곱게 말하자면 타인의 추천으로 읽게된 책이지만, 그냥 말하면 지극히 타의로 '읽어오기 숙제'와 동급으로 읽게 된 책이다. 하지만 타의로 읽게된 책치고는 참 재미있게 읽은 시집이다. (글감을 첨부하려는데 그렇게 유명한 시인이 아니라서 그런지 뜨지도 않는다.)
보통 사람들은 무언가를 지각할 때, 시각적인 것으로 가장 먼저 사물은 인지하고 느낀다. 하지만 이 시집에 나타난 것들은 단순히 보는 감각만으로 그려지지 않고, 그와 관련된 그리운 소리가 나고, 향이 폴폴 나게 그려졌다. 그런 표현들이 내게도 그러한 광경과 물건들을 새삼 새롭고 그립게 했다. 책의 해설자도 이 시들을 장날이 단순히 상품과 돈의 교환이 아니라 감정의 교호가 이뤄지는 소통의 공간임을 글을 통해서 드러내며, 이런 점에서 이 시들을 통해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 갈 수 있다는 가치를 높이 평가한다. ‘장날에 가면 흔한 이 광경들이 무슨 큰 의미가 있을까’라고 생각하며 무미건조하게 시를 읽어 내렸지만, 이 해설의 몇 문장을 읽은 후에 다시 시를 읽어보니 그리움이 묻은 추억이 소록소록 떠올라 촉촉하게 마음을 적시는 시원함을 느낄 수 있었다.
이 책의 시들은 창녕 장날과 관련된 이야기와 그에 딸린 유년시절과 현재의 자신의 모습도 간간히 담았다. 장날이란 것만으로 이렇게 많은 시를 쓸 수 있다는 것이 신기하고, 부러웠다. 장국밥, 뻥튀기, 강정, 곡물전, 돼지머리, 옛날 과자, 도라지, 감자, 건어물전, 게, 옷전, 물고기전 등등, 내게도 아직까지는 그리 낯설지 않은 것들도 많았다.
장날에 나오는 물건들 중에서 대개 먹을 것이 다수이다. 아마 어릴 적에 어떤 것보다 먹을 것들이 시각적으로나 청각․후각적으로 머릿속의 가장 넓은 공간을 차지하여 가장 큰 유혹을 받기 때문에 먹고픈 마음이 절로 나고, 어머니들과 함께 장을 나서면 먹거리를 우선 사게 되는 것을 생각하면 당연한 게 아닐까하고 미소가 지어진다.
이처럼 장날에 나온 물건만이 장날을 떠올리게 하지는 않았다. 시를 읽는 동안 장날의 물건과 장날이란 배경은 나를 유년시절의 다른 시공간으로 옮겨놓기도 했다.‘도라지’만 해도 그렇다. 시인은 ‘장날의 도라지’를 떠올리며, ‘수염과 잔뿌리가 드문 외국 도라지’가 진열되고 ‘장 뒷골목에 말라빠진’ 그렸지만, 제목을 보는 순간, 내가 예전에 살았던 집 옆의 작은 밭의 한 측에 가득한 도라지 ‘꽃’이 먼저 떠오르게 했다. 사실, 지금이야 ‘도라지’라고 하면 장에서 팔리는 도라지 ‘뿌리’를 떠올리게 되지만, 어린 시절 장날에 나오는 도라지가 ‘뿌리’를 가졌다는 사실은 정말 두렵고 낯선 것이었다. 그래서 도라지를 밭에서 키우면서도 덥수룩한 수염과 같은 뿌리를 가진 것을 몰랐었다. 난 도라지를 ‘보랏빛 꽃’으로 먼저 생각했고, 도라지는 뿌리있는 식물이라기보다 꽃망울이 활짝 피기 전에 공기를 불어넣은 풍선같은 꽃이 펴서 그걸 손으로 꾹 눌러보는 재미를 느끼게 해주는 ‘꽃피는 풀’이었다.
어릴 적에 내 키만한 높이의 줄기로 수풀을 이룬 깻잎이야 손이 많이 필요했기 때문에 모기에게 물리는 것도 감수하며 엄마의 명에 순순히 따라 깻잎을 따야했지만, 도라지를 캐려면 좀 더 기술을 필요하고 호미나 낫과 같은 도구의 위험성을 고려해서였던 까닭인지 알 수 없지만, 좀체 도라지를 캔 기억은 없다. 도라지를 ‘캔다’는 인식도 없었던 것 같다.
대신 지린 도라지가 어머니 손에 잘 무쳐져 상에 나온 도라지무침은 유난히 좋아했음에도 뿌리가 있는 도라지와 보랏빛 꽃을 피우는 도라지를 하나로 엮어서 생각하지 못했다는 생각에 새삼 나도 풋풋한 어린이였단 사실이 재미있어진다. 이런 생각도 평소에는 기억하지 못했던 추억들이다.
이 책의 시들은 하나같이 ‘잃어버린 시간’을 추억하게 해주었다. 평소같이 시를 읽고난 후, 시의 묘사법이라든가 단어의 잔상이 남기보다 나의 추억을 물씬 떠올리어 흠뻑 젖게 해준 신기하고 조금은 특이한 책이다.
나처럼 먹을 것을 좋아할 것같이 복스럽고 인상좋은 마흔 한 살의 아줌마와 이렇듯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경험도 흔치않다. 많은 사람들이 나처럼 이런 시를 통해 각자의 시공간의 공유와 추억하기를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이 시집 구하기도 어려울테지만...우포문학선이라고 하여 창녕시인들의 문학선이 만들어지고 있는 중인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