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수사물의 전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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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죄 수사물이라면 영화나 드라마, 소설, 뭐든 가리지 않는 편이다.
그런데 수사물은 읽다 보면 나라마다 조금씩 특징이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드라마 <셜록>이나 M. J. 알리지의 <이니미니>와 같은 영국 수사물은 대개 침울한 배경에 개인 탐정이나 수사관의 활약이 특징이다.
반면, 미국 수사물은 <멘탈리스트>의 페트릭 제인이나 <화이트칼라>의 닐과 같이 경찰이 아닌 특출한 개인의 수사에 협조하는 것이 특징이다.
또 한 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미국 수사물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완벽한 주인공이나 근사한 사무실 등을 영국 수사물에서는 좀처럼 보기 어렵다는 거다.
그래서일까? 영국 수사물이 조금 더 현실적이고 우울(?)하다.
<슬리피 헤드>는 이런 영국 수사물의 특징이 잘 드러난 수사물이다.

 

 

 

의도된 락트인 증후군(Locked-in syndro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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락트인 증후군.
의식은 있지만, 전신마비로 인하여 외부자극에 반응하지 못하는 상태를 말한다.
뇌간 일부가 손상을 입었지만, 대뇌와 소뇌는 정상이기 때문에 사고도 정상적으로 할 수 있다.
다만, 자발적으로 움직이거나 말은 전혀 하지 못한다.
한마디로 죽은 것도, 산 것도 아닌 채로 평생을 침대에 누워지내야 한다는 말이다.
이 병이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엘르 편집장이었던 장 도미니크 보비 때문이라고 한다.
교통사고로 락트인 증후군에 걸린 그는 눈을 통해 의사를 표현했고, 알파벳까지 소통이 가능해져 책을 발표했다고 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책이 발표되고 3일 후 그는 숨을 거두었다.
그의 생애는 <잠수종과 나비>라는 이름의 영화로 제작되었고, 이를 통해 락트인 증후군이란 병이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뜬금없이 이런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이 책에 일어나는 연쇄 살인 사건이 락트인 증후군과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도 사고 발생한 락트인 증후군이 아닌, 의도된 락트인 증후군 말이다.

 

 

 

인간적인 형사 톰 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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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과적인 수사를 위해서는 돈독한 팀워크가 중요하다… 라고 생각하겠지만, 수사물을 보면 팀워크가 필수 조건이 아닌 경우가 많다.
이 책의 주인공 톰 쏜 형사 역시 조직 내 상하관계나 동료는 전혀 의식하지 않는다.
땅딸막한 체격에 무뚝뚝한 성격, 톰 쏜 형사는 여러 의미로 영국 수사물의 전형적인 주인공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의 일상을 들여다보면 생각이 또 달라진다.
컨트리 음악을 좋아하고, 축구를 좋아하며, 여자를 좋아하고, 어이없는 농담을 즐기는 평범한 아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연쇄 살인범을 쫓는 강력계 형사치곤 상당히 인간적으로 느껴졌다.

아무튼, 톰 쏜 형사가 요즘 사건으로 바쁘다.
런던의 각기 다른 지역에서 뇌졸중 증세로 세 여성이 사망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처음에는 세 가지 사건을 이어주는 연결 고리가 어디에서도 나타나지 않아 단순 자연사로 처리가 되었다.
그러나 그녀들의 몸에서 신경안정제가 검출됨에 따라 연쇄 살인 사건임이 밝혀지고, 이에 경찰은 수사본부를 꾸려 수사에 착수한다.
그리고 얼마 후 또 다른 희생자 앨리슨 윌렛이 병원 앞에서 발견된다.
그녀는 다행히 목숨을 잃지 않았지만 락트인 증후군 상태에 빠지게 된다.​

그러던 중 톰 쏜에게 쪽지가 하나 전달 된다.
연습에 연습을 거듭해서 완벽한 상태의 앨리슨을 만들었다는 내용이 담긴 범인의 쪽지.

"앨리슨 윌렛은 범인이 처음으로 저지른 실수가 아니었어. 앨리슨은 범인이 처음으로 제대로 한 범행이었어."

톰 쏜은 범인이 앞으로도 또 다른 여성들을 락트인 증후군 상태로 만드리라는 것을 직감한다.

마치 짜 맞춘 듯 완벽하게 한 사람을 지목하는 심증들, 톰 쏜도, 나도 이미 범인을 알고 있었다.
전반부에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범인을 쉽게 예측할 수 있었다.
하지만 깨지지 않는 알리바이 때문에 머리가 아팠다.
그래서 중후반부터는 범인의 동기를 밝혀내는 데 초점을 두고 읽어나갔다.
톰 쏜의 끈질긴 탐문조사와 통찰력으로 범인에 대해 결정적인 단서를 찾아내고 범인을 밝혀낸 순간 뒤통수를 한 대 맞은 듯 했다.
전혀 생각지 못했던 인물이 범인이었다.
톰 쏜도, 나도 제대로 당했다.
범인도 범인이지만 앨리슨이 범인에게 나름의 복수를 하는 장면은 정말 여운이 오래갈 것 같다.

영국 수사물답게 전반적으로 내용과 분위기가 제법 묵직했다.
하지만 마냥 무겁기만 한 것은 아니다.
중간중간 톰 쏜과 앤의 관계는 음식에 맛을 내기 위해 넣는 조미료 같다고 할까?
흥미를 유발할 정도의 적당한 분량과 수위가 정말 좋았다.
영국 수사물을 좋아한다면, 혹은 미국 수사물에 질렸다면 놓치기 아까운 책이다.
톰 쏜 형사의 다음 사건도 기대해 본다.

범죄스릴러소설, 슬리피헤드

 

 

 

바빴다. 그냥 바쁜 게 아니라 정신없이 바빴다.
단독으로 맡은 프로젝트만 다섯 개… 지난 한 달간, 새벽 2시 전에 퇴근한 적이 없는 것 같다.
몸도 정신도 지치니, 여름 휴가도 귀찮아졌다.
집에서 쉬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그래서 이번 휴가엔 집에서 뒹굴거리며 밀린 책을 읽기로 했다.
헬렌 그레이스 시리즈 세 번째 작품 <인형의 집>과 <언틸유아마인>의 두 번째 작품인 <비포유다이> 등.
밀려있는 책을 생각하니 쌓인 피로가 벌써 풀리는 듯하다.

겨울 작가의 <모럴센스>가 이번 휴가 때 읽은 첫 번째 책이다.
현재 코미코에서 인기리에 연재 중인 웹툰 <모럴센스>의 단행본으로 1, 2권이 출간되었고, 물론 지금도 연재 중이다.
웹툰을 즐겨보지 않는 편이라 살짝 망설였는데, 펼쳐보니 그림체가 일단 마음에 들었다.
특히, 여자 주인공의 무표정이 상당히 매력적이다.
정신차려 2D 여자에게 빠지면 안 돼….

 

 

 

만남엔 이런저런 형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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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녀가 맺어질 때는 우선 마음이 서로 통해야 한다.
그리고 정신적으로 사랑이 깊어진 다음 육체적인 관계로 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런 방향이 바람직하며 가장 이상적인 형태의 만남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만남엔 이런저런 형태가 있고, 어떤 형태의 만남이든 그 속에서 성장하는 것이 또 우리다.

사람에게는 각자의 취향이 있고 주관이 있어, 백 쌍의 커플이 있다면…….
그들이 아무리 비슷해 보여도, 사랑의 방식은 백 개가 아니라 이백 개일 것이다. (본문 중에)

<모럴센스>는 보통과 아주 조금 다르게 연을 맺게 된 남녀의 이야기다.
여러 가지 형태로 사람들은 연을 맺고 있지만, 연을 맺으면 쉽게 끊어지지 않도록 서로 노력해야 한다는 걸 배울 수 있었다.

 

 

 

우선 간단한 용어부터 배우고 가자.
웹툰을 보는데 무슨 용어를 배우느냐고?
앞에서 '보통과 아주 조금 다르게 연을 맺게 된 남녀의 이야기'라고 말했다.
말 때문에 우리는 용어를 알고 가야 한다. 일단 보자.​

돔 : 지배자
섭 : 피지배자
S(새디스트) : 가학자
M(마조키스트) : 피가학자
에세머 : BDSM 행위를 즐기는 사람을 지칭
바닐라 : SM과 관계없는 일반인​

응?!
그렇다. <모럴센스>는 SM을 다룬 웹툰이다.
사실 SM이란 것을 이런 식으로 배우게 될 줄 나도 몰랐다. ㅋㅋㅋ

내용은 대략 이렇다.
남자 주인공 정지후는 잘생긴 외모에 모든 이들에게 자상하고 모범적인 인물이다.
덕분에 여자 직원들에게도 인기가 많다. 부러운 자식…….
하지만 모든 사람이 완벽할 수 없는 법, 그에게도 누구에게도 말 못할 비밀이 한 가지 있었다.
바로 다른 사람에게 명령받거나 지배받는 것을 좋아하는 M성향이라는 것.
부서를 옮기게 된 그는 경비원의 배달 실수로 이름이 비슷한 같은 팀 여자 직원 정지우에게 은밀한 성적 취향을 들키고 만다.
지후는 자신의 비밀이 폭로될까 노심초사하며 긴장, 초조, 불안, 서스펜스한 하루하루를 보낸다.

그러던 어느 날 사고로 지후가 머리를 부딪치게 된다.
괜찮다는 지후에게 병원에 가라는 지우의 말투는 강압적으로 들렸고, M성향의 그는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어디서 나온 용기일까? 뜬금없이 고백한다.
자신의 주인이 되어달라고…….
이 자식 뭐야. 진짜 머리 다친 거 아냐? ㅋㅋㅋㅋㅋㅋㅋㅋ
아무튼 지후가 변태라는 사실을 알기 전, 그를 좋아했던 지우는 일단 3개월이라는 기한을 가져보기로 한다.
이리하여 두 사람의 스릴있고 유쾌하며 달달한 로맨스가 시작되는데…….​

SM이라는 자극적인 소재를 이렇게 밝고 유쾌하게 그려낼 줄 생각도 못 했다.
SM이라는 단어가 주는 음침하고 어두운 편견을 깨기 위해 표지도 일부러 밝은색을 선택한 건가?
유머 코드도 나랑 잘 맞았는지, 큰소리로 껄껄거리며 웃게 되는 장면도 많았다.
웹툰을 즐겨보는 편이 아닌데, 지금은 코미코에 가입해서 다음 이야기를 챙겨 읽고 있다.
정말 재밌다. 로맨스 웹툰을 좋아하시는 분이라면 적극 추천한다.

책을 먼저 읽고 웹툰을 보고 느낀 건, 웹툰이든 소설이든 역시 종이 넘기는 맛으로 봐야겠다는 거다.

로맨스웹툰, 모럴센스

 

 

 

주말에 산에 오르다 아버지의 '늙음'을 실감했다.
인간은 결국, 누구나 늙기 마련인데도 순간 마음이 복잡해지고 서글퍼졌다.
어느덧 나도 늙어간다는 것을 걱정해야 할 나이가 된 것이다.​
그래서일까? 최근 읽은 SF 소설 한 권이 인상 깊다.
김상묵 작가의 <한계에서>라는 작품이다.
광속을 뛰어넘는 기술을 갖게 된 미래, 생명 연장 기술, 그리고 존재의 이유를 찾기 위한 이들의 분투를 그린 소설이다.

 

 

 

한계에 다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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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의 끝 간 데까지 다다르겠다는 포부는 광속보다 몇 배 빠른 우주선을 개발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그 욕망은 '신데렐라 프로젝트'로 이어졌다.
전 세계의 아동을 선발해 우주인 교육을 했고, 경쟁에서 살아남은 승자들은 최종 승무원이 되었다.
우주선이 발사되는 역사적인 날, 전 인류는 똑똑히 목격한다.
신데렐라적 전환의 시대를 열어줄 거라 믿었던 우주선이 빛이 되어 사라져 버리는 것을.
그와 동시에 인류는 깨달았다. 한계에 다다랐다는 것을.
그리고 220년이 지났다.

 

 

 

우주의 한계를 뛰어넘으려던 '신데렐라 프로젝트'가 좌절된 미래의 지구.
인류는 복제 기술을 이용한 '환생'에 몰두하게 된다.
환생이란 50세가 되면 줄기세포를 추출하고 배양하여 복제한 20세 육체로 바꿔치는 기술이다.
이른바 '갈라파고스적 전환'이다.
환생이란 무한정 쓸 수 있는 기술은 아니다.
조건이 잘 맞을 경우 최대 8번까지 환생할 수 있다.
중간에 환생 피로 판정을 받게 된다면 더 이상의 환생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여기에도 약간(?)의 문제가 있었다.
환생 후 버려져야 할 육체에 생명이 깃드는 현상이 아주 드물게 일어나는 것이다.
이들은 헛것, 허상이란 뜻으로 '허깨비'라고 불리며, 2번째 주인으로서 자유와 지위를 보장받는다.
허깨비들은 태어남과 동시에 환생 전 기억이 삭제되기 때문에 어떤 질문을 갖고 있다.
나는 누구며, 왜 여기에 있는가? 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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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주인공인 메밀과 칠은 김준의 6번째, 7번째 허깨비다.
칠은 환생 전 자신의 이름에 대한 내역이 궁금했다.
칠은 평범하게 살고 있던 6번째 메밀을 찾아가 자신과 함께하길 제안한다.
메밀은 본능적으로 그와 함께해야 함을 느꼈다.
두 사람(?)의 이름을 쫓는 여정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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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다 보면 먼 미래에는 정말로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육체적 능력이 쇠퇴함에 따른 사회의 곱지 않은 시선과 경제적 어려움에 부닥친 우리네 노인들을 보고 있자면 더 그렇다.​
나도 언젠가는 그들과 같은 위치에 설 테니까.
늙음과 미래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보는 좋은 시간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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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묵 작가는 제1회 <세계의 문학>에서 신인상을 받았고, 수상 이후 오랜 시간을 준비해서 <한계에서>를 내놓았다.
존재의 이유를 찾으려는 이들의 심리묘사가 뛰어나고, 이들의 여정은 시간이 흐를수록 강력한 흡입력을 보여줬다.
이미 이 책의 연작소설이 준비 중이라고 하니 벌써 다음 이야기가 기다려진다. 

SF소설, 한계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