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열 지음ㅣ페이퍼로드ㅣ368쪽ㅣ2만5000원

미국의 3대 자동차 회사 포드를 창업한 헨리 포드는 소액주주에 발목이 잡혀 경영 방침을 접은 일이 있다. 어느 날 포드는 주주에게 특별 배당금을 지급하는 대신 회사에 투자하겠다고 발표했다. 생산 시스템과 직원들의 근무 여건을 개선하는 데 쓰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포드 지분의 10%를 보유하던 소액주주 도지가 주주 이익에 반하는 결정이라며 소송을 냈다. 소송 결과는 포드의 패. 법원은 주주의 이익 극대화를 기업이 지켜야 할 최고의 가치로 판단했다.

세계에서 가장 기업 친화적인 나라인 미국에서도 기업에 활동의 자유를 100% 보장하지 않는다. 소유주와 경영자뿐 아니라 주주도 회사의 주인으로 보는 풍토가 강하다. 경영진의 판단을 존중하지만, 주주의 이익에 맞게 운영할 때 그 권리가 보장된다. 이것이 미국 자본주의의 중요한 명제다.

저자는 기업인들은 무엇보다 주주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사회는 경영진에 대한 강력한 견제 기능과 함께 회사가 주요 경영 전략을 세울 때 직접 참여하는 권한이 주어진다.

미국에선 회사의 주체가 주주이다 보니 적대적 인수합병(M&A)과 기업 사냥꾼이란 말은 수시로 등장한다. 주주를 자기편으로 만들고 경영진에 반대하는 주주를 제압하기 위해 싸우는 것이 미국식 자본주의의 단면이라고 저자는 설명한다.

이런 풍토는 미국 회사법의 특성에서 기인한다. 미국의 회사법은 기업의 본질과 관련된 다섯 가지 문제에 대한 내용을 담았다. 한결 같이 ‘대리인’의 관계를 설명한다. 다양한 경영 주체들 간의 이해관계를 조정할 때나 기업의 소유와 경영을 맡은 주체가 서로 다를 때 대리인의 문제가 발생한다. 대리인 문제는 미국에서 일어나는 기업 소송 가운데 대부분을 차지한다.

미국 회사법은 이윤의 극대화 다음으로 기업 주체들 간 신뢰에 무게를 둔다. 주주와 경영자 간에는 신의 성실의 의무가 놓여 있다. 주주는 대리인으로 경영자에게 회사 경영을 맡긴다. 주주는 경영자가 주주의 이익에 맞게 경영을 하는지 판단한다. 주주와 경영자가 동등한 관계에서 서로의 이익 실현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최근 미국에서는 주주들이 환경 보호와 인권 보장에 관심을 나타내며 경영에 개입하고 있다. 많은 기업이 실제로 주주의 이런 제안을 수용해 기업 정책까지 바꾸고 있다. 올 4월까지 환경·사회 분야의 관심사와 관련한 정책 제안은 56%를 차지한다. 주주의 정책 제안은 법적인 구속력은 없지만, 경영진과 협의를 거쳐 경영에 반영되고 있다.

책은 미국의 기업 세계를 의미한다. 저자는 책을 쓴 이유로 “국내 기업들이 미국을 이해하려면 미국 기업과 관련한 제도가 실제 어떻게 적용되는지 살펴봐야 한다”고 말한다.

저자는 뉴욕총영사관에서 상무관으로 근무하면서 수집한 미국 기업과 관련된 법과 제도를 100여가지의 다양한 소송과 사례를 통해 소개했다. 삼성과 포스코 같은 한국 기업은 물론 마이크로소프트, 구글, 포드, 리먼 브라더스 등 일반에 익숙한 기업들의 실제 소송 사례를 엮어 이해를 도왔다. 미국 기업과 비즈니스를 하는 기업인이나 연구자와 법조인, 공무원에게도 도움이 될 만한 책이다.

[유호 기자 ryho@chosun.com]

공원국 지음ㅣ민음사ㅣ458쪽ㅣ1만8000원

모처럼 시간을 들여 읽어볼만한 여행 에세이가 나왔다. 예쁜 사진 몇 장에 작위적인 문장 몇 개를 늘어 놓은 흔해 빠진 여행 에세이가 아니다. ‘흉노열전’이나 ‘사기’, 더 나아가 12세기 정교회 성직자의 ‘근본연대기’ 등 역사서 일부를 꼼꼼히 차용하고 유라시아 일대의 신화를 알차게 담았다.

칼바람이 스미는 어느 고원에서의 여정을 함께 하다보면 어느새 유라시아 지역 일대의 곰 신화 이야기에 푹 빠지게 된다. 몽골의 북두칠성 이야기를 듣는 대목에서는 까만 하늘에 수놓듯 놓인 수만개의 별이 내 마음으로 쏟아지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우리나라 전래동화 ‘선녀와 나무꾼’을 떠올리게 하는 유라시아 일대의 신화를 읽다보면 머나먼 곳으로만 유라시아 일대 어딘가가 그 옛날 언젠간 우리네 고향이었다는 생각이 강하게 든다.

책에서는 최근 국제 정세뉴스에서나 많이 언급되는 우크라이나 키예프 지역의 신화와 역사에 대해서도 소개한다. 복잡한 역사를 구구절절하게 소개하지 않으면서도 요점은 간결하고 흥미롭게 전달했다. 저자는 지금의 키예프 지역에 자리잡은 이들이 오늘날의 우크라이나인을 포함한 동슬라브인의 선조라고 말한다. 저자에 따르면 슬라브 신화 이야기는 너무 얇아서 베개로 쓰기에도 부족하단다. 신화가 애시당초 없었던 것이 아니라 패배한 신화라서 상당 부분 사라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책에선 신화의 흔적을 찾아 길을 떠난다.

흔적을 찾고 다시 나아가는 7개월간의 여정이 이 책에 꾹꾹 담겨있다. 몽골 고원부터 시베리아를 가로질러 남쪽 인도 대륙까지 진출한다. 지중해 너머 세계 이야기는 쏙 뺐다. 저자는 이를 두고 “새삼 이 책에서도 언급할 필요가 없을 만큼 알려졌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저자는 저자의 말에서 “태평양에서 대서양 사이 거대한 유라시아 대륙이 있는데도 사람이 살지 않는 양 무턱대고 지중해 일대의 서사를 소비하고 있다”며 아쉬움을 드러낸다. 책을 모두 읽고 나면 저자의 취지에 수긍이 간다. 그동안 너무 유럽 중심의 이야기에만 함몰돼 있었다면 ‘유라시아 신화기행’을 통해 균형을 잡아볼만도 하다.

혹자는 사진은 적고 글이 너무 많다고도 말한다. 하지만 사진이 적다는 것은 이 책의 장점 중 장점이다. 읽고 상상하는 맛을 배가시킨다.

[연지연 기자 actress@chosun.com]

 

종이가 사라지면 文明은 소멸한다
 

[종이의 과거와 미래]

정치·문화 등 인간 활동 중심 역할… 일회용 화장지로 콜레라 등 전염병 감소

美 독립군 '탄피' 등 軍 무기로도 쓰여 "종이 없는 세상은 결코 오지 않을 것"

종이는 옛 시대의 빛바랜 유물(遺物)이 될 것인가. 인터넷과 스마트폰에 모든 자리를 내주고 역할을 다한 채 역사 속으로 사라질 것인가. 우리 삶 곳곳에서 이런 움직임은 감지된다. 단말기를 통해 전자책을 읽고 인터넷으로 신문을 본다. 종이 한 장 오가는 일 없이 항공편을 예약하고 탑승 수속을 한다. 차량 번호 인식 기계를 통해 주차권 없이 주차한다. 종이 책의 종말에 대한 뉴스도 줄기차게 나오고 있다.

신간 '종이의 역사(니콜라스 바스베인스 지음, 21세기북스·원제 'ON PAPER')'와 '페이퍼 엘레지(이언 샌섬 지음, 반비·'PAPER: an Elegy')'는 종이에 보내는 경의(敬意)이자 헌사(獻辭)다. 두 책의 저자는 모두 종이의 미래를 낙관한다. "우리 사회에 종이가 사라질 날도 얼마 남지 않았다는 일각의 예측은 당장은 들어맞지 않을 듯하다"('종이의 역사' 14쪽), "종이가 사라진다고 상상해보라. 무얼 잃게 될까? 모든 것을 다 잃을 것이다"('페이퍼 엘레지' 13쪽). 프랑스 철학자 자크 데리다는 말했다. "오늘날 종이에 작별을 고한다고 함은 어느 날 글쓰기를 익혔다는 이유로 말하기를 멈춘다는 말과 같다."

◇종이가 일군 인류 문명

'종이의 역사'는 종이에 얽힌 2000년 인간의 궤적을 탐구한다. 미국 저널리스트인 저자는 인류가 일군 문명의 세계는 종이가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주장한다. '뭐, 그렇게까지' 하다가 책을 읽으면서 고개가 절로 끄덕여진다. 기계와 철도 같은 신기술이 이룬 산업혁명은 종이 위에 쓰고 그린 전문지식을 소통하고 전달하면서 이뤄졌다. 종이로 만든 지폐가 없었다면 상업의 비약적인 발전은 불가능했다. 불교·기독교·이슬람교 등 주요 종교는 종이에 인쇄한 경전을 통해 전 세계에 포교할 수 있었다. 인도 타지마할 같은 아름다운 건축물은 종이에 그린 설계도 없이는 상상할 수 없다. 정치와 경제, 사회와 문화, 종교와 예술 등 모든 인간 활동은 종이 위에 세워졌다!

미국 독립은 식민 모국 영국이 1765년 종이에 세금을 매긴 '인지세법'이 도화선이 됐다. 미국 신문들은 반발했다. '뉴욕 가제트'는 "자유와 번영을 지지하고 인지세법에 반대한다"고 분노했다. '펜실베이니아 저널'은 인지세법이 시행되기 하루 전날인 1765년 10월 31일자 1면에 묘지와 해골을 그리고 종이에 과세하는 법률을 폐지할 때까지 신문을 내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이 신문 발행인 윌리엄 브래드포드는 10년 후 벌어진 독립전쟁에 참가해 용감하게 싸워 대령까지 진급했다.

◇전쟁 무기, '위생 혁명'의 주역

종이는 전쟁에서 무기로도 활용됐다. 미국 독립군은 성경책을 뜯어 만든 '종이 탄피'로 영국군과 싸웠다. 하와이 진주만을 습격한 일본은 '종이 열기구'를 만들어 미국 본토를 공격했다. 일본은 1944년 11월 3일부터 1945년 4월 5일까지 약 9000개의 '열기구 폭탄'을 띄웠다. 이 중 1000개가 북아메리카에 도달했다. 오리건 주 자연보호구역인 기어하트 마운틴 인근에 떨어진 열기구에 한 여성과 다섯 자녀가 다가갔다가 모두 사망했다. 종전 후 이곳에는 '제2차 세계대전 중 미국에서 적의 공격으로 사망자가 발생한 유일한 장소'라는 기념비가 세워졌다.

종이는 인간의 수명을 연장시켰다. 미국 제지업체 킴벌리-클라크가 1920년대 출시한 일회용 티슈 '크리넥스'와 여성용 생리대 '코텍스'는 인류사에 남는 '위생 혁명'이었다. 일회용 화장지는 이질·장티푸스·콜레라 같은 전염병을 급격히 줄이는 데 기여했다. 1860년대 남북전쟁 기간 해마다 병사 1000명 중 80명이 장티푸스에 감염됐지만, 1차대전 때는 1000명 중 3명으로 줄었다. 2차대전 때는 0.1명으로 감소했다. 지금은 아예 통계에 잡히지 않는다. 손과 항문 사이를 막은 얇은 종이 한 장이 이뤄낸 성과다. 종이 생리대는 여성들이 역사상 처음으로 생리현상을 '관리'할 수 있게 했다. 덕분에 여성들은 이전에는 금지됐던 사회적 활동을 할 수 있었다.

저자는 역사적 접근뿐 아니라 중국·일본의 전통 제지 공장을 답사하고 미국 달러를 비롯해 전 세계 지폐 용지 생산의 60%를 담당하는 제지업체 크레인 앤 컴퍼니 등을 르포하며 현장감을 더한다.

◇"우리 존재 자체가 종이"

'종이의 역사'가 묵직한 대작 다큐멘터리라면 '페이퍼 엘레지'는 경쾌하고 날렵한 에세이다. '엘레지'는 '애가(哀歌)'라는 뜻. 영국 소설가인 저자는 종이와 관련한 인류 문화사를 조목조목 짚으며 "우리 존재 자체가 종이"라고 선언한다. 우리는 종이 공책에 필기하고, 종이로 만든 여권을 가지고 여행하고, 종이로 만든 계약서에 서명하며 살아왔고, 지금도 살고 있다. 저자는 "중요한 일은 모두 종이 위에서 일어난다"고 말한다. 종이 없는 세상을 상상할 순 있지만 "그건 죽은 상태나 태어나지 않은 상태를 상상하는 것"이다. 저자가 종이에 바치는 헌사는 '종이와 나무' '종이와 지도' '종이와 책' '종이와 돈' '종이와 건축' '종이와 예술' 등으로 이어진다.

종이는 과연 죽음을 맞고 있는가. 두 책을 읽으면 결코 그렇지 않다는 확신이 든다. 한때 이메일과 인터넷 발전으로 '종이 없는 사무실'이 될 것이란 전망이 있었다. 이미 빗나갔다.

[이한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