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와 있다면, 가장 불안한 첫 번째 상황은 침묵이다. ’뭔가 말하지 않으면 안 돼.’ 강박관념처럼 서로 있는 말 없는 말, 사소한 일과조차 쉴 새 없이 말과 소리로 주고받는다. 특히 많은 사람이 모이는 자리에서는 무리지어 얘기하는 틈에 치어 가만히 듣고 있자면, 단 몇 분도 안 되어 ’뭐라도 얘기해봐’라고 재촉하는 눈빛의 표적이 되고 만다.

소통에 있어서 분명 ’말’의 힘은 존재하고 글과는 다른 무한한 감성을 공유할 수 있는 아름다운 보물이다. 하지만 나는 느낀다. 세상은 말이 가진 아름다운 소통을 넘어 필요이상의 소음을 만들어 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진짜 전하고 싶은 것을 전하지 못하고 오히려 쏟아지는 말 속에 진심이 깊숙이 숨겨지고 마는 것은 아닌지.

소리 없는 텔레비전을 열심히 들여다보는 교코의 고요함이 폭력처럼 느껴졌다. 그것에 대항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떠들썩한 소리를 되살리려는 내가 있었다. 
기묘한 감각이었다. 
무의식적으로 정적에 대해 소란함으로 대항하려는 본능이 인간에게는 있을지도 모른다.
                                                                        - P.66

슌페이의 시점으로 보는 연인 교코와 그녀와의 일상은 담담하면서도 조마조마하고, 아슬아슬하면서도 침착하다. 소리 없는 세계의 그녀와의 만남과 일상을 나누게 되기까지 슌페이는 오히려 말과 소리로 넘쳐나는 세계에서 받는 불신과 공허함에서 벗어난 새로운 소통에 안정을 찾고 새로운 삶에 정착하고자 한다. 하지만 새로움은 익숙해지면 보편적이 되듯 소리가 ’있는’ 외부(일)와 소리가 ’없는’ 내부(일상) 사이의 괴리감을 느끼며 자신이 믿었던 사랑과 일상도 어느 새인가 공기 속의 먼지 마냥, 보일 듯 보이지 않게 혼란 속에 가두어두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슌페이가 표현하는 이 모든 감정과 생각들이 어느 한 사람의 것이 아닌, 때때로 우리가 생각하고 느끼는 보편적인 시선에 한층 깊고 세밀해서 어느 순간 ’나라면, 나라도’하며 몰입하고 있는 책 밖의 내가 있음을.

결국 슌페이의 어정쩡한 혼란의 나날들이 또한 진심을 삼킨 채 교코에게 전달되지 못하고 상황은 처음으로 돌아가려한다. 아무것도 모른 채, 전하지 못한 채 각자가 익숙한 세계로 그렇게 돌아가려했다. 어쩌면 그렇게 끝나는 것이 현실이고 당연한 이별이라고 생각될지 모르지만 전해지지 않은 진심 속에 애초에 돌아갈 처음은 없지 않을까. 그리고 슌페이는 간절히 원하던 것을 찾는다. 전하고 싶고 알아주길 바랐던, 누가 누구에게 향함이 분명한 간절한 마음을 말이다.  

"우리가 어중간한 마음으로 이 프로그램을 만든 건 아니잖아."
"이걸 본 사람들이 알아주면 좋겠군. 자신들이 뭘 모르고 있었는지." - P.213 

중요한 것은 결국 ’말’은 아니다. 쏟아지는 말 속에 진심이 숨겨지고 왜곡되는 반면, 말 없는 고요함 속에 삼켜지는 진실도 있는 법. 누가 누구에게, 전하고 싶고 알려주고 싶은 그 마음이 간절하다면 우리는 더 이상 떠들면서 느끼는 묘한 안정감도, 침묵에 대한 불안함도 의식할 겨를 없이, 서로의 진심에 마주할 수 있을 것이다. 현실에서 적용하기엔 아마득할 지도 모르는 번지르르한 말뿐일지도 모르지만, 슌페이와 교코, 이 두 사람의 일상과 사랑의 이야기로 하여금 적어도 나는 어떤 상황에 있어서도 나의 방만한 마음을 ’말’탓으로 돌리지 않으리라. 그리고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면 상대를 바라보며 이런 생각을 하겠지.

’너는 내게 어떻게 사랑을 전할까, 나는 네게 어떻게 사랑을 전할까.’

자동응답서비스에 대고 목소리를 높이는 우리는 분명 혼란스럽다!

’고객 서비스부’
여느 회사 조직도에서나 볼만한 단조롭기 그지없는 딱딱한 단어가 이 자그마한 노란 책의 이름이다. 더군다나 소설이다. 재밌든 지루하든 부담 없는 분량과 제법 큰 활자, 넉넉한 여백이라는 자못 쓸데없는 합리화로 사실 내심 가득했던 호기심을 주체할 수 없이 책을 펼쳐들었다. 문장도 짧고 소설도 짧지만 그 여운과 여파는 지금 여기, 이 현실을 관통하고 고객이자 사회를 구성하는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맞닿아 있다.

국가와 분야를 막론하고 어떤 기업에서든 고객 서비스의 역할은 핵심이고 중심이 되었다. 하지만 많은 고객을 거느리는 만큼 통제와 관리의 편의를 위해 기계의 출현을 불가피한 것도 사실이다. 고객과 기업이 사람과 사람의 커뮤니케이션이라는 최종 목적지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토시 하나 틀리지 않는 딱딱한 말투와 마주하며 기계적인 손놀림으로 기본적인 숫자들로 한정된 번호판을 누르는 여정이 기다리고 있다. 그렇다고 이 여정이 곧바로 목적지로 안내해 주지 않는다. 상담원 한 사람과 연결되기 위해 나와 같은 사람들의 치열한 연결 경쟁이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운 좋으면 상냥하게 인사하는 상담원의 인사를 받으며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지만, 대부분은 여전히 기계적인 사과 멘트를 끝으로 수화기를 내려 똑같은 여정을 반복하기 일쑤다.

나는 여기저기서 인간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이 천박한 기계들을 경멸한다. 물론 전화교환원이란 게 결코 즐거운 직업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고객 입장에서는 인공 음성이 지시하는 대로 우물쭈물 따르는 것보단 전화교환원 쪽이 훨씬 덜 고통스러운 접촉 형태이다. 스스로 선택하지 않은 인공 음성에 강한 거부감을 갖는 나 같은 사람에게는 더욱 그러하다. 하지만 다음 단계로 나아가기 위해선 별수 없이 전화기의 별표를 눌러야 했다. P.14

이 책 속의 ’나’는 현재를 사는 우리와 참 많이 닮았다. 딱딱한 기계 음성에 분당 전화 요금까지 지불해가며 숫자를 누르고 기다리기를 반복하지만 결국 연결되지 않거나, 상담원과 연결이 된다 하더라도 원하는 답을 듣지 못하고 끝내는 경우도 허다하다. 상담원 선에서 끝나지 않으면 부서 담당 직원, 그리고 또 다른 상사에게까지 끝없는 피라미드 구조를 또 한 번 깨닫는 것으로 지치고 만다.

’나’는 참 간결하고도 직설적인 말투로 자동응답기와 컴퓨터, 거대한 회사라는 조직의 주니어격인 지나치게 분업화된 고객 서비스에 대한 인간의 혼란과 상실을 가득 담아냈다. 이상하게 느껴질 것 없이 조급하고 초조하며 혼란하기 까지 한 현대인들이 느끼는 그대로라고 할 만큼 구체적인 솔직한 묘사가 인상적이다.

인간이 편안한 삶을 영위하기 위해 인간을 대신하는 많은 기계들과 기술이 생겨났지만, 결국 고질적인 인간 소외와 상실, 혼란을 더 크게 남길 것이다. 기계가 인간이 하는 일을 대신 할 수 있을지언정 감성을 대신할 수 없는 일이기에.

힘없는 직원 한 명이 용감하게 동분서주하는 이 녹색 지대에서 기업은 총체적으로 통합된 하나의 기계에 불과하다. 거기에는 인간이 인간을 위해 일할 수 있는 여지가 없다. 이 끝없는 실패 뒤에서 나는 새로운 상황이 어떻게 전개되는지 자세하게 바라본다. P.102

기대보다 훨씬 빨리 내 차례를 알리는 번호가 떴다. 순진하게도 나는 드디어 내 문제가 해결되겠다고 믿고 상담원에게 달려갔다. 앞선 고객들의 경우에서 똑똑히 본 똑같은 시나리오가 기다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P.105-106

어쩌면 이 책의 ’나’가 느끼는 혼란을 지나치다고만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가 빠른 과학 기술의 진보에 길들여져 ’혼란’에 무뎌진 것이라면 어떤가. 이러한 변화와 그 속도를 일상처럼 받아들이고 있는 내 자신은 얼마나 무감각한 기계와 닮아 있는가. 사람이 만든 발전의 산물을 역으로 쫓아야 하는 현실을 살고 있는 것이 바로 우리라는 것을 적어도 알고 있으라는 바람을 담고 있는 따끔하고 따뜻한 메시지, <고객 서비스부>의 짧고 강한 외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