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고 또 사랑하는 영화. 
올해의 반을 오페라의 유령에 흠뻑 빠져서 보냈다. 

극단적이고 아주 위태로운 세 명의 관계에서부터 
신비로운 무대 장치와 음악, 화려한 색감의 의상과 무대. 
어느 하나 마음을 빼앗지 않는 게 없을 정도로 좋았다. 

태생, 재능, 외모, 삶, 사랑. 무엇 하나 현실적인 구석이 없는 그야말로 유령같은 인물인 에릭과 재력이며 신분, 외모 등 모든 것을 탄탄한 현실에 발붙이고 선 라울. 사랑하는 남자와 자신을 천상으로 끌어올리는 음악의 천사 사이에서 갈등하는 크리스틴... 

스페셜 에디션을 보니, 크리스틴은 극의 중후반까지 솔로 곡이 없다고 한다. 있다면 그것은 누군가의 대역으로 나온 것에 불과하고 대부분의 경우 라울이나 팬텀과의 이중창이라고. 그것은 크리스틴이 극의 후반까지 자립적이지 못한 것을 나타낸다고 했다. 하긴 그렇기도 했다. 오페라 극작을 막 뒤에서 지배하는 유령의 영향력은 너무나 커 크리스틴은 물론이고 라울 역시 중 후반까지 제대로 비중이 없다는 느낌인데 크리스틴은 오죽할까. 
그렇지만 the point of no return 에서는 오히려 크리스틴이 팬텀을 압도하는 것 같은 느낌마저 들었다. 내 입장에서는 그 곡이 에미 로섬을 살렸다. 워낙 사라 브라이트만이 크리스틴으로 잘 어울려서 에미 로섬에 도무지 만족을 못 하던 상태였으니까.

오페라의 유령은 그 아름다운 곡들로 너무나 유명하다. 
뮤지컬의 제목과 같으면서 주제곡인 The Phantom of the Opera 
크리스틴이 카를로타의 대역이 되어 부르는 Think of me 
라울과 크리스틴의 이중창, 너무나 달콤한 사랑 노래 All I aks of you
소름돋을 정도로 서정적이고도 열정적인 팬텀의 The Music of the night
제목 그대로 팬텀과 크리스틴이 더이상 돌이킬 수 없는 지점에서 부르는 The point of no return

이 중에서 All I ask of you는 너무 좋아서 가사를 다 외워 버리기까지 했다. 



2004년작인 이 오페라의 유령도 좋지만 1990년도에 만들어진 오페라의 유령도 좋아한다. 
이상하게 인터파크에 나온 상품은 없지만. 이전에 언제 백화점에 갔을 때 싸게 팔길래 별다른 기대를 안 하고 한 번 볼 생각으로 집어 왔던 영화였는데, 이게 대박이었다. 
전체적으로 독일의 대문호 괴테의 ’파우스트’ 를 플롯의 기본 구조로 깔고 진행되는 이 영화는 
뮤지컬과는 전혀 다른 느낌이지만, 아주 좋다. 뮤지컬의 화려한 색감과 락 음악은 팬텀의 신비스러움을 강조하지만 아무래도 ’오페라’ 와는 조금 동떨어진 느낌이다. 더욱이 팬텀의 신비스러운 지배에 대한 묘사는 2% 부족한 감이 없지 않아 있다. 
이 영화는 조금 다른 부분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오페라’ 다. 

’La traviata’, ’Aida’ , ’Faust’ 등 영화 내에 등장하는 오페라와 그 무대, 아리아만 해도 몇 개에 달한다. 더 있었던 것 같은데.. 미안한 말이지만 테리 폴로와 찰스 댄스의 마지막의 그 이중창은(원래는 메피스토 역의 바리톤까지 합쳐 삼중창이지만) 에미 로섬과 제라드 버틀러의 이중창인 The Point of no return에 비할 바가 아니다. Oui, c’est toi que j’aime. 그래요. 당신을 사랑해요. 

http://www.youtube.com/watch?v=dZZiAWC_bIw


크리스틴이 카를로타와 경쟁하는 la bistro의 장면 역시 아무리 보고 또 보아도 온 몸에 소름이 돋을 정도다. 시끄럽게 꽉꽉거리는 카를로타의 짙은 화장을 한 얼굴 위로 한줄기 바람같이 크리스틴의 아름다운 목소리가 너무도 가볍게 날아 오르는 장면은 보고 또 보아도 좋다. 

"La Fille du Regiment" 중 "Par le rang et par l’opulence"
http://www.youtube.com/watch?v=hov7Ulve2-8
 

음악과 다른 장치 외에 마음에 드는 점을 꼽으라면 에릭의 얼굴을 끝까지 관객에게 보여주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조엘 슈마허의 오페라의 유령에서 유령 역을 한 제라드 버틀러는 유령이라기에는 너무 잘생기고 섹시했다. 아니 그래서 싫었다는 건 아니었지만, 어쨌든.

아쉬운 점이 있다면 팬텀의 과거사와 가족사를 등장시켜 그 신비한 인물을 결국 땅 위의 한 인간으로 만들어 버렸다는 것. 물론 인간으로서의 에릭을 이해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좋았지만 다른 소설이나 영화와는 달리 팬텀은 인간 이외의 다른 족속 같은 이상한 매력을 지닌 캐릭터인지라 그렇게 누구의 아들인가, 하는 정체성을 확실히 밝히지 않아도 좋았을 뻔 했을 텐데.  


본 적은 없지만 다른 버전으로 ’다카라즈카’ 라는 것도 있다고 들었다. 
이름으로 보아서는 일본 버전인가? 싶기도 하지만 가사는 온통 영어였다. 웨버의 작품이나 찰스, 테리 폴로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특이한 재미가 있었다. 
paris is a tomb 나 where in the world 는 꽤 마음에 들어 지금도 mp3에 담아서 들을 정도다.  

 




오페라의유령, 뮤지컬

프랑크푸르트에 자리한 미술관들 중 첫손에 꼽힐 만한 미술관, Staedel. 
거기서 지금 뭉크의 전시가 열린다. 
2009년 10월 18일까지니 얼마 남지 않은 셈이다. 
가려고 가려고 벼르고 있었지만 여태까지 가지 못했다. 

다른 전시라면 벼라별 이유들이 그저 게으름의 핑계가 될 수도 있겠지만, 
뭉크의 전시는 다르다. 
조금이라도 더 좋은 컨디션으로 조금이라도 더 민감하게 그림을 받아들이고 싶어서 
날을 고르고 고르는 것이다.
그만큼 뭉크를 만나는 것이 떨리기 때문이다... 

처음으로 그림 앞에서 운 게 뭉크 그림 앞에서였다. 
뭉크의 그림과 내 영혼이 공명하는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뭉크의 그림은 나를 무섭게 
흔들어 놓는다. 온통. 뿌리부터. 

이번에 열리는 전시회는 그의 유화 작품이 아닌 Graphik 작품이라고 하지만 
뭐 어떠랴. 도리어 맨 선으로만 거칠고 굵게 그려진 작품을 볼 수 있다고 하니 더 기대가 된다. 

포스터의 그림부터가 예사롭지 않아 역시 뭉크라고 뛸 듯이 좋아했다. 
그림의 구도가 정확히 삼각형을 이루며 그림의 정면에 내세워진 세 인물들을 자세하고 선명하게 표현하고 뒤로(위로) 갈수록 극단적일 정도로 인물들을 단순화하는 것만 볼 때는 그림 자체가 안정적인 분위기에 있어야 하는데, 이 그림은 결코 그렇지 않다. 도리어 금방이라도 기우뚱할 것처럼 위태롭기만 하다. 양 옆으로 늘어선 남자들이 뒤로 갈수록 심하게 단순화되어서 관객 입장에서는 정 가운데 위치한 소녀의 머리 위로 길쭉한 몸통과 머리를 쌓아 놓은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일수도 있고, 일반적이지 않은 이 상황 자체가 그런 분위기를 만들어 내는 것 같기도 하다. 마주보고 길게 늘어선 실크햇의 신사들과 그 가운데의 불안한/음울한 얼굴의 소녀. 상황을 짐작하기 힘들 정도로 이상한 광경이다. 신사들의 시선은 당연한 것처럼 소녀를 따른다... 결코 호의적으로 보이지 않는 눈길이다. 뒤로 늘어선 남자들의 시선은 유령이 주시하는 것 같은 익명성의(얼굴 없는) 시선이고, 앞쪽의 자세히 표현된 두 남자는 마치 비웃는 것 같다. 
이 그림이 전달하는 이상한 두려움은 섬뜩한 괴담과도 비슷하다. 노골적으로 귀신이나 유령, 피 같은 것을 언급하지 않으면서도 은근히 그런 것들을 떠올리게 만드는 종류의 괴담. 가만히 들여다 보고 있으면 무엇엔가에 주시당하는 것 같은 두려움이 든다. 

조금 의아했던 것은
뭉크의 그림중에는 여자를 공포스러운 존재로 표현한 게 많았는데 이 그림은 반대라는 점이었다. 뭐, 가 보면 알 일이겠지? 



  


뭉크의 <흡혈귀> 라는 작품이다. 광기처럼 새빨간 머리칼을 한 여자가 암울한 검은 색을 두르고 남자의 목에 얼굴을 묻는다. 남자는 생명을 잃은 인형처럼 핏기도, 표정도 없다. 그의 옷마저 그와 여자를 둘러싼 검은 색과 그다지 구분되지 않는다. 여자는 그에게서 모든 생명력을 빨아낸 것처럼 혼자 밝은 살색으로 빛난다... 







이 그림은 한 술 더 뜬다. 제목이 뭐였더라. <살로메> 였던가. 
살로메는 왕의 딸로, 선지자인 세례 요한이 왕의 부덕함(내 기억이 맞다면 왕은 원래 왕이었던 형을 죽이고 형의 부인과 결혼했던 것 같다)을 꾸짖자 그에 앙심을 품은 왕비(왕비이자 왕의 형수)가 자신의 딸인 살로메를 보내 연회에서 춤을 추게 했다. 그 춤에 반한 왕은 살로메에게 무엇이든 소원을 말하면 그를 들어주겠다고 호언장담했고, 살로메는 그 어머니가 원한 대로 세례 요한의 목을 달라고 했다. 왕은 원래 요한을 두려워하여 그를 어쩌지 못하고 있었지만, 스스로 한 약속이 있어 어쩔 수 없이 요한을 사형에 처하고 만다.. 살로메의 퇴폐적이고 관능적인 아름다움과 그 잔혹한 소원은 이전부터 많은 예술가들의 소재가 되어 왔지만 뭉크처럼 충격적인 그림을 그린 사람도 드물 것이다. 붓자국이 그대로 남은 거친 붉은 바탕 위에 세례 요한의 잘려진 머리가 둥둥 떠있다. 목이 떨어지기 이전의 온전한 사람처럼 태연한 얼굴이다. 그 머리를 머리카락 같기도 하고 해파리 같기도 한 무언가가 끌어 안고 있다... 세례 요한의 머리는 안쪽에서 바깥으로 디민 것 같기도 하다. 살로메는 형체가 없이 진득진득하게 흘러내릴 뿐이다..

에드워드뭉크, 슈테델미술관, 살로메

현재 우리의 ’문명’ 과 사회를 지배하는 건 아무래도 서양식 문화와 전승이라는 것을 부인할 수는 없을 것이다. 서구식 생활 방식과 철학이 이제는 우리 것마냥 생활 속에 깊숙히 배여 있으니까. 이러한 상황에서 그리스, 로마의 유산이 점점 더 부각되는 것은 어쩔 수 없을 것이다. 
서구의 문명의 대부분이 이 그리스 로마 시대에 태동했고, 근대화의 첫걸음이었던 르네상스도 그 고대로의 회귀에 다름 아니었던 만큼. 그래서인지 요새 시중에는 그리스 로마와 관련된 책들이 넘쳐난다. 아이들을 위한 그리스 로마 신화 이야기, 만화, 애니메이션 등등. 물론 어른들을 위한 것도 많다. 

하지만, 신화를 그저 그 시대 사람들의 상상력이 빚어낸 그 당시의 지식으로서는 설명할 수 없었던 온갖 자연현상들에 대한 설명이라던가 그리스 비극의 모태가 된 옛 이야기, 전설 외의 다른 시각으로 읽어 본 일이 있었던가? 시간이 흐르며 변하고 퇴색한 신화 안에서 우리가 더 이상 감지할 수 없는 야만적인 본능과 욕구가 철철 흐르는 본연의 어리석은 인간을 읽어낸 책이 바로 이 황금 가지다. 이 책을 읽는 순간은 불편하면서도 놀랍다. 분명 내가 책을 읽고 있는데, 그와 동시에 책도 나를 읽는다.
 
기독교적인 관점에서 보면 이 책은 무척이나 위험하고 대담하다.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온갖 야만적이고 이교도적인 풍습은 끝에 와서는 대부분 기독교라는 큰 물결에 합쳐져 기독교 사상의 중요한 요소가 되기 때문이다. 이 책을 읽다 보면 자연히 기독교의 일 년 축제일들을 훑어 나가게 된다. 기독교의 사상적 배경이 어떻게 생겨났는지를 아는 데 만족하고, 그 불확실함과 두려움의 사슬을 끊었다는 데서 기독교의 승리를 느낄 사람도, 신앙에 회의를 느낄 사람도 있을 것이다. 만약 ’다빈치 코드’ 를 보고 기독교에 의심을 품었다면, 황금가지는 그야말로 핵폭탄이 될 것이다. 태양신 숭배로부터 비롯된 크리스마스의 날짜라던지, 그리스 신화의 최고신 제우스로부터 비롯된 ’신’ 의 형상이라던지 하는 대체로 잘 알려진 것들과는 충격의 강도를 달리하는 ’역사적 사실’ 들이 이 902페이지나 되는 책을 꽉꽉 채우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 제임스 조지 프레이저가 그리스 전설의 변방 한 구석에서 꺾어낸 한 가지를 들고 저 아득히 먼 고대로부터 현대로까지 이르는 긴 시간을 풀어낸다. 



                          
윌리엄 터너, <황금가지>


프레이저가 책의 서두에 넣을 것을 고집했던 그림, 윌리엄 터너의 황금 가지이다. 
(표지에는 아르 누보식의 겨우살이를 소재로 한 장식이 들어가야 한다는 것도 그의 요구 중 하나였다. 많은 출판사들의 책 중에서 이 책을 선택하게 된 이유이기도 하다.)
 
터너의 이 그림은 본디 신화의 한 구절에서 영감을 받아 그린 그림이었다. 그 유명한 트로이 전쟁 이후, 트로이 진영에서 싸웠던 영웅 중 아이네이아스는 불타는 트로이를 가족들과 함께 빠져나와 이탈리아 반도로 와 로마를 세웠다고 한다. 이 로마로 가는 여정 중 아버지가 죽자 아이네이아스는 저승세계로 내려가 아버지를 만나고 싶다고 무녀에게 부탁한다. 무녀는 그러기 위해서는 '황금 가지' 를 꺾어야 한다고 말한다. (베르길리우스의 아이네이드 6편)

이 그림이야말로 전설이 말하는 저승의 입구를 그려낸 그림이다. 전설 속의 아베르누스 호수가 창백한 빛을 뿌리고, 중앙 부분에서 둥글게 춤을 추는 인물들은 바로 유령들이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 제일 먼저 눈에 띄는 것은 다름 아닌 황금 가지를 들고 선 무녀 자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