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렵게 읽었다.
지겹지도 않았고 재미가 없었던 것도 아니었고, 작가의 글솜씨가 영 아니었던 것도 아니었는데 어렵게 읽었다. 왜 어려웠나 생각해보니, 잡생각이 많이 들어 그랬던 것 같다.
우리의 이야기이다.
백수생활백서. 
스물여덟의 백수 서연, 스물여덟의 직장인 유희, 스물여덟의 유부녀 채린 등등 모두 우리네의 이야기이다.

주인공은 서연이다. 하고싶은 일도 없고 열정도 열망도 욕망도 없이 책읽는 것만이 자신의 행복인 스물여덟의 여자. 아무것도 하고 싶은것이 없는 자신이 괴로운 것이 아니라 그것을 마음에 들어하는 그런 스물여덟의 여자.

서연이 '냉정'이라면 유희는 반면에 '열정'이다. 하고싶은대로, 재미있는 것만 하고 사는 유희는 직장도 남자도 자주 바꾼다. 그러나 꿈은 없다. 재미를 추구할 뿐.
채린은 '사랑'이다. 삶과 인생에서 냉정과 열정을 모두 뛰어넘어 '사랑'만이 큰 가치가 되는 그런 여자.
셋 다 모두 다르지만 아주 차분한 어조로 그들의 이야기가 뭉쳐져 있다.

얼마전 읽었던 <거룩한 속물들 / 오현종>과 비교해보자면 - 이것 또한 우리네의 이야기이니 말이다 - 이 책이 훨씬 더 조용하다. 거룩한 속물들에는 크고 작은 갈등과 그 갈등이 터져버리는 절정이 있기도 하며  소설속 캐릭터가 훨씬 더 급진적이다. 그러나 이 소설의 캐릭터들은 시니컬 하지도 담담하지도 않다. 그냥 그 흐름 그대로 물흐르듯이 흘러갈 뿐이다. 그런 느낌을 주는 가장 큰 이유는 주인공 '서연'의 캐릭터가 그러하기 때문일 것이다.

 책을 읽으며 잡생각이 많이 들었던 것은 꿈이 없는 그녀들의 이야기를 읽고 있자니 내 자신이 너무 힘이 들어서였다. 나의 신념과 나의 삶을 대하는 방식은 그녀들 보다는 꿈꾸고 그녀들 보다는 리얼리티안에 있으며 그녀들 보다는 삶과 엉켜 살아가고 있는 것 같다. 신념과 주관이 강하면 편견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책을 읽으며 느꼈다. 나도 모르게 나의 잣대로  스물 여덟의 그녀들의 삶이 잘못 되었다 판단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의 잣대가 없다면 나 역시 나만의 삶을 살아가기가  쉽지 않겠지만 그 잣대를 세상에 대한 정답으로 사용한다면 굉장한 벽이 될 수 밖에 없으리라.

서연은 책 읽기에만 오로지 집중한다. 나는 서연을 보며 책 읽기에만 집중하는 것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으며, 책 속에 갇혀 삶의 실패도 좌절도 그 어떤 것도 겪어 보지 않는 그녀는 '회피자'에 지나지 않는것이 아닌가 했었다. 그것은 그저 중독이 아닌가 해서 말이다. 게다가 유희의 캐릭터 또한  아무것도 열망하는 것 없이 살아가는 것에 나는 숨이 막혔다. 그러나 책을 닫으며 생각했다. 서연의 '책 읽기'는 그 삶 자체이며 유희의 '꿈'이 없는 캐릭터는 과장된 우리 20대의 모습이라는 것 말이다. 

그렇게 생각할 수 있었던 이유는 작가가 끝까지 무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저 흘러가듯 조용히 많은 것을 이루지 않고도 서연과 유희를 서른으로 만들어 낸다. 판타스틱한 변화도, 비현실적인 성공도 없다. 그저 그렇게 우리네들 삶 처럼 조용히 흘러가듯 잔잔한 마음의 변화를 보일 뿐이다. 그래서 차라리 좋았다. 오히려 그래서 서연의 '책 읽기'를 받아들일 수 있었고 유희와 채린의 삶도 받아들일 수 있었다. 작가가 정말 쓰고 싶었던 자신의 이야기들을 뽑아내는 것 같아서 말이다.

이 책을 읽으며 두 가지를 깨닫는다. 책 읽는 것이 오로지 삶의 이유와 목적이 되는 수도 있다고 말이다. 그것을 바보 같은 일이며 현명하지 못한 일이라 생각해오던 편협한 내 생각을 부술 수 있었다. 그런 삶도 있는 것이라는 것, 그것을 발견해 낼 수 있어 다행이다. 또  한가지는 나는 꿈꾸지 않는 책은 읽어내기가 참으로 힘들다는 것이다. 그것 또한 나의 신념과 나의 패턴이겠지만 그런 많은 것들이 내 삶의 방향을 결정하고 책읽기 마저도 그 방향대로 흘러갈 수 밖에 없음을 절실히 알았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그것을 마음에 들어하는 주인공을 만나는 일은 나에게 참 힘든일이라는 것을 알았지만, 그것을 내 편견으로 가두는 것은 절대 하지 말아야 하는 일이라는 것. 중요한 자세를 배웠다.

어쨌든 여러모로 많은 생각이 들었던 책이다. 책 속에서 '유희'가 소설가로 변신하며 이야기 한다. 작가는 쓰고 싶어 쓰는 글이 아니라 쓰지 않고는 견딜 수 없어서 쓰는 글을 써야 한다고 말이다. 어쩐지 이 책은 쓰지 않고는 견딜 수 없어 쓴 글 같다. 왜냐하면 너무나 작가, 그녀의 모습이 녹아있는것 같다는 생각이 드니 말이다. 주인공 서연이 책을 좋아하니 서연을 통해 작가는 자신의 책에 대한 취향을 마음껏 숨기지 않고 드러내놓았다. 숨길 수 없어 삐져나온 것 같은 기염을 토하는 발췌문장들과 여러 작가에 대한 애정어린 의견들은 참 좋았다. 다른 것을 배제하고 다른 책들의 문장들을 구경할 수 있어 쏠쏠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다음번엔 좀 더 움직이고 생동감 넘치는 글을 읽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