ㄱ, ㄴ, ㄷ이 서로의 이름도 모른 채, 한 집에 산다. 그들은 각각 20대의 후반의 여자, 40대의 남자, 20대 초반의 여자이다. 이 시점에서부터 이 책을 삼각관계나 쓰리썸 관계를 소재로 말초신경을 자극하고자 하는 소설로 의심하거나 기대하는 사람이 생기겠다. 하지만 책 속에 ‘한 집’의 주인은 20대 후반의 여자인 ㄱ이며, ㄴ, ㄷ은 ㄱ의 집에 더부살이를 하게 된 타지인에 불과하다. 그들은 서로에 대해서 잘 알지도 못하고 서로에 대해서 깊이 이야기하지도 않는다. 그럼에도 그들은 ‘셋이서’ 함께 살게 된다. 그리고 ‘셋이서’ 서로를 사랑한다. ㄱ이 집주인이지만 그녀는 그들에게 어떤 것도 요구하지 않으며, ㄴ은 남자라고 여자인 ㄱ,ㄷ에게 무언가를 요구하지 않는다. 애초에 그들은 서로가 ‘여자라서’ 혹은 ‘남자라서’ 요구되는 일체의 것들과 성정체성까지도 중요시하지 않는 관계이다. 그런 것들은 애초에 그들 사이에 ‘사랑함에 있어서 정말로 중요시해야 될 것’이 아니라는 암묵적인 동의가 깔려있는 듯하다. 직업, 옷차림, 경제력과 같은 것도 마찬가지겠다. 그들의 세계에선 그러한 것은 존재하지도 중요하지도 않다는 식이고 실제로 그런 삶을 공유한다.
그들은 사랑한다는 이유로 서로서로를 착취하지 않는다. 사랑하면서도 ‘셋이서 함께’ 사랑하기위해 서로를 독점하지 않으려 한다. 그들은 마치 ‘강강술래’의 원을 그리듯 서로의 손을 잡고 서로의 고유한 파동을 느끼며 함께 존재하고 생활함에 더없는 행복을 느낀다. 이들의 관계를 하나의 바늘로 꿰뚫은 것은 무엇이었을까? 무엇이 그들 사이를 꿰뚫어 이어주었기에 내밀한 감정을 정신감응(텔레파시)을 하듯 공유할 수 있었을까? 이러한 물음에 대해 책 속에 늙은 소설가는 ‘죽음’이라고 답한다. ‘과연’이라고 나도 생각했다. 그들이 ㄱ, ㄴ, ㄷ이 된 이야기의 시작과 끝엔 ‘죽음’이 있다. 그들은 공통적으로 혈연에 대한 상실감, 죄의식, 배신감을 강렬하게 가지고 있다. 특히 그들의 죄의식은 그들을 무척 사랑해주었던 혈연의 죽음 또는 상실로부터 비롯된다. 그들에겐 자신의 혈연이 자신들을 무척 사랑했기에 그 사랑이야말로 그들에게 죽음과 상실을 안겨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에 죄책감을 떨치지 못한다. 그렇기에 한편으론 상대방을 위해 참고 스스로를 희생하는 사랑에 두려움도 느낄 것이다. 맹목적인 사랑의 결말은 전혀 아름답지도 않고 오히려 피차에게 비극만 초래한다는 것이 그들이 겪은 ‘과거’로부터의 교훈이다. 그들은 가까운 사람의 육체적/정신적 죽음을 누구보다도 가까이에서 본 '고아'들에 가깝고 '사랑'이 너무나도 지극해서 일그러진 형태로 된 것을 보고 견딜 수 없어서 외톨이가 된 사람들이다. 서로의 처지가 그렇기에 그들은 서로의 비밀같은 아픔을 굳이 캐묻지 않았고 그럼으로써 '분신'과 같은 서로에게 가까워질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들이 평범한 삶을 살 수 없었던 것은 ‘혈연의 죽음’ 때문만이 아니다. 그들은 유아독존적 권위를 휘두르는 폭력가장과 같이 평범한 삶을 유린하는 자본주의 사회의 냉혹한 사슬에 묶여 희생되는 삶을 직접 체험하거나 목격한다. ‘돈과 힘이면 다 되는 사회’와 ‘그 사회의 원리에 익숙한 인간들’은 때론 사랑마저 소유하고 독점하고 갈취할 수 있다는 듯이 행동함으로써 순수한 영혼을 가진 그들을 상처입힌다. 사회적 존재란 인간으로서 인간불신과 사회혐호라는 회생불능의 상처를 입은 영혼들은 고향이 없다. 고향이란 한 인간의 근본이 되는 뿌리로서 마음의 위안이 되며 삶의 살아가는 버팀목과 같은 것이니 말이다. 그런데 그렇게 고향 없는 인간 셋이 만나 본향(本鄕)을 만나고 만든다. 그 세 사람이 바로 ㄱ, ㄴ, ㄷ이며, 이 책은 그들과 관계된 비밀한 삶과 죽음을 담은 책이다.
그들의 비밀한 삶과 죽음은 한 우물 속 ‘시멘트로 뜬 데스마스크’에서 시작된다. 그 ‘흔적’을 통해 비밀이 많은 듯한 세 사람ㅡ20대 후반의 이혼녀, 비정규직을 전전하며 방랑하는 40대의 기타리스트남, 조선족으로 위장한 탈북 소녀ㅡ의 만남과 사랑, 죽음이 밝혀진다. ‘밝혀진다’고는 했지만, 그것은 세 사람이 혼잣말을 하듯 추억한 이야기들일 뿐, 셋 외에 다른 누구에 의해서도 ‘밝혀지지 않은 비밀’ 이야기이다. 그들은 비슷한 아픔과 상처를 가지고 있다. 그 아픔과 상처는 자신의 존재를 뿌리부터 흔들고 휘발시킬 정도로 강렬한 것이라서 누구에게도 쉽게 말할 수 없는 ‘비밀’들이다. 그렇기에 그들은 셋이 함께하는 시간동안은 서로가 무엇을 하고,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알지 못한다. 애초에 서로의 ‘과거’에 대해서는 묻지도 않는다. ‘과거’로 대치되는 ‘비밀’이 밝혀지면 서로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 힘들기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아무것도 모른 채 지금에 존재하는 서로만을 바라보는 순수한 감정이 삶의 더께와 같은 과거의 조각들로 흔들리는 것이 싫었을지도. 그들은 인간으로서 삶의 비밀과 자신들의 비밀을 몸으로 겪고 가슴에 안고 살았기에 서로에게 아름다웠던 것일지도 모른다.
책 속에서 말하는 ‘비밀’은 세간에서 말할 법한 삼각관계가 아니다. 한 남자와 여자 둘의 미묘하고 자극적인 쓰리썸 관계를 말하는 것도 아니다. 한 남자의 죽음과 그와 관련된 두 여자에 대한 추적과 기록과 같은 형태의 이야기를 담고 있지만 그것이 궁극적으로 책이 말하는 ‘비밀’이 아니다. 책 속의 궁극적인 ‘비밀’은 인간의 근원, 인간과 사회, 인간이 추구해야할 삶과 사랑, 죽음에 대한 것이다. 이처럼 추상화된 ‘비밀’을 구체적인 내용으로 풀어보자면 ㅡ사랑이란 이름으로 자행되는 폭력과 이기적인 행태의 구조, 그에 대한 자발적/비자발적 희생이 만들어 내는 비극, 결혼이란 합법적 섹스/동거 관계를 인정하는 사회적 계약관계로 약속되는 사랑의 한계, 비열한 육체적 욕망과 병행되는 인간의 타락과 좌절, 사회적으로서나 관계의 약자로서 겪는 삶의 고통, 인간으로서 헤어날 수 없는 존재론적 고독 등 ㅡ 이러한 것들이 아닐까? 너무나도 약해서 아플 수밖에 없는 고독한 인간의 삶에 대한 이야기들 말이다.
책 속 ‘해설’이란 책 속 비밀까지 해부할 것 같은 느낌이 있어서 책을 끝까지 읽지 않았고 앞으로도 읽지 않을 것 같다. 대신 비밀을 덮듯 조심스레 책을 덮고서 생각해본다. 책의 제목이기도 한 ‘소소한 풍경’이란 무엇일까? ‘소소(昭昭)’는 ㄱ, ㄴ, ㄷ이 함께 지낸 지역의 이름이다. 그러니 즉물적으로 책제목을 이해한다면 소소란 곳에서의 풍경이 되겠다. 조금 더 그 의미를 구체화한다면 ㄱ-ㄴ- ㄷ이 존재할 수 있었던 것은 소소에서뿐이었던 것처럼, 소소란 곳에서만 존재할 수 있었던 풍경을 일컫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또 ‘밝다, 환하게 빛나다’란 소(昭)가 연달은 ‘소소’는 그야말로 더없이 밝고 환하게 빛났던 그들의 삶과 사랑이 아니었을까. 때론 너무나 밝은 빛에 눈이 멀 것 같은 치명상을 입기도 하듯이 그 소소 속에는 강렬한 환희와 강렬한 아픔이 함께 있는 것이라고 느꼈다. 서로가 서로에게 풍경이 되기에 서로가 있어야지만 만들어지는 아름다운 풍경, 서로의 영혼을 환하게 빛나게 해주었던 풍경. 일상처럼 존재하지만 환상처럼 짧아서 신기루처럼 사라지는 무엇보다 소중한 존재와 그 존재와 함께하는 삶. 인생과 관계의 비밀이 있어서 소중하고 아름답게 느껴지는 그 모든 것이 ‘소소한 풍경’이 아닐까.
+) 책 속에 문장들
아무런 부동심도 없이, 단 하나의 묘지를 품을 기개도 없이 오늘도 사람들이 숨가쁘게 내뱉는 배리(背理)의 말 “사랑해”
죽음은 단지 기억으로 이해하는 것은 살아있는 우리들이 갖는 자기위로의 보편적 전략일는지 모른다. 사랑의 불꽃이 그러한 것처럼.
완전해지고 싶은 꿈은 처음으로 되돌아 가고싶은 꿈과 같다고 봐요.
사랑은 두려워요. 모든 사랑에는 그런 위험이 다 깃들어 있어요. 훼손하기위해 욕망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든 적도 많아요.
죽음이 아닌, 그 무엇으로도 완전히 한 덩어리가 되어 그 상태를 지속할 수 없다면, 신은 왜, 우리에게 애당초 사랑의 불꽃을 주었을까요?
신비한 지경에 결코 도달할 수 없다면, 어디에서 무엇으로 살든, 우리의 삶은 영원히 비천함을 벗어날 수 없을 거예요. 그렇지 않나요.
비밀 없는 세상은 사막처럼 황막할 뿐이라고 지금도 생각해요. 단지 사막이 있기 때문에 오아시스가 아름다운 건 아닐 거예요. 다른 종족에게는 비밀로 해서 지켜야하기 때문에, 오아시스가 더욱 아름다운 거잖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