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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심국제중학교 2학년 1반 배연수

함초롬히 윤기를 머금은 풀잎과 따사롭게 내리쬐는 햇빛, 그리고 소슬한 바람 한 줄기가 불어오는 곳, 다산. 그러나 이토록 아름다운 자연 뒤에는 편지 한 통에 숨겨진 아픈 기억이 있다. 다산은 조선시대의 위대한 학자, 정약용의 유배지이기도 하다. 1801년, 신유년의 어느 아침, 소내의 작은 집에 험상궂게 생긴 나졸들이 들이닥친다. 그들은 속된 욕을 아무렇게나 지껄이며 집의 물건들을 함부로 집어 던지고, 사람들을 밀쳐낸다. 이기적인 자들의 권력 싸움 앞에 한 가정이 산산조각 나는 순간이다. 그 순간, 한 남자는 길을 걷고 있다. 포승에 꽁꽁 묶인 손은 자꾸만 자유를 갈망하고, 그의 몸은 절망의 심연 속으로 점점 빠져들고만 있다. 더 이상 견디기가 힘들다. 외롭게 홀로 걸어가야 하는 길보다도 그의 가족들이 걱정이다. 아아, 그러나 그는 어느새 다시 비상할 길을, 잘려나간 날개의 자국을 좇고 있던 것이다.

이 책의 서술자 학유는 다산 정약용의 둘째 아들이다. 일찍이 과거에 합격해 동부승지로 백성들의 삶을 굽어보며 학문에 대한 깊은 조예로 수많은 저서를 남긴 위대한 정약용의 둘째 아들. 그런 그를 마냥 부러워하는 자들도 많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편지를 통해 엿볼 수 있는 마음은 비단 행복한 것만은 아니다.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유배는 어린 열 여섯 살의 학유에게는 감당하기 힘든 일이었을 것이다. 그는 무책임한 아버지를 원망하기도 하고, 가족을 살리기 위해 공부를 포기하려는 생각도 한다. 그러나 아버지는 자꾸만 학유에게 더 공부하고 더 읽고 더 배우기를 강요한다. 그 자신도 아주 잘 알고 있다. 자신이 다산 정약용의 아들이라는 것은 의심할 수 없는 사실이며, 자신은 아버지의 위대함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끊임 없이 배움의 길을 걸어야 한다는 것을. 현실은 자꾸만 그에게 더 많은 것을 요구한다.

나에게도 사춘기 시절은 있었다. 그것은 내가 초등학교에서 중학교로 큰 걸음을 내딛으며 이 곳, 청심국제중학교로 오게 되었을 당시부터 조금씩 싹 트고 있었나 보다. 나의 꿈에 한 발짝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을 것이라는 이유로 이 곳으로 왔지만 나의 미래는 그저 그 자체의 “꿈”으로만 남아있었다. 초등학생 때는 막연하게나마 누군가 물었을 때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있는 꿈이 있었지만, 중학생이 되면서부터는 그마저도 사라져 버렸다. 점점 나의 미래를 그리기가 어려웠고, 언젠가부터 나는 꿈에서조차 나의 모습을 안개 속의 흐릿한 형상으로 밖에 볼 수 없었다. 잠이 오지 않는 밤이면 늘 누워서 상념에 사로잡혀 있기가 일쑤였고, 그럴수록 점점 늘어가는 것은 허탈함뿐 이었다. 아직 중학생, 인생의 반도 살지 않았는데 완벽한 미래를 설계하고자 했으니 너무 원대한 계획 이었을까.

그러나, 아무리 내가 내 인생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자 노력해도, 이상하게 늘 무언가가 삐걱거렸다. 내가 하는 모든 일은 의도하지 않은 괴상한 방향으로 흘러만 갔고, 공부를 하려고 하면 할수록 성적은 떨어졌다. 그러다 보니, 나는 자연스럽게 공부에 흥미를 잃었고, 공부로 인해 받은 스트레스를 어떤 방법으로든 풀어야만 했다. 그래서 한 때는 가수가 되고 싶어서 샤워실에 물을 세게 틀어놓은 채로 크게 노래 연습을 하기도 했고 연기자가 되고 싶은 마음에 혼자 방에 틀어박혀 눈물연기를 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 모든 것도 아주 잠깐이었을 뿐, 나에게는 어린 나이에 맞지 않는 크나 큰 책임이 있었다. 사업에 성공하셔서 나에게 완벽한 교육의 기회를 제공해주신 훌륭한 아빠와 한때 교수직에 계셨던 엄마, 그리고 한국 최고의 고등학교를 나와서 미국 명문대에 입학한 오빠까지. 주변의 친구들은 언제나 이런 나를 부러워했다. 그러나 학유만은 내 심정을 이해하지 않을까.

나를 둘러싸고 있던 모든 상황이 나를 “좀 더” 잘하도록 강요했다. 늘 상위권에 속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언제나 더 잘해야 한다는, 최고가 되어야 한다는 책임감에서 해방될 수 없었고, 나도 모르는 새에 나의 목표는 오빠의 모교로 설정되어 있었다. 나는 이유조차 찾지 못한 채 오직 내 인생이 설정되어 있는 대로 따라가는 것에 급급했던 것이다. 막상 그런 생각을 하고 보니 허탈했다. 그리고 지난 15년이 무지 아깝게 느껴졌다. 분하고 슬펐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을 탓할 수는 없었다. 끊임없는 부담감 속에 나를 옭아맨 것도, 언제나 남과 나를 비교했던 것도, 나의 인생과 목표를 제멋대로 정해버린 것도 모두 나였기 때문이다. 학유도 그랬을까. 열여섯 살, 어린 나이지만, 유배를 간 아버지에 대한 원망도 혼란 속에서 가족을 지켜내야 한다는 책임감으로 누르고 사무치는 슬픔도 가슴 속에 묻어야 했겠지. 다산 정약용의 그 위대함을 지키기 위해 언제나 최고가 되어야만 했겠지. 형의 뛰어난 학문과 차분함에 언제나 자신이 초라하게 느껴졌겠지. 책을 읽는 내내 나는 나도 모르는 새에 고개를 끄덕이며 그를, 아니 나를 동정하고 있었나 보다.

학유의 이런 심란한 마음을 달래준 것이 바로 아버지 정약용의 편지가 아니었나 싶다. 머나먼 곳, 다산의 어느 숲 속 고요한 정자에 정갈한 차림으로 앉아 편지를 쓰는 아버지의 모습을 떠올리며 유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 그 편지가 전해준 것은 비단 다산에서의 소식만이 아니다. 숲 속의 향긋한 풀내음, 바람이 연주하는 대나무들의 노래, 갓 돋은 새싹마냥 싱그러운 초록빛, 그리고 아버지. 아버지의 익숙한 체취. 아무리 유배를 가 있다고 해도, 다른 시공간에 존재한다고 해도, 다산은 자신의 아버지였다. 그리고 스승이었다. 아버지의 편지는 유에게 많은 것을 일깨워 준다. 자신에게 닥친 상황 앞에 그저 무릎 꿇을 수 밖에 없는 무력한 모습에 점점 더 무너져가고 있던 그에게 삶의 이유를 불어넣어 준다. 그리고 막막한 삶 앞에 주저앉으려는 그와 그의 형이 꾸준히 배움의 기쁨을 찾아나갈 수 있도록 편지에는 열정과 안타까움이 함께 담겨 있다. 책의 끝 부분에는 유가 다산의 아버님께 드리는 편지가 쓰여 있는데, 그 곳에는 신유년의 어려운 날들을 통해 유와 정약용, 그리고 그의 가족들이 깨달은 것들이 쓰여 있다. 유의 속을 자꾸만 심란하게 하던 거친 파도도 다산에서의 맑은 차 한잔에 가라앉고, 그를 자꾸만 가라앉게 하던 무거운 안개도 숲 속에서 불어오는 바람 한 줄기에 부서져 내린 듯 하다.

당시의 나도 아빠에게 소중한 편지 한 통을 받았었 자꾸만 작아져 가던 나에게 나의 꿈을 일깨워 준 것이 바로 아빠의 편지였다. 나는 편지를 읽으며, 아빠의 어린 시절을 떠올리기도 하고 언제나 나에게 최선을 다해 주는 가족의 모습을 떠올리기도 하며 나도 몰래 미소를 떠올리고 있었다. 그 때 아빠의 편지 중에 아직까지도 기억에 선명히 남아 있는 말이 있다.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사람이 되라는 말. 그 때부터였던 것 같다. 내가 하는 모든 일에 최선을 다한 건. 내 꿈을 그렇게 설정을 하고 나니, 지금 당장 변호사가 되겠다거나 의사가 되겠다거나 라고 하는 것보다 훨씬 많은 일을 할 수가 있을 것 같았다. 그 일이 무엇이 되든지, 내가 그 직업에 나의 모든 열정을, 땀방울을, 눈물을 쏟아 붓는다면 그 일이 바로 나의 꿈이 되는 것이고 나의 미래가 되는 것이다. 내 꿈은 현재진행형이다. 나는 지금까지 이 모든 일을 너무나 복잡하게만 생각하고 있었던 것일까.

아직도 나는 아빠의 그 편지를 소중히 간직하고 있다. 얼마 전에 “다산의 아버님께”를 다 읽고 문득 떠올라, 책상 서랍 속 어딘가에 숨어 몇 달이고 보이지 않던 그 편지를 기어이 다시 찾아서 읽어 보았다. 오랜만에 꺼내 눅눅해진 편지를 학유가 한 것처럼 한 낮의 따스한 햇볕 아래 말렸다. 나의 어린 기억들이 보송보송해질 때까지 말리고 또 말렸다. 언젠가는 이 모든 것도 사춘기 시절의 기분 좋은 추억이 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