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쪽
어둠 속에 어렴풋이 비치는 내 눈을 바라보며 입을 크게 벌려보았다. 마치 한 입에 대량의 물고기를 삼키는 흑고래처럼 흑백의 경치를 잇달아 삼킨다. 그때, 나는 과거의 나와 눈이 마주쳤다. 그런 기분이 들었다. 순간적인 일이었지만, 코끝을 창에 묻고 도시의 불빛을 꿈꾸던 10년 전의 어린 내가 반대 방향으로 달려가는 고속버스 안에 있는 것 같았다.
당황해 돌아보면서, 스쳐지나간 버스를 눈으로 좇는다. 하지만 두 대의 버스는 맹렬한 속도로 각기 '과거'와 '미래'를 향해 멀어질 뿐. 창에는 다시 물방울이 가득 찬다.
- 이 책의 전체적인 느낌이 잘 드러난 부분이다. 전체적으로 여성작가의 섬세한 표현력이 이 책의 특징이 아닐까 하는 느낌이 든다. 버스를 타고가며 자신의 과거와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이 교차하는 장면을 감각적으로 잘 표현해주고 있다.
16쪽
집을 떠난 것이 불과 엊그제 일 같이 느껴질 만큼 풍경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색연필로 그린 풍경화를 지우개로 지운 것처럼 그저 색채만 전체적으로 허옇게 바랬을 뿐.
- 10년 만에 다시 돌아온 집에 대한 전체적 표현이 참신하고, 매력적이다.
46쪽
문득 고개를 드니 완만하게 경사진 언덕 끝으로 이제 곧 해가 지려 하고 있다.
막 낳은 달걀의 노른자처럼 매끈하고 짙은 오렌지색 태양.
62쪽
롤 케이크처럼 이불을 둘둘 만 채 혼자 손가락을 튕겼다.
- 이 책에는 배경에 대한 묘사가 상당히 많이 있고, 또한 그 배경을 전체적인 책 내용과 걸맞게 음식으로 묘사한 부분이 많아 전체적 주제와 잘어울리게 맛깔나게 표현해주고 있어 읽는 재미를 배가시킨다.
59쪽
모계 가족의 기질은 반드시 대를 걸러 유전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즉 엄마는 너무도 정숙한 외할머니에게 반발하여 그것과는 정반대로 파란만장한 삶의 방식을 선택했고, 그 엄마 밑에서 자란 나는 그렇게 되지 않을 거라고 반발하여, 또 그것과는 정반대인 평범한 삶의 방식을 선택했다. 영원히 끝나지 않는 오셀로 게임을 하고 있는 것처럼, 어머니가 하얗게 칠한 부분을 딸은 열심히 검게 덧칠하고, 그걸 그 딸인 손녀는 다시 하얗게 칠하려고 노력한다.
- 여성 작가가만이 표현할 수 있는 부분이라 생각된다. 감칠맛나는 표현과 적절한 비교가 이 책의 묘미다.
62쪽
그 작은 공간을 란도셀(일본의 초등학생들이 등에 메는 가방:주)처럼 등에 짊어지고, 나는 지금부터 천천히 앞으로 나아갈 것이다.
나와 식당은 일심동체.
일단 껍데기 속에 들어가 버리면 그곳은 내게 '안주의 땅'이다.
- 달팽이라 이름짓는 이유.
186쪽
세상에는 개인의 힘으로 어떻게 할 수 없는 일이 있다는 건 안다. 내 뜻대로 움직일 수 있는 일은 극히 미미한 것이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건은 큰 강물에 휩쓸려 흘러내려가면서, 내 뜻과는 상관없이 누군가의 커다란 손바닥 안에서 좌우된다.
인생에는 좋은 일보다 나쁜 일이 훨씬 많다. 내 인생은 특히 그런 느낌이 들지만, 그래도 작은 행ㅂ고을 찾아가면서 살아왔다.
- 999% 동감이다.
188쪽
작년에 좋아하는 남자에게 고백하고 싶다고 아르바이트로 번 용돈을 모아서 달팽이 식당에 와준 고등학생 모모 양이 "너무 맛있었어요."라며 또 둘이서 예약을 넣어 주기도 하고, 결과적으로 달팽이 식당의 제1호 커플이 된 후계자 씨와 선생님이 두 사람의 결혼식 사진을 보여주러 오기도 했다. 또 첩 할머니가 연하의 남자 친구를 대동하고 오기도 하고, 거식증 토끼를 데리고 왔던 고즈에가 아버지가 출장 간 동안 어머니, 토끼와 셋이서 내 요리를 먹으러 와 주기도 했다.
- 이 책의 옴니버스식 줄거리에 해당하는 부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