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서점 인터파크도서

－흥정과 인심 “앗, 조선 탐사서가…！”－

서점 ‘에스파스 구텐베르크’의 주인이 아이들에게 구식 활판인쇄술 시범을 보이고 있다.

〈책은 문화이자 상품이다. 우리 사회에서 문화로서의 책과 독서가 강조되는 데 비해 상품으로서 책의 위치는 형편 없다. 베스트셀러가 되지 못하는 책은 몇 달 만에 수명을 다한다. 신간 위주의 대형 서점에서 우연히 옛날 책을 재발견하는 기쁨을 맛보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중고서적상은 몰락하고, 값비싼 고서는 일부 계층의 전유물이 되었다. 그러는 사이, 세계는 중고책에 눈을 돌려 문화를 가꾸면서 이익을 창출하고 있다. 책마을의 시조로 이제는 제국적 위용을 갖게 된 웨일스의 ‘헤이 온 와이’에서 시작된 책마을은 프랑스·독일·스위스 등 유럽 전역으로 퍼져나가고 있다. 대형 서점과 인터넷의 거센 조류에 밀려났던 중고·중소 서적상들이 중심이 된 책마을 조성은 지방문화의 활력을 도모하는 정치실험이자 책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동참을 요구하는 사회운동, 나아가 다국적 거대자본에 대항하는 반세계화운동이다. 미술평론가 정진국씨가 유럽 곳곳에 보석처럼 박혀있는 20여군데의 작은 책마을로 독자들을 안내한다. 편집자〉

‘책마을’ 퀴즈리의 초입은 꽤나 동화적이다. 거대한 아치 대신 책을 조형물로 세워 그 책갈피 사이로 빨려드는 효과를 연출했다. 양장본에 자주 쓰이던 붉은 모로코가죽 표지에 금빛 압인을 새긴 책들과 모든 세대가 즐겨 읽는 앙투안 드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 한 권을 크게 부풀렸다. 주 진입로 샛길마다 책을 수북이 올린 좌판들이 즐비하다. 말하자면 마을 입구는 대성당처럼 서쪽에서 시작해서 동쪽의 노트르 담 성당을 향해 죽 뻗었다. 서점들은 그 길을 끼고서 익랑(翼廊)처럼 이어진다. 이렇게 마을은 가톨릭의 자취를 뚜렷이 새기고 있다.

덩치 큰 아들의 손을 꼭 붙잡고 열심히 만화책을 고르는 주부들은 우리네 주부들만큼 억척스러워 보였다. 서점 밖에 벌여놓은 좌판은 주로 떨이하는 책이다. 선 채로 하염없이 독서삼매에 빠진 영감들도 보기 좋았다. 이런 명랑한 눈요기를 마치기가 무섭게 노파들이 길목을 지키고 앉아있다. 할머니들의 눈짓은 그냥 지나치지 말라는 하소연이었다. 작은 접이식 탁자 위에는 요즘 ‘설치미술’을 닮은 모형이 놓여있다. 과거 할머니들이 갇혀 고초를 겪었던 폴란드 집단수용소의 축소판이다. 할머니 한 분께서 주말마다 이것을 들고 나온다고 했다. 옹기종기 미니어처로 구성된 이 수용소에서 2차대전 당시 나치 저항운동에 연루되어 이 마을에서 연행되었던 사람들이 살아나왔다. 소녀 시절을 그곳에서 보냈던 할머니들은 천만다행으로 살아나 귀향했다. 어언 반세기도 더 흘렀지만 여태 그 악몽을 씻어내지 못한다.

샤르도네 품종의 포도밭에 둘러싸인 이 마을에서는 예로부터 분쟁이 끊이지 않았다. 한강 유역과 마찬가지로 산수와 전답이 훌륭한 탓에 정권이 불안정해질 때마다 아귀다툼이 벌어졌다. 쥐라와 알프스 쪽의 토호 세력과 부르고뉴와 프랑스 궁정이 서로 먹지 못해 안달하던 곳이었다. 12세기에는 국왕이 별궁으로 사용하는 성이 세워질 만큼 번성하기도 했다.

책을 확대해 만든 장식물로 꾸며진 마을 입구.

올해로 ‘책마을’을 선포하고 새 출발을 한 지 8년째. 어느 소읍과 다름없이 강상의 뱃놀이나 포도원 방문 등의 관광사업을 제외하면 산업 활동이 전무하다시피한, 주민 1500명가량이 거주하는 이곳에서 책마을의 효과는 예상보다 훨씬 양호했다. 바로 곁의 순례성지 투르뉘의 로마네스크 성당이나 디드로가 격찬했던 가족상을 즐겨 그린 화가 장 바티스트 그뢰즈 미술관을 둘러보고 떠나던 사람들이 이곳으로 한 걸음 더 내디뎠고, 클뤼니 수도원을 비롯한 종교유적과 최상급의 포도원이 풍부한 주변으로부터도 방문객은 꾸준히 늘어났다. 볕이라도 나거나 행사가 있는 주말이면 수천 명씩 다녀가기도 한다.

마을 조성에 참여한 책방 주인과 동호인들은 세계화라는 대세에 도전하고 있다는 데에 무엇보다 자부심을 느낀다. 대형서점에 밀려 몰락하던 군소서점들이 살 길을 찾는 과정에서 ‘반세계화’라는 명분은 자연스럽게 들리는 것 못지 않게 절실한 문제였다. 독서운동은 추상적인 구호로 해결되지 않는다. 책방이 곁에 없는데 어디서 책을 구할 것인가. 대도시 중심가, 쇼핑센터에 가서 책을 찾는 것과 동네에서 책을 접하는 건 다르다. 아침 커피를 마시고 신문을 뒤적이며 하루를 시작하듯이 방과 후나 일을 끝낸 오후에는 서점에 들르는 게 일상이어야 한다. 누가 너절한 잡지와 참고서만 그득한 동네서점에서 문화를 운운하겠는가. 담배가게나 빵집이나 카페처럼 책방 또한 우리 곁에 가까이 있어야 하겠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전 세계적인 현상이다.

처음에 사람들은 중고서적상과 장인(匠人)들이 다시 돌아와 농촌 마을을 재건한다는 낭만적 프로젝트에 반신반의했다. ‘역사적’이라는 대의명분을 내세워 엄청난 예산을 투입했던 신도시 건설에 편승한 각종 문화관광 단지들이 되레 몰락의 길을 걷기도 했다. 복합문화 단지를 내세웠다가 실패한 사례는 프랑스에도 적지 않다. 주민들은 억지 민속촌이나 공예마을 같은 것과 다른 모범을 보이고자 고심했다.

지금은 상설서점이 열네 곳이다. 한 달에 한 번씩 난장을 벌일 때는 행상들도 참여하니 더욱 북적댄다. 이중 ‘에스파스 구텐베르크’는 고인쇄술 시범을 보이며, 학생과 일반을 위한 교육공간 겸 특수인쇄소로 운영된다. ‘검은 고양이’는 협동조합 형태로 다른 책마을에도 서점을 두고 있다. 그래서 이 서점은 사회·환경운동 등 진보적 민간운동과 관련된 책자를 전문으로 취급한다. 모든 봉기의 역사와 해방운동, 문맹인을 대필한 감동적인 구술자서전을 펴냈지만 수지가 맞지 않아 폐업한 소규모 출판사들이 펴냈던 책들이 많다. 알프스 산록의 어린 굴뚝청소부의 일대기를 내놓았던 시코모르사가 그런 경우였다.

서점 ‘책의 연금술’에 드나드는 고객들.

‘르 리브르 아 브니르’ 서점은 자이에 부부가 함께 운영하는 책방이다. 책장 높은 구석에 계몽사상가 볼테르의 석고두상이 책들을 쓰러지지 않도록 버텨주고 있었다. 부부는 업무를 분담했다. 남편은 잡지와 문학, 아내는 학술서적 담당이다. 부인인 줄 모르고 한국역사자료가 혹시 있는지 물었더니 구석에 있던 남편이 잘 안다고 소개해 주었다. 마을 어귀에 ‘어린왕자’가 서 있었기 때문이었을까? 유난히 동화책과 라 퐁텐 우화집이라든가 라블레 소설의 수많은 화려한 이본(異本),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저자이자 소녀에 대한 독특한 사진을 많이 남겨 어린이에 대한 기벽(奇癖)이 있지 않았나 의혹을 사기도 하는 루이스 캐럴의 기막힌 빅토리아 시대풍의 책자들이 줄줄이 책장 하나를 다 채웠다. 파리에서라면 유리창 속에 자물쇠를 채워두었을 책들이다. 저자의 헌사가 속페이지에 적힌 것도 특별한 가격을 매기지 않았을 정도로 물건이 많았다. 생텍쥐페리가 어린왕자를 헌정한 주인공인 레옹 베르트의 에세이도 그 칸에 끼어 있었다. 실험적인 현대미술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은 사람이었지만 고전적 취향으로 화가에 대한 에세이를 많이 썼던 사람이다.

“그런데 여태 뭐 하셨소, 레옹. 남들은 친구 덕도 잘 보건만 그토록 짜릿한 글을 쓰고 그토록 거물화가들을 점잖게 조롱하던 양반이. 친구의 그늘이 너무 짙었던 것이요? 어찌 그렇게 무명으로 남았소? 하긴, 당신이 친구 덕에 나발이나 불려는 위인이었다면 생텍쥐페리가 그 전설적인 동화를 헌정했을 리도 없었을 테지요….”

책 한 권에 1유로씩 떨이를 하는 골목 노점에서 책을 고르는 사람들.

서점 앞에는 몇 집 건너씩 벤치가 있다. 쉬엄쉬엄 보라는 배려였다. 궁둥이를 마주치며 만난 붉은 저고리 차림의 멋쟁이 노신사가 대뜸 말을 걸어왔다. 노인들은 때때로 스스럼 없는 점이 좋다. 그는 마콩 대학 고고학 교수였고 주변의 수많은 고대유적 발굴에 참여했었으나 지금은 은퇴했다고 한다. 하지만 최근에는 현대사 연구에 재미를 붙이고 있다. 집에 쌓인 책과 자료를 주체할 수 없고, 바람도 쐴 겸해서 주말이면 책을 내다팔고 또 찾기도 하며 즐긴다고 했다. 그러면서 서점과 마을을 살리고 답답한 학교와 공공도서관에만 책을 가두어 두지도 않기에 좋다고 덧붙였다.

마을 가운데 길은 ‘그랑 뤼(大路)’라고 하지만 이름만 그럴 뿐 차가 다닐 수 없는 길이다. 이 길가로 ‘라 부슈리’(푸주간), ‘라 포슈테크’(문고판), ‘라 프티트 쉰’(작은 행상)이라는 친근한 이름의 서점들이 골목 깊숙한 곳에서 손님을 끌어들이려 익살을 부린다. 입구에는 화살표 위에 ‘1유로’ 폭탄세일 중이라고, 또 안쪽에는 ‘앙트레 리브르(입장무료)’라고 써붙였다. 책을 뜻하는 불어 ‘리브르’가 ‘무료’와 발음이 같은 데 착안한 동음이의어로 하는 말장난이다.

초기부터 마을에 입주한 ‘르갸르’ 서점 주인, 장 폴 부르동은 이 고장 출신이다. 그의 콧수염은 근엄하기보다 친근해 보였다. 안으로 들어서기도 전에 진열장에는 예사롭지 않은 사진집들이 눈길을 끌었다. 손님 중에는 파리에서 그럴싸한 물건을 찾아 내려온 다른 서적상도 있었다. 부르동 은 타 지역에 비해 지방정부의 지원이 변변하지도 않은데 마을이 예상외로 자리를 잡아가는 모습이 다행이라고 했다. 또 최근 가장 큰 화제로 명문 출판사인 라르마탕 사가 이곳에 분점을 준비한다는 소식을 꼽았다.

라르마탕은 중견 학술전문 출판사로서 지금도 학위논문을 꾸준히 출간하고 있지만 대중서를 내지 않으므로 사정이 어렵다. 필자들이 컴퓨터로 본문은 물론 표지까지 직접 제작해서 제출해야 한다. 그래서 인쇄본인지 복사본인지 구별하기 어려운 극도로 검소한 디자인의 학술서들이 나오고 있다. 하지만 대형 출판사들이 흥행성이 없다고 기피하는 책을 포기하지 않는 이 출판사들의 용기는 가상하다. 인문학자들이나 미술사학자들은 이 출판사의 덕을 톡톡히 보고 있다. 이곳은 공간이 많이 필요한 재고용 창고를 파리 시내에서 감당할 수 없어 우선 창고를 옮긴 뒤 조만간 편집부도 옮길 계획이라고 한다. 학술서의 제한된 수요를 감안하면 인터넷 주문과 우편망을 이용해도 큰 차질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에밀 부르다레의 사진집 ‘조선에서’에 수록된 1904년 야외식당에서 팥죽을 먹고 있는 우리 조상들의 모습.

한나절 동안 다른 서점들을 둘러보고 온 내게 부르동은 신바람 나는 표정으로 책 한 권을 내밀었다. ‘자기 서점에 없으면 세상에 없다’고 수백만 권의 물량을 자랑하는 다국적 인터넷 서점에서 찾지 못하던 책이다. 에밀 부르다레가 1904년 조선을 탐사하며 기록했던 ‘조선에서’이다. 이 책의 가치를 굳이 설명할 필요가 있을까? 우리나라를 취재한 사진집들은 각광을 받고 있다. 미쇼 형제의 남한 사진집과 6·25 전쟁 직후 북한을 주파했던 크리스 마커의 ‘조선여인들’은 최고 권위의 사진집에 주는 상을 받았고 그 초판들은 진귀한 소장목록에 든다. 이 뜻밖의 수확은 하루의 피로를 한 순간에 몰아내는 듯했다.

책마을 서점이 인터넷 서점과 공존하는 데는 전략이 필요하다. 부르동은 계산기도 없이 연필로 값을 계산한다. 아예 정가 옆에 온라인에서 제시하는 가격을 함께 적어놓기도 했다. 그러나 카드 결제가 되지 않는 점은 불편하다. 프랑스에서 극히 예외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것도 마을의 발전에 도움이 된다면 당국에서 모른 척하는 모양이다. 그 대신 흥정하는 재미와 선심을 쓰는 호기, 여러 권을 구입했을 때 한 권쯤 얹어주는 인심…. 이런 것들이 제도의 강박에서 풀려나기가 무섭게 되살아나는 인간적 교감이 아닐까. 또 그렇게 마음을 들뜨게 할 정도의 파격적인 염가가 아니라면 애호가나 독자들이 이곳을 찾는 매력도 크게 줄어들지 모른다. 한 푼에도 부들부들 떠는 사람들에게 최소한 교통비는 빠졌다는 안도감 정도는 베풀어야 할 테니까.

〈정진국|미술평론가〉

경향신문 발췌입니다.---------------------------------------------------------------------------------------

2008 볼로냐 국제아동도서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