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작년 이맘때쯤이었나?
카뮈 <이방인>의 번역 논란으로 출판업계가 시끄러웠던 적이 있었다.
<이방인> 새 번역본을 내놓은 이정서(필명) 씨가 김화영 고려대 명예교수가 번역한 <이방인>의 번역이 잘못되었다고 저격한 사건이다.
우리가 읽은 <이방인>은 카뮈의 <이방인>이 아니라는 다소 도발적인 기사가 실리기도 했다.
책을 즐기는 사람이라면 이 논란을 다들 기억하고 있을 거로 생각한다.
이미 유명 출판사에서 <이방인>이 여러 번역본으로 출간되어 있어서 노이즈 마케팅이겠거니 싶었다.
그런데 막상 이 책을 읽고 보니 좀 놀라웠다.
관심이 없어서 당시 논란이 어떻게 종결되었는지 잘 몰랐는데, 이 책이 출간된 것으로 보아 아직 진행 중이지 싶다.

 

이방인…….
그래, 워낙 유명한 고전이기에 대학 시절에 읽어보긴 한 것 같다.
잘 읽히지 않아서 종이 넘기기에 급급했던 기억이 난다.
번역이 이상한 것이 아니라, 문학을 이해하는 능력이 부족한 나를 탓하며 책을 덮었다.
그런데 이 책을 읽고 나만 그런 게 아니었단 사실을 알고 조금 안도감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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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저히 책장이 넘어가지 않는 소설을 간신히 다 읽은 나로서는
정말이지 이런 소설을 두고 세계인이 열광했다는 뒤표지 카피에 아연하지 않을 수 없었다. (p.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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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번역을 연재했던 6개월 동안 있었던 자신의 이야기를 담은 작가 이정서의 자전적 소설이다.​
주인공 이윤은 딸들과 대화하다가 문득 <이방인>에 대해 의문을 갖게 된다.
그러던 중 죽은(?) 카뮈로부터 한 통의 편지를 받게 되고, 자신이 직접 <이방인>을 번역해서 연재하기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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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은 불어 원문과 영어 번역, 김화영 번역, 그리고 작가의 번역을 비교하며 진행된다.
이미 불문학계의 대가인 김화영 교수를 저격한다는 게, 같은 출판업계 인으로서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텐데 놀랍다.
불알못(!)… 아니, 불어를 알지 못하는 나로서는 원문은 스킵하면서 읽어내려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김화영의 번역에 대한 작가의 반론은 재밌었다.​

특히, 유리창에 대한 설명이 인상 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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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뮈는 이 소설에서 이와 같은 '창(窓)'의 의미를 세 가지로 구분해 사용하고 있는데 (vitre유리창/verriêre채광창/lucarne하늘로 난 창)
궁극적으로 뫼르소가 죽음을 앞두고 마지막으로 바라보는 '하늘로 난 창(lucarne)'을 말하기 위해 이런 구분을 두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김수영은 이 모든 창을 단순히 하나의 '유리창'으로 번역하고 있는 셈이다. (p.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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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차피 선택은 독자들의 몫일 테지만,
개인적으로 몽 페르, 기요틴, 몽 피스 등 낯선 어휘가 없는 이정서의 번역이 쉽고 잘 읽혔다.
이해하기 어려웠던 내용이 그의 명료한 설명에 흩어진 퍼즐 조각이 맞춰지듯 들어맞기 시작했다.
하지만 굳이 '이런 것까지?' 싶을 정도의 세세한 오역과 오류를 지적하거나,
가끔 보이는 융통성 없는 그의 태도는 책을 읽는 동안 불편하게 만들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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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 됐건 낡은 고전의 번역을 현대적으로 번역하려는 작가의 도전정신은 높이 살만 한다.
이 책을 읽고 번역에 대해 새로운 관점이 생긴 것 같다.
지금까지 잘 읽히지 않아 포기한 고전이 많았는데
이 책을 계기로 독자가 이해하기 쉽고 읽을 맛이 나도록 재번역하는 고전이 많아졌으면 한다.

카뮈로부터온편지, 이방인

 

 

 

블랙아웃.
이 책에서 말하는 블랙아웃이란 술을 마시다가 필름이 끊기는 듯한 현상이 아닌 대정전을 말한다.
우리는 수도꼭지를 돌리면 물이 나오듯 콘센트에 플러그를 꽂으면 전기를 쓸 수 있다.
그런데 하루아침에 전기 공급이 끊어진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뉴스에서나 듣던 먼 나라 이야기라 한 번도 깊이 생각해본 적이 없던 것 같다.
그저 인터넷이나 스마트폰을 사용하지 못해 조금 불편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대정전 중에 겪게 되는 충돌과 사건의 참상을 생생하게 다룬 <블랙아웃>은 비록 가상의 시나리오 소설이지만
우리에게 언제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현실적이다.
책을 다 읽은 지금 생각해보니 내가 정말 어린 생각을 하고 있었구나, 아차 싶었다.

 

 

 

시작은 이탈리아 북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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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전이 된 이후 만자노는 시간이 천천히 흐르는 것 같았다.
여느 때와는 달리 주변의 적막감에 신경이 쓰였다.
집에 돌아온 이후 뭔가 사라졌다는 생각을 멈출 수 없었다.
냉장고 돌아가는 나지막한 소리, 위아래층에서 물을 쓸 때마다 수도관이 두둑두둑 울리는 소리,
이웃집에서 틀어놓은 시끄러운 TV 또는 음악 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았다.
지금 그의 귀에 들리는 것은 본도니의 무거운 숨소리, 포도주를 목에 넘기는 소리, 그의 잠바와 스웨터가 부스럭거리는 소리뿐이었다. (p.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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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엔 일상생활에 작은 변화가 있을 뿐 큰 문제가 일어날 것 같지 않았다.
하지만 국지적이라 생각했던 블랙아웃은 네트워크를 통해 순식간에 전 유럽을 암흑 속에 빠뜨렸다.
원자력발전소 가동이 중단되고, 사람을 살려야 할 의료기기 역시 작동을 멈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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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몇 시간 또는 며칠밖에 살지 못해요.
최선의 치료를 받더라도 달라질 게 없어요.
다른 병원으로 이송해도 이 중 살아날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는 뜻이에요.
돌봐줄 사람도 없는 상태에서 침대에 그냥 방치해놓는다는 것은 불필요한 삶을 강요하는 것이나 다름없어요.
자신의 배설물에 파묻혀서 굶어 죽거나, 목말라 죽거나, 얼어 죽을 운명이에요.
그렇게 되기를 바라는 거예요? (p.2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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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무서워졌다.
당연하다고 여기고 있던 일상을 불안과 공포, 그 자체로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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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전직 해커이자 IT 전문가 만자노는 본능적으로 이번 사건이 예사롭지 않다는 걸 느끼고 원인을 찾았다.
그는 정부기관에 이 사실을 알리지만 일이 이상하게 꼬여 테러리스트로 의심받고 쫓기는 신세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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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문학답게 등장인물의 이름과 지역명 등이 낯설고 어려웠다.
뿐만 아니라 560페이지에 달하는 무시무시한 분량이 선뜻 집어 들기 어렵게 만들었다.
하지만 첫 장을 여는 순간부터 마지막 장을 덮는 순간까지 푹 빠져 읽었다.
사실 IT 용어라든지 내가 이해하기에 좀 어려운 용어가 나왔는데도 불편함 없이 읽었다는 것이 신기하다.
전개가 빠르진 않았지만 중간중간 등장하는 스릴러적 요소 때문에 지루할 틈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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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다른 스릴러 소설을 찾는다면 이 책을 적극 추천한다.

재난소설, 스릴러소설, 블랙아웃, 대정전

 

 

 

직장 동료에게 추천할 책을 찾는데, 문득 이기호 작가가 떠올랐다.
그는 내가 이름 아는 몇 안 되는 한국 작가다.
2년 전 가을, <차남들의 세계사>라는 책을 통해서 그를 처음 알게 됐다.
내가 책 읽는 즐거움을 알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던 시기였다.
그의 특유의 문체와 해학미는 금방 날 사로잡았고, 또 다른 작품을 찾아 읽게 하였다.
그래서 그를 알게 해준 책, <차남들의 세계사>를 동료에게 추천했다.

그 이기호 작가의 새 책이 출간됐다.
제목은 <웬만해선 아무렇지 않다>로 무려 마흔 개의 단편을 모은 단편집이다.

 

 

 

첫 단편부터 기분 좋은 느낌에 입꼬리가 스윽 올라간다.
하지만 이내 가슴 한쪽이 묵직해진다.
피식… 히죽… 그리고 씁쓸…
이 책을 읽는 동안 내 모습은 계속 이랬지 싶다.

눈높이를 낮추어 취업을 준비하는 대학생, 사업이 망해 자살을 기도하는 남자,
죽은 아내를 잊지 못해 연구실에 침대를 놓은 대학 교수, 카드값 때문에 아내를 피해 산으로 도망간 남편,
무작정 바다로 떠난 대책 없는 청춘들, 5월 8일 어버이날이 생일인 형 등.
이 책은 그리 특별할 것 없는,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은 삶을 사는 인물에 관한 이야기다.
최선을 다해 살아왔지만, 세상이 마음처럼 쉽지 않았던 그들의 인생 이야기를
이기호 작가 특유의 문체와 해학미로 풀어냈다.

가장 마음에 드는 이야기는 마주 잡은 두 손이다.
아무리 열심히 살아도 책 한 권도 여유롭게 살 수 없는 여대생과 남자 소설가의 이야기로,
마치 내가 연애를 시작하는 듯 두근두근 읽어 나갔다.
두 사람이 잘되었으면 하는 바람에서였을까… 결말을 읽고 미소가 지어졌다.
하지만 누가 봐도 열심히 살아온 그녀가 왜 이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을까? 하는 생각에 갑자기 먹먹해졌다.
딱! 다섯 페이지다.
다섯 페이지짜리 단편을 읽고 이런 설렘과 씁쓸함을 동시에 느끼리라곤 생각지 못했다.
역시 이기호스럽구나 싶을 정도로 재기 넘치는 단편이다.

단편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모두 평범한 사람이기에,
다들 그렇고 그렇게 살아가는구나, 나만 힘든 게 아니구나 싶어 왠지 모를 안도감이 들었다.
사실, 단편 속 이야기 중엔 정신력이 어지간히 강한 사람도 버티기 힘든 내용도 많았는데,
작가는 견뎌내며 긍정적으로 살아가길 바라는 마음에서 이런 단편집을 쓴 것 같다.
<웬만해선 아무렇지 않다>란 제목도 그렇고….

봄이 오는 계절에 마음이 제법 포근해지는 단편집이다.
위로와 격려가 필요한 사람이라면 꼭 한 번 읽어보라 권하고 싶다.

웬만해선아무렇지않다, 이기호, 단편소설집, 단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