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쿠다 히데오 작가의 <공중그네>를 비롯해서 <침묵의 거리에서>와 <명장 선거>를 인상 깊게 읽은 터라 <걸>이라는 소설을 펼쳐 드는데 크게 고민하지 않았다. 소설 <걸>은 다섯 가지 여성의 일상 이야기를 묶어놓은 책이다. 그 첫 번째 이야기 '띠동갑'은 올해 서른네 살인 입사 13년 차 요코가 자신보다 12살이나 어린 연하 신입사원에게 반하게 되면서 벌어지는 웃픈 이야기이다. 다음 이야기 '히로'는 파격적인 승진으로 삼십 대 젊은 나이에 과장 자리에 오른 세이코가 여자 상사 밑에서 일하기 싫어하는 부하직원 이마이와 충돌하게 되어 겪게 되는 이야기로 아직 일본 사회에 남아 있는 남성우월주의를 유쾌하게 비판하고 있다. 나도 남자지만 이마이의 행동은 아니다 싶었다. 콱 ㅡ_-+a. 세 번째 이야기 '걸'에서는 평생 Girl로 살고 싶은 유키고가 삼십 대라는 현실을 직시하게 되면서 내적으로 고민하며 서서히 변해가는 과정을 담고 있다. 네 번째 이야기 '아파트'는 대한민국 삼십 대 직장인이라면 누구나 꿈꾸고 있는 '내 집 마련'에 대한 이야기다. 독신으로 살던 유카리가 친구의 아파트 장만 소식에 자극을 받아 아파트 장만을 마음먹는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그녀는 돈 때문이든 사람 때문이든 100% 마음에 드는 아파트를 장만하기란 쉽지 않다는 걸 깨닫는다. 그리고 마지막 '워킹맘'은 한 아이의 엄마이자 이혼녀인 다카코가 워킹맘으로서 마주하게 되는 현실적인 문제를 오쿠다 히데오의 특유 문체로 훈훈하게 담은 이야기다.

 

이렇게 다섯 가지 이야기는 현실적이면서도 실제로 있을 법한 삼십 대 커리어 우먼의 삶을 주제로 하고 있다. 그래서일까 삼십 대 남성인 내게는 크게 공감이 가는 이야기가 없었다. 하지만 책을 읽는 내내 여자들의 다이어리를 훔쳐보는 느낌 ─ 나 변태 아님 ─ 이 들었다. 또한, 책의 영향을 받아서인지 주변의 동료 여직원들의 이야기나 생활하는 모습에 관심 ─ 역시 변태 아님 ─ 이 많아졌고, 가끔씩 그네들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려고 노력하는 나를 발견하기도 했다. 그나저나 오쿠다 히데오 작가는 남자가 아니던가? 같은 남자로서 여성의 알기 어려운 심리와 속내를 꿰뚫어보는 작가의 통찰력에 감탄했다.

 

소설 <걸>은 이렇다 할 사건이나 놀랄만한 반전이 있는 내용은 아니지만 우리네 생활 속에서 얼마든지 생길 수 있는 이야기를 잔잔하게 그리고 유쾌하게 풀어내고 있었다. 나는 평소 책을 수집하고 소장하는 걸 좋아한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소장하는 것보다 동료 여직원에게 선물하는 것이 더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옆자리 여직원에게 선물로 권했다. 이 책 때문인지 언제부터인가 괜찮은 책을 추천해 달라는 여직원들의 요청이 많이 들어오고 있다는 후문이…

걸, 오쿠다히데오

 

화창한 8월의 어느 날, 매튜와 바네사 부부는 장모님이 계신 요양원을 다녀오던 중 말다툼을 하다가 해안공원 안에 있는 외진 주차장에 잠시 쉬었다 가기로 한다. 혼자 있고 싶다는 바네사를 혼자 두고 매튜는 부부의 반려견 맥스와 함께 잠시 산책을 나선다. 잠시 후 맥스와 함께 산책에서 돌아온 매튜는 소지품을 그대로 놓아둔 채로 바네사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사실 바네사는 빚을 갚기 위한 목적으로 라이언 리라는 남자에게 납치된 것이다. 라이언은 어린 시절 우연히 발견한, 그래서 혼자만 아는 계곡 ─ 여우 덕분에 동굴이 있다는 걸 알게 되어 이름을 폭스밸리라 지었다 ─ 에 바네사를 데려간 뒤 나무 상자 속에 가둬놓는다. 상자 안에는 물과 일주일 치 먹을거리 그리고 손전등을 넣어두었다. 라이언은 사실 사악한 인격을 지닌 인물이 아니었기 때문에 바네사의 남편과 협상을 벌여 돈을 받아낸 뒤 풀어주려고 계획하고 있었다. 하지만 일은 그가 애초 계획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꼬여버린다. 바네사를 납치한 그가 남편과 몸값 협상을 벌이기도 전에 과거에 저질렀던 폭행사건으로 경찰에 붙잡히고 만 것이다. 라이언은 자신이 나가지 못하면 동굴 속 상자 안에 가둬놓은 바네사는 꼼짝없이 죽고 말 것이란 사실을 알면서도 사실을 털어놓으면 가중처벌을 받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끝까지 입을 다문 채 감옥에 갇힌다.

 

이 책의 이야기는 시작부터 매우 흥미로웠다. 과연 바네사는 죽었을까? 아니면 극적으로 탈출했을까? 하는 궁금증에 계속 책장을 넘길 수밖에 없는 흡인력을 보여준다. 그리고 라이언이 출소하면서 본격적인 이야기가 진행된다.

 

그렇게 2년 반이라는 세월이 흘러 가석방이 된 라이언은 수감 중 자신을 물심양면으로 도와주던 로라라는 여인의 집에서 생활하게 된다. 하지만 그가 출소하기만을 기다렸다는 듯이 출소한 당일 그의 전 여자 친구인 데비가 성폭행을 당하고, 며칠 뒤 그의 어머니가 괴한들에게 납치되는 등 그와 가까웠던 사람들이 하나둘 사건에 휘말린다. 그뿐만 아니라 바네사의 실종사건과 아주 흡사한 여성 납치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라이언은 그 순간 두 사람을 생각했다. 그에게 받을 돈이 있는 악덕 사채업자. 그가 아니라면 동굴에서 극적으로 탈출한 바네사.

 

책을 읽는 동안 속으로 '아 이 책 정말 재밌는데?'라며 감탄을 하며 읽었던 기억이 난다. 또한, 평소 잘 굴러가지 않는 내 머리가 추리하기 시작했다. 유사한 납치 사건은 정말 바네사 극적으로 탈출해서 그에게 복수하는 것일까? 아니면 바네사의 남편이 라이언이 범인임을 알고 그에게 복수하는 것일까? 이것도 아니라면 다른 반전이 있는 것일까? 하며 말이다. 600페이지에 달하는 꽤 두꺼운 분량이지만 벌어지는 일련의 사건 자체가 흥미로웠고, 자연스러운 번역을 통해 추리하며 읽었기에 지루할 틈이 없었던 것 같다. 결국, 내가 생각했던 결말은 보기 좋게 빗나갔지만 정말 흥미로운 시간이었다. 자신 있게 추천해본다.

 

 

 

폭스밸리

 

싱가포르 비욘드 워즈 수상작, 열두 개의 바람. 이 소설은 크게 세계를 지배하려는 절대 악에 맞서는 세인츠(SAINTS)라는 비밀조직이 페루의 마추픽추에서 벌어지는 의문의 실종사건을 해결해가는 첩보 액션 이야기와 중국의 젊은 부호, 로니 탄이 2천여 년 전 진시황릉의 숨겨진 비밀을 풀어가는 흥미진진한 모험 이야기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 소설의 주인공인 송수호와 오드리 앤 앨리스의 전생이었던 유신과 쉬바니의 판타지 로맨스 이야기로 나누어 볼 수 있다.

 

한적한 시골의 젊은 영어 선생님인 수호는 비밀조직 세인츠의 요원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어느 날 잉카제국의 나라 페루의 잉카트레일에서 대규모의 사람들이 흔적도 없이 실종된 사건을 해결하라는 임무를 부여받은 그는 이번 임무의 파트너 디에고를 만나게 된다. 참고로 비밀조직 세인츠의 요원은 비범한 재능을 가진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들 개개인의 능력은 상상을 초월한다. 주인공 수호는 열두 개의 바람을 다스리는 능력을 지녔으며, 그의 파트너 디에고는 30미터 안에 있는 사람의 과거는 물론 전생을 읽을 수 있는 능력을 지녔다. 그리고 디에고의 이 특별한 전생을 보는 능력을 통해 임무 수행 중 우연히 만난 오드리와 수호가 전생의 인연이었음을 알게 된다. 그리고 디에고 자신도 그들과 전생에 연이 있었던 사실까지…. 한편 중국 시안에서는 뛰어난 통찰력과 직관력으로 젊은 나이에 부호가 된 로니 탄은 논어, 중용, 도덕경 등 동양고전으로 만들어진 암호를 풀며 숨은 진시황릉에 가까이 다가간다. 진시황릉을 찾아가는 과정은 흡사 인디아나 존스를 보는 듯 흥미로웠다. 이 전혀 관련이 없을 것 같은 두 개의 이야기는 결국 하나의 사건을 해결하는 열쇠가 된다.

 

처음 책을 펼쳐 들고 읽기 시작했을 때 세인츠라는 비밀조직과 세계를 지배하려는 집단과의 대결 구도가 흥미롭고 깔끔한 번역 덕분에 쉽게 몰입할 수 있었다. 또한, 고대 중국사와 잉카제국에 대한 작가의 해박한 지식과 더불어 쉽게 가볼 수 없는 페루의 마추픽추에 대한 상세한 묘사는 읽는 내내 즐거움을 선사했다. 이 책은 한국 강원도, 중국 시안, 페루 마추픽추, 미국 뉴욕, 영국 런던 등 많은 지역을 배경으로 하고 있고, 이와 더불어 액션, 초능력, 판타지, 미스터리, 모험 등 다양한 요소를 포함하고 있었다. 한 권의 책에 너무 많은 것이 담겨 있어 이 책의 최종적인 장르가 모호해진 것 같은 느낌은 지울 수 없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이는 곧 읽을거리가 풍부하다는 말도 된다. 소설 <열두 개의 바람>은 분명 재미가 있고 충분히 다양한 읽을거리를 제공하고 있기 때문에 장르에 크게 신경을 쓰지 않는 사람이라면 즐겁게 읽을 수 있는 책이라 생각한다.

열두개의바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