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년필에 끼울 잉크 심을 사러 나갔다가 문득 우리 연아 생각이 났다. 
주로 쓰이는 푸른 잉크의 색깔, Royal blue 때문이다. 이번 프리 의상을 보면서 몇 번이나 좋아서 웃었는지...  

저번에 지하철 5호선을 타다 보니 그런 문구가 붙어 있었다. 보라색은 황제의 색깔이라고. 5호선을 타는 여러분을 황제처럼 모시겠다고. 동양에서 보라색을 그런 귀한 색으로 대접하고 아무나 걸치지 못했던 것처럼 서양에도 그런 색이 있었다. Royal Blue였다. 영어로 하면 로열 블루고 독일어로 옮기면 Koenigsblau, 영어로 직역하면 king’s blue였다. 

하늘의 여왕으로 숭배 받았던 마리아는 항상 푸른색 옷을 걸치는 것으로 나타내졌고, 귀족을 칭하는 말 중에도 ’푸른 피’ 가 있을 정도였다.  아무나 걸칠 수 있는 색이 아니었다. 

물론 의상이 프로그램의 중요한 일부인 것은 분명하지만 연아 외에 이렇게 자신감 있게 의상만으로 프로그램의 컨셉을 확실하게 드러낸 선수가 이번에 있었던가.
범접할 수 없는 귀족적인 우아함. 도도한 자존심. 

동양인인 우리에게는 별다른 의미가 있지 않은 색이지만 서양인들은 얼음 위로 춤추듯 미끄러져 나오는 연아의 의상을 보는 순간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으리라. 
아. 나 좀 팔불출인듯.





 



김연아우리연아

요새 매일 잠들기 전에 열 장 정도씩 아라비안 나이트를 읽는다. 천 번 하고도 한 번의 밤동안 향불처럼 진하게 이어지는 이야기.  초등학교 때인가 중학교 때 즈음 몰두해서 외울 듯이 읽어 버린 이후로는 손대지 않았던 그 이국의 설화를 새삼스럽게 다시 가만히 들여다 보게 되는 것은 요새 독서의 주제가 신화, 설화, 민담인 까닭도 있지만 역시 가장 큰 이유는 연아다. 

세헤라자데. 
연아의 그 보석처럼 찬란한 프로그램들 중 어떻게 최고를 가릴 수 있겠냐마는 내게 개인적으로 가장 큰 감동을 주었던 것은 세헤라자데였다. 마치 엄청나게 큰 범종을 떨어 울려 그 종이 지금도 가늘게 떨며 울리리고 있는 것처럼, 그 프로그램을 생각하면 눈물이 날 것 같은 감동에 젖는다. 

하나 하나 뜯어보면 이상한 일이다. 음악은 음악일 뿐이고 그에 따르는 연아의 동작은 점프, 스텝, 스파이럴... 다른 프로그램에도 들어 있는 피겨의 기본 구성 단위일 뿐이다. 그런데 이상하게게도 프로그램은 굉장히 내러티브한 성격을 지닌다. 가만히 들여다 보고 있으면 이야기가 들려오는 기분이 들 정도로. 물 흐르듯 혹은 비단천처럼 천 일 하고도 하룻밤을 막힘없이 흘렀던 세헤라자데의 목소리가 들리는 기분이다. 장신구들이 부딪치며 짤랑이는 소리가 난다. 이슬람권 특유의 진한 향 냄새도 난다. 강렬한 인상들로 점철된 죽음의 무도와도, 르느와르의 소녀 그림을 떠올리게 하는 종달새의 비상과도 다르다. 기기묘묘하고, 현세의 것 같지 않게 신비로우면서도 마력적이고. 프로그램 구성으로서의 기승전결 뿐만이 아니라 이야기로서의 완급이 들어 있는 것만 같은 느낌이 자꾸만 든다.

그 느낌이 대체 어디서 나오는지 알기 위해 다시 한 번 아라비안 나이트를 들었다. 
반 뼘은 족히 될 700 쪽이 넘는 책이 두 권. 언젠가 꼭 한 번 읽어 보고 싶어서 사 놓기는 했지만 펼칠 엄두도 내지 못했던 책을 읽기 시작했으니 연아에게 감사할 일이 또 생긴 것이다. 

제일 먼저 느낀 것은 시간이 참 많이도 흘러가 버렸다는 것이였다. 이전에 그리도 탐욕스럽게 읽었던 천일야화였는데, 지금은 이야기들이 낯설게 느껴진다. 이전에는 무심코 지나쳤던 부분이 얼굴이 화끈거릴 정도로 관능적이기도 하다. 

그리고 세헤라자데. 
옛날 아라비안 나이트를 읽었을 때는 세헤라자데라는 캐릭터에게서 별다른 느낌을 받지 못했다. 부인에게 배신당한 상처를 달래기 위해 매일 새로운 여자와 결혼을 하고, 날이 밝으면 새 왕비를 처형하고 또다른 왕비를 맞아들이는 광증의 왕에게 이야기를 무기로 들고 홀로 나섰던 총명하고도 아름다운 처녀. 혹은 소녀. 그 다시없을 독특하고도 매력적인 캐릭터가 낯설었던 것은 아라비안 나이트에 세헤라자데가 등장하는 부분이 굉장히 적기 때문일 터다. 
처음 이야기가 시작되었을 때는 이 왕과 동생의 이야기가 나오고, 세헤라자데가 자원하여 왕비가 된 후에 세헤라자데의 이름은 동생의 부탁으로 늦은 밤 이야기를 풀어 놓을 때 몇 번 장식적인 무늬처럼 몇 번 등장할 뿐, 그 이후로는 이야기 속으로 왕도 세헤라자데도 사라지고야 마는 것이다. 상인들과, 지니, 정령들 그리고 왕과 술탄, 왕자, 신밧드. 온갖 인물들이 별처럼 반짝이다 사라지고 또 물결처럼 출렁이며 이리저리 흘러가는 가운데 세헤라자데는 어디론가 사라진다. 아니, 그렇다고 생각했지만 김연아의 세헤라자데를 떠올리며 아라비안 나이트를 읽는 동안 그게 아니라는 걸 알았다.
이슬람 문화권의 특징이라고 할 만한 것으로 내가 기억하는 것으로는 (문학이나 예술, 문화 일반에 걸쳐 확실히 알고 있다고 내세울 만한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지만 조심스럽게 꼽는다면) 기하학적인 무늬의 구성이다. 페르시아의 양탄자에 아로새겨진 혹은 알함브라 궁전의 그 자기 분열을 계속하는 세포처럼 반복적인 무늬들이 내가 이슬람의 예술을 떠올리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이미지다. 아라비안 나이트에도 비슷한 반복적인 구성이 등장한다. 위기에 처한 인물이 위기를 벗어나기 위하여 이야기를 풀어놓다는다는 전개가 그것이다. 아라비안 나이트의 전체를 감싸는 세헤라자데가 그러하고, 억울하게 지니에게 죽을 위험에 처한 한 남자를 구하기 위해 지나가던 세 사람이 이야기를 들려주고 억울한 남자의 죄갚을 삼분의 일씩 탕감받는다는 이야기도 그러하다. 비슷한 예를 들자면 끝도 없다. 이러한 구성을 볼때 "무늬" 는 문학 작품에도 등장한다고 조심스럽게 추측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세헤라자데가 하루를 살아 남고 또 그 날밤 새로운 이야기를 시작한다는 이야기는 몇 번을 반복해도 어색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아라비안 나이트의 저자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물론 똑같은 상황과 대사의 반복은 이야기의 긴장감을 치명적으로 떨어뜨릴 것이다. 단절이 생겨 토막토막난 이야기는 더 이상 스스로 흐르지 않는다. 시간이 끊기지 않고 도도히 흐르는 것처럼 아라비안 나이트의 이야기 역시 그러하다. 이야기는 그 자체로 하나의 살아있는 유기체가 된다. 아라비안 나이트는 이야기를 위한 이야기이고, 이야기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리고 세헤라자데는 이야기 그 자체다. 이야기의 화신이다.  

세헤라자데가 이야기 그 자체라면, 세헤라자데를 연기하는 연아는 그럼 누구일까. 
세헤라자데를 따라 이야기가 되는가, 아니면 이야기를 풀어내는 세헤라자데가 되는가?
개인적인 감상으로 연아는 둘 사이를 너무도 자유롭게 넘나든다. 연아, 이야기, 세헤라자데. 이 셋을 애써 구분하려 드는 것은 어리석은 일일 것이다. 그러나 어느 부분에서 연아가 보이는 몸짓은 목숨을 걸고 이야기를 들려주는 소녀의 호소력이다. 경기에 임하는 연아의 긴장감은 세헤라자데의 두려움처럼 느껴진다. 연아가 그리는 궤적은 이야기의 흐름을 추상적으로 표현한 것만 같고 스파이럴은 그 자체로 감탄과 환희가 된다. 점프는 생동감 넘치는 사건이 된다. 프로그램의 절정은 이야기의 절정과 함께 화려하게 폭발한다.

아라비안 나이트를 읽는 독자들은 어느 순간 모든 이야기가 시작된 이유인 세헤라자데와 왕의 이야기를 잊어버린 채 끊임없이 이어지는 이야기에 몰두한다. 그리고 천 한 번째 밤, 세헤라자데가 자신과 왕의 이야기를 다른 사람의 이야기처럼 들려 주자 왕이 자신의 일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어떻게 그런 사람이 있을 수 있냐고 화를 내는 것을 보며 웃지 못할 기분이 드는 것이다. 연아의 프로그램도 그렇다. 흡인력있게 사람을 끌어들이는 마력적인 연기가 끝나고 나서야 이것이 경기였고 점수가 매겨지는 스포츠라는 것을 기억해 내는 것이다. 

나만 이 모든 것이 너무도 교묘하다고 느끼는 것일까? 교묘함 역시 세헤라자데의 큰 특징이라는 걸 생각하면 감탄은 더해진다. 음악, 안무, 연기. 어느 하나만이라도 부족했다면 이런 작품은 나오지 않았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아니, 다른 선수들처럼 점프 등의 동작에 준비 시간이 많이 필요해서 자연스러운 연결이 불가능했다면, 호소력 짙은 우아함이 없었더라면 이런 이야기 같은 프로그램은 나올 수 없었을 것이다. 점프며 완숙한 기술 뿐만이 아니라 절정의 연기력이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아무리  안무가 정밀했어도 세헤라자데를 얼음 위에 되살려 놓을 수 있었을까. 

더이상 마오나 다른 선수들과 연아를 라이벌로 세울 필요는 없다. 흔히 도는 말 그대로 연아의 라이벌은 연아 자신뿐이고, 내가 연아의 경기를 보면서 말로 다할 수 없는 희열을 느끼는 것은 연아가 다시 한 번 자신의 한계를 깨고 더 높은 경지로 스스로를 완성해 나가기 때문이지 일본 국적의 마오를 꺾었기 때문이 아니다. 물론 마오가 이번 그랑프리 프리 프로그램에서 넘어졌다는 말을 듣고 기를 쓰고 영상을 찾아보기는 했지만서도. 

연아??을 하나하나 되살려낸다. 세헤라자데의 힘은 이야기의 힘이다. 헐리우드와 서점에 넘처나는 온갖 통속적인 스토리 속에서 점점 잊혀져 가는 이야기의 힘을 과거에서 그대로 건져 낸 것처럼 생생하게 되살려 낸 프로그램이다. 연아의 세헤라자데는 이미 전설이다. 프로그램과 연기의 완성도 그러하거니와, 세헤라자데가 그러하기 때문이다. 




연아의 프로그램과는 상관 없는 이야기지만 천일야화를 읽다가 감탄하게 되는 점 중 하나는, 허구적인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허구의 인물인 세헤라자데가 들려주는 허구적인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인물이 또다시 이야기를 들려준다는 점이다. 재미있다! 그림속의 그림속의 그림을 보는 것도 같고, 만다린이나 만화경을 보는 것 같기도 하다. 정신을 놓고 읽다 보면 내가 지금 어디까지 허구에 빨려 들어갔는지도 모르게 어디론가 휩쓸린 채다. 천일야화를 보다가 연아의 프로그램을 보고, 연아의 프로그램을 보고 감탄하다 보면 다시 이야기가 읽고 싶어지고. 
이런 식의 좋은 순환작용을 겪어 본 게 얼마만이었던가...!

어디로 어떻게 잘못 가고 있었는지를 문득 깨달았던 이후로 
그림을 그리는 일이 다시 즐거워졌다. 
그림 자체는 여전히 어딘지 모를 아득한 곳에서(안드로메다) 돌아올 생각을 안 하지만 
뭐 더 이상 다급한 일은 아니니까 천천히 즐기면서 그리려고 한다. 

가장 기쁜 일은 
더 이상 평가를 받기 위해 그림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나를 위해서, 
내 만족 그 자체를 위해서 그림을 그릴 수 있다는 점이다. 
그림에는 아직 만족하지 못하지만 
나 자신을 용서해 나갈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기쁜 일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