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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명관(저자)

고래의 저자. 개인적으로 아주 좋아하는 작가.

고래의 작가 천명관님께서 드디어 장편소설을 냈다. 어쩌다가 인터파크 들어가서 구경하다 배너에 떠있는 천명관이라는 글자를 보고 닥치고 구매했다는...

고래라는 작품에서 참신함과 독특함 그리고 기발함 여러가지를 나의 뇌에 각인시킨 그 작가라 더욱더 기대가 컸다. 그 기대는 고스란히 감동으로 다가왔다. 뭐 이 작품을 두고 감동을 받았다기 보다는 그의 작가적 재능에 감동을 받았다고 해야할까? 작중 내내 아~ 이 사람 글 잘쓰네. 역쉬.. 하는 감탄을 연발하며 봤으니 읽는내내 행복했던 소설이다.

책장 넘기는 속도가 장난아닌데다 넘어갈때마다 얼마 남지 않은 장수에 아쉬움을 가져야만 했던 근래에 나에게 이런 집중력을 보인 책이 있었던가? 하는 생각이 떠올리게 할 정도로 아주 마음에 드는 책으로 남겠다.

자타가 공인하는 인생 패배자이자 이제 쉰줄이 다된 영화 감독이지만 실패의 낙인이 찍혀버린 주인공이 어머니 집에 들어가게 되면서 겪는 가족들의 이야기를 아주 기발하고 재미있고 유머러스하게 그려놓았고 막판 약간의 감동과 형제애를 느낄 수 있어 더 좋았다. 작중에 나오는 헤밍웨이의 삶과 그의 작품 그리고 전반적으로 이어나가는 영화감독과 작품들의 이야기도 곁들여져 있는 부분이 나름 약방의 감초역활을 하며 독자들의 집중력을 높여준다. 헤밍웨이와 주인공의 삶을 비교하고 또 부침많았던 그의 형과 비교하며 부드럽게 이어가는 이야기의 흐름과 플롯 구성은 이 작가를 더욱 돋보이게 한다.

인생의 나락에서 헤어날 수 없었던 절망에서 차츰 자신을 찾아가고 다시 일어설 수 있는 힘을 찾게 해주는 어머니와 가족들의 이야기... 신은 온 세상에 자신의 손길이 닿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 어머니를 창조했다고 하는 말이 있듯이 나락의 주인공과 오갈데 없던 형제를 무조건적인 사랑으로 품는 어머니. 비록 자신의 피는 섞이지 않은 아이도 따스한 손길로 감싸주시던 어미니. 그런 어머니와 가족애를 잘 그려놓았고, 그 사랑을 바탕으로 절망과 추락만 있을것 같던 주인공이 차츰 자신에게 희망을 찾고 자신의 인생을 찾아가는 모습에서 나 자신을 돌아게보게하는 그런 소설이었다.

어떠한 절망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가족들의 사랑으로 헤쳐나갈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그런 책이겠다.

그런데 약간 욕이 난무하는 상황이 가끔 있는데 나름 그 상황에서 충분히 나올 법한 이야기여서 거부감 보다는 폭소를 유도하려 한 것 같다. 거슬리긴 하지만 그리 큰것 같지는 않은 듯.

요즘에 보기 드믄 재미와 완성도와 독특함을 찾은 것같아 행복했던 시간이었음.

185페이지
그녀는 한마디로 기내식 같은 여자였다. 별로 당기지는 않는데 안 먹으면 왠지 손해일 것 같고, 그래서 억지로 먹기는 먹되 막상 먹으려고 보니 뭔가 복잡하고 옹색하기만 하고, 까다로운 종이접기를 하듯 조심스럽고 겨우 먹고 나면 뭘 먹었는지 기억도 잘 안나고, 식후에 구정물 같은 커피를 마시다보면 뭔가 속은 것 같은 기분도 들고, 갖출 건 다 갖춘 것 같은데 왠지 허전하고, 결국 포장지만 한 보따리 나오는 그런 여자였다. 그녀의 얼굴엔 언제나 '안전벨트를 매주시겠습니까, 손님?'이라고 쓰여 있었다.
: 이 책에서 이 저자가 쓰는 대표적인 표현방식이 잘 드러나 있다. 이 작품 중에서 이런 표현은 약방의 감초처럼 독자들을 웃게하고 감탄하게 한다. 이 책의 매력이라 하겠다. 또한 이 작가의 매력이라 하겠다. 작품 고래에서 느꼈던 독특한 표현과 기발한 표현 등이 고스란히 나타나있어 너무 좋았다는...

216페이지
우리는 서로 사랑했던 걸까? 그럴 리는 없을 것이다. 우리는 아무런 약속도 기대도 없는 쿨한 사이였을 뿐이다. 열정이 없으니 상처도 남지 않는 게 당연했다. 하지만 그녀가 캐나다로 떠나고 난 뒤, 나는 그녀이 얼굴을 떠올릴 때마다 가슴 한편이 휑해지는 걸 느끼곤 했다. 그런 상실감은 꽤나 오랫동안 지속되었는데 그녀의 빈자리는 아내가 떠났을 때보다 더 크고 깊었다. 그것을 사랑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내가 믿기론, 사랑이란 여자의 입장에선 '능력 있는 남자에게 빌붙어서 평생 공짜로 얻어먹고 싶은 마음'이고 남자의 입장에선 '자신의 유전자를 가진 아이를 건강하게 낳아 양육해줄 젊고 싱싱한 자궁에 대한 열망'일 뿐이었다.우울한 얘기지만 그것이 사랑의 본질인 것이다. 여기에서 벗어나는 그 모든 사랑 이야기는 대중을 기만하는 사기일 뿐이다.
: 실패한 영화감독이자 인생의 낙오자인 주인공의 심정을 여실히 보여주는 대목이다. 주인공의 어두운 세계관을 잘 보여주고 있다.

242페이지
-그, 그러지, 뭐.
-혹시... 계란 넣으세요?
- 응?
- 계란요. 전 안 넣는데 혹시 좋아하시면...
- 나도 그냥 민짜가 좋은데...

그가 혼잣말을 하듯 웅얼거렸다.
잠시 후, 우리는 식탁에 마주 앉아 라면을 먹었다. 두 사람 다 말이 없어 고요한 집 안엔 후루룩거리는 소리만 어색하게 떠다녔다. 한동안 말없이 라면을 먹던 그가 문득 생각난 듯 물었다.
- 이게 무슨 ... 라면인가?
- 삼양라면인데요.
내가 대답하자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없이 라면을 다 먹은 후, 자리에서 일어서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라면은 역시 삼양라면이지.
그것이 미연 아버지가 집에 들어온 이후, 우리가 나눈 가장 긴 대화였다. 리면은 그냥 '민짜'로 끓이는 게 낫다는 것과 '라면은 역시 삼양라면'이라는 내용이 전부였지만 그나마 라면에 대한 취향이 둘 다 같다는 것을 확인한 중요한 대화였다.
: 이 작가의 글 솜씨가 아주 마음에 든다. 전체적으로 이 작품에 흐르는 유머는 내마음을 사로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