어떤 죽음은 태산보다 무겁고 어떤 죽음은 새털보다 가볍다”는 말이 실감났다.

오늘날, 어지럽고 때론 억울하게 얽힌 삶을 어떻게 살 것인가?

<사기>는 거기에 대해 담대하고 명쾌한 해답을 준다. 그런 의미에서 최근 사마천과 <사기> 전문가인 김영수의 <사마천, 인간의 길을 묻다>도 아주 재미있게 읽었다.

 
<문정희|시인>

도로의 폐회로텔레비전, 불 꺼진 자동차 안의 블랙박스, 출퇴근길 사용하는 교통카드…. 현대인들은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촘촘한 감시 속에 살고 있다. 이런 사실은 시스템이 문제를 일으켰을 때만 드러날 뿐 평소엔 체감하기 어렵다. 지난 1월 카드사들이 개인정보 1억여건을 유출한 뒤 6개월이 흘렀다. 사건 이후 160만개의 카드가 해지됐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은 여전히 일상생활에서 카드를 사용하고 있다. 내 개인정보가 저장·가공·유통까지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됐지만 사실상 ‘감시’를 벗어나 생활하는 건 불가능하다.

감시 연구의 권위자인 지은이는 20년 전 <전자눈>(The Electronic Eye, 1994)에서 감시사회가 어떻게 등장했는지 역사적 과정을 보여줬다. <감시사회로의 유혹>은 감시사회의 도래 이후 오늘날 우리가 일상에서 받는 감시를 사회학적 관점에서 다룬다.

현대사회에서 감시는 억압과 통제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지은이는 “우리 모두는 자신에 대한 감시에 가담하고 있다”는 말로 감시가 우리 스스로 만들어낸 정치경제적 산물이라는 것을 강조한다. 노동이 개별화하면서 카메라와 전자우편을 통한 작업장 감시가 시작됐고 소비자에 대한 맞춤 마케팅의 한 방법으로 개인의 취향이 수집된다. 급기야 감시는 사람들을 분류하고 등급을 나누는 기제로까지 확장했다. 보험회사는 개인이 처한 상황에 따라 등급을 매기고 각기 다른 보험료를 책정해 위험 관리를 하면서 큰 성공을 거둬왔다.

지은이는 감시의 부작용을 개인적 문제의식만으로 해결할 수 없기 때문에 공적인 이슈로 만들어 함께 고민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막스 베버에서 마크 포스터에 이르기까지 감시사회에 대한 학자들의 담론을 훑고 유효한 부분을 짚어내려고 노력하는 것도 감시에 얽힌 사회·정치적 기제를 보여주기 위해서다.

감시가 ‘육체성의 소멸’에서 왔다고 보는 지은이는 ‘살아 있는 개인’의 가치를 긍정함으로써 감시의 문제들을 깨닫자고 말한다. 인간 사이 접촉에 스마트폰, 인터넷 같은 회로가 개입하면서 신뢰의 징표로 승인과 감시는 더 일상화했다. 지은이는 인간이 스스로 자신을 드러내고 서로 신뢰를 쌓는 과정에서 감시의 방향을 함께 조정해 나갈 수 있다고 말한다. 자동화된 분류보단 정의를, 기술적인 필요보단 공동의 참여를 우선시하는 게 지은이가 추구하는 감시의 미래다.

영국에서 2001년 출간된 이 책은 지금도 여전히 유효한 예시와 담론들을 보여준다. 우리 모두가 어떤 식으로든 감시에 연루돼 있으며 참가자가 되든 목격자가 되든 선택해야 한다는 지은이의 말을 그냥 넘기기 어려운 이유다. 최유빈 기자

<젠더 몸 미술>의 부제는 ‘여성주의 미술로 몸 바라보기’다. 짐작하듯, 페미니즘 미술가들의 작품을 소개하는 책이다. 실은 여성 몸을 바라보는 사회적 시선, 관습, 제도와 싸운 19~20세기 유럽과 미국 여성 미술가들의 투쟁의 이야기다. 이 투쟁은 현재진행형이다.

지은이 정윤희 동덕여대 교수(교직교양학부)는 “가부장 사회에서 여성은 제 몸을 주체로서 인식하지 못하고 경험하지 못한다”고 파악한다. 역사적으로 “여성의 몸은 인식 주체이자 표현 주체인 남성들에 의해 타자화”되고 “남성의 눈에 맞춘 렌즈를 통해 굴절되어 왔다”고 본다.

그렇게 몸은 삶의 경험과 기억이 새겨지는 공간이지만, 또한 동시에 이에 맞서는 정치적 투쟁의 장소이기도 하다.

독일 작가 한나 회흐, 울리케 로젠바흐, 파울라 모더존베커, 오스트리아 출신의 발리 엑스포르트, 영국 작가 제니 새빌, 미국의 흑인 미술가 카를라 윌리엄스, 이탈리아 출신의 알바 두어바노, 체코 출신의 야나 스테르박, 미국의 주디 시카고, 신디 셔먼, 모니카 스주….

이들은 몸을 사유하고 몸을 통해 체제와 금기에 저항했다. 여성주의 미술이 드러내는 몸은 그래서 때로 그로테스크하고, 급진적이다. 유방과 자궁, 살과 피를 드러냄으로써 추, 혐오, 역겨움의 감정을 일으키고 그 감정이 정당한 것인지 성찰할 것을 요구한다. 여성 신체를 숨기고 신비화하며 재현하는 기존 미술 방식에 반기를 들었다. 미학을 거부하는 반미학의 미학이다.

관음의 미학 남성판타지 비판

여성 정체성과 자부심 일깨워

기존 ‘서구 전통’ 남성 작가들의 미술에서 여성의 몸은 대개 에로틱의 표상(누드화)이거나 미의 표상이기 십상이었다. 관음의 미학, 더 나아가면 남성 쾌락을 위한 포르노그래피가 된다. 이들에게 모성은 위대하고 아름답지만, 생명의 거처인 자궁과 월경혈은 ‘불안’과 ‘불결’의 표지였다. 성경이나 수많은 신화·제의에서 남성의 피는 죄를 정화하는 수단이었으되, 여성의 피(월경혈·출산혈)는 “금기의 여러 기호 중 하나가 아니라 금기를 대표하는 기호”였다. 할례 의식에서 남성이 흘린 피는 그 의식 참가자들이 손을 씻는 신성한 액체였으나, 분만이나 월경으로 피 흘리는 여성은 사람들에게서 분리되거나 스스로 숨도록 강제됐다. 서양 전통 미술에서 출산과 임신의 재현은 금기였다.

그러나 “자궁과 유방은 여성의 정체성이 가장 뚜렷이 기입되는 장소다.” 금기를 깨고 자궁과 유방을 드러내라. 여성 미술가들의 과제였다.

우선 유방을 보자. 영국 작가 조 스펜스는 식탁 위에 채소 무더기와 함께 65페니라는 가격 표지를 달고 식품처럼 놓여 있는 한쌍의 커다란 인공 유방을 찍었다. 이 사진작품 <정물>(1982)을 통해 유방을 섹스나 포르노그래피의 대상으로만 소비하는 남성 판타지를 비판했다. 그다음은 자궁이다. 모니카 스주의 회화 <출산하는 신>(1968)은 자궁에서 빠져나오는 아기의 모습과 그 아기를 끄집어내려는 여신의 모습을 담아냈다. 발표 당시 신성 모독과 음란 혐의로 고발 위협을 받기도 했다. 조너선 월러의 <어머니>(1996)는 출산의 순간을 더욱 역동적으로 재현한다. 화면 가득 여성의 육체가 부각되고, 피 흘리는 자궁에서 나오고 있는 아기의 머리! 월러는 이 그림을 통해 출산의 출혈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존중할 것을 요구했다. 1996년 당시 그는 예술의 주제로 출산은 적합하지 않다는 이유로 전시공간을 구하기 어려웠다.

주디 시카고의 작업은 한발 더 나아간다. 자신의 이름(주디 실비아 코언)에서 아버지와 남편의 가부장적 성을 떼어내고 고향인 시카고로 성을 바꾼 그는 1979년 여성의 성기를 본떠 만든 설치물 <디너 파티>를 발표하여 미술계에 ‘물의’를 일으켰다. 여성 39명의 성기를 각각의 접시 위에 형상화하여 담아낸 이 설치작품은 “남근 중심적이고 성차별적인 사회와 미술계에 맞서 싸우는” 도발이었다. 그러나 이 작품에서 성기는 신비하거나 두려운 대상이 아니다. 그에게 여성 성기는 도발적이고 불온한 소재이기보다는 여성이 제 몸과 여성적 경험에 대한 자부심, 주체성과 자의식을 인식하게 되는 핵심 요소였다. 그는 비판자들에게 “어려움 속에서도 역사적 성취를 이뤄낸 여성들의 공적을 지우는 악순환의 고리를 끊는 데 일조하고자 했다”고 말했다.

이밖에 흑인 여성을 바라보는 서구의 제국주의적 시선을 고발한 자메이카 출신의 미국 멀티미디어 작가 르네 콕스, ‘사진 깁기’ 연작을 통해 여성과 남성, 늙은 여성(남성)과 젊은 여성(남성)을 짜깁기하며 젠더(성차별)와 늙음(나이차별)에 대한 반성을 요구한 독일의 아네그레트 졸타우, 오스트리아 출신의 행위예술가 발리 엑스포르트의 자신의 몸을 내세운 ‘드러내기’ 작업, 경계가 모호한 정체성을 통해 사회·문화적인 성별 구분(젠더) 구조를 전복하고자 했던 프랑스 초현실주의 화가 클로드 카운의 <자화상> 연작도 만날 수 있다. 허미경 기자 carmen@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