꽤 두꺼운 분량의 책을 단 몇 시간 만에 읽어버렸다. 단 세 단락으로 크게 나눠진 책은 겉으로 보이는 이야기는 간단하나 그 속 내용은 그렇지 않다. 그래서 더욱더 끌리는 매력이 있다. 단순함에 이끌리어 들어간 내면에서는 더 많고 복잡한 이야기들이 숨겨져 있으니 큰 반전은 없어도 이야기 자체의 탄탄함에 매료될 수밖에 없다. 더군다나 이 번역서가 한국에서 소개되는 돈 윈슬로의 첫 작품이라니 이 책 이후에 쓰인 주인공 닐 캐리시리즈를 더 읽어보고 싶은 기분이다.

 

전체적인 이야기는 아주 간단하다. 부통령 후보에 나가려고 하는 정치인이 자신의 말썽장이 딸을 찾아달라고 하는 이야기지만 이게 말처럼 쉽지가 않다. 일단 그 부탁을 받은 닐 캐리는 표면적으로는 대학생이다. 그러나 그는 마약장이 엄마의 밑에서 소매치기를 하면서 자라왔고 어느 날 여느 때와 같이 소매치기를 하던 그는 그레이엄에게 붙들리고 그를 불쌍히 여긴 그는 자신의 일을 가르치며 닐이 부르는 호칭인 아빠처럼 그를 키우게 된다. 그레이엄은 속칭 '가문의 친구들'이라는 곳에서 일을 하는데 쉽게 말하면 고위층들을 위한 흥신소의 개념이라고 보면 될 듯하다. 은행에서 중요한 고객들을 대상으로 그들이 직접 하지 못하는 일을 해주다보니 그것이 회사처럼 세워진 것이다. 정치인의 딸 앨리는 그냥 장난만 치는 꼬마가 아니라 남자에 마약에 술에 안 해본 게 없는 아이고 이제는 가출을 해서 석 달 동안 어디있는지도 모르다가 정작 자신이 필요할 때가 되니 이제야 그 아이를 찾겠다고 나선 것이다. 한국과는 다르게 미국에서는 가족의 이미지가 정치인에게는 매우 중요하게 부각이 되는 편이다. 클린턴도 오바마도 딸들의 이미지가 선거에 아주 중요한 입지를 차지했고 그들의 사진은 선거기간동안 내내 신문에 오르내리곤 했었다. 한국의 정치인들은 나이가 많은 상태에서 정치를 하는 경우가 많아서 그런지 아니면 자신의 가족은 보호하려는 마음이 더 커서 그런지는 자세히 모르겠지만 미국만큼 크게 가족의 이미지가 나타나지는 않는다. 아마도 소설에 등장한 정치인이 한국에서 정치를 했다면 이러한 이야기 자체는 성립이 되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앨리는 3개월 전에 런던에서 마지막으로 보인 것으로 드러나고 닐은 런던으로 향한다.

 

정당대회가 있는 날까지 앨리를 원래 가족의 자리에 돌려놓아야 한다. 주어진 시간은 단 8주. 분명 시간적 한계가 있고 런던에 가서 닐이 앨리를 찾게 되는 부분까지는 6주가 남았다 또는 5주가 남았다는 식으로 남겨진 시간을 표시하고는 있지만 의도와는 다르게 별달리 느껴지는 긴박감은 없다. 번역의 한계일까 또는 일부러 그런 느낌을 배제하기 위해 애를 쓴 것일까? 그러나 런던으로 넘어가면서, 앨리를 찾기 위해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지 않고 주변에 잘 파묻혀 다니면서 런던의 거리거리를 묘사한 부분에서는 이 책이 소설이 아니라 가이드북이라 해도 좋을 만큼 자세히 그러나 지루하지 않게 표현되어 있다. 그 느낌이 너무도 생생해 런던의 도시 한 가운데 내가 직접 서 있는 듯 한 느낌이다. 영화로 치면 긴박감 속에서 잠시 여유를 느끼며 쉬어가는 부분이랄까 작가의 센스가 돋보이는 대목이다. 닐은 앨리를 마침내 찾게 되고 그녀를 데리고 있는 일당들을 한편의 사기극을 만들어 속인 후 그녀를 데려오려 완벽한 계획을 만든다. 이 계획을 점검하고 실전에 옮기는 부분에서 너무나도 완벽히 들어맞아서 그대로 이야기가 끝이 나는 게 아닐까 생각했지만 작가는 마지막 트릭을 숨겨놓았다. 반전이라 하기에는 미미하지만 닐의 이 계획은 틀어졌고 그 배후에는 누군가 자신의 일을 방해하는 이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제 믿을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나 이 숨겨진 반전은 너무 늦게 또한 잠시 나오기 때문에 큰 여파를 주지 못한다. 오히려 이 내용보다는 닐이 앨리를 데리고 무사히 미국으로 오느냐가 중요할 뿐. 과연 닐은 시간에 맞게 앨리를 데려 올 수 있을까?

 

런던에서 앨리를 찾을 때 닐은 잠시 동안 앨리가 구걸을 하고 있지 않을까 생각한 장면이 있다. 집에 돌아가야 하는데 차비가 없다는 말로 사람들에게 잔돈을 얻어내거나 주소와 전화번호를 내밀며 나중에 줄 테니 빌려달라고 하거나 또는 그냥 동전 몇 개 달라고 하는 식의 그런 생각을 하는데 어찌나 한국의 사람들과 닮아 있는지 새삼 놀라기도 했다. 지하철을 타고 가다보면 가끔 이러한 방법으로 천원 이천 원씩 모아가는 한국의 그들의 수법과 너무나도 똑같았기 때문인데 돈과 연관되어 있는 일은 전 세계 어디서나 다 비슷하다는 생각에 헛웃음이 지어지기도 했다. 정치인과 여자 그리고 그들의 가족, 마약딜러들과 오래된 고서, 자본가들의 집단과 그 배후에서 일을 봐주는 사람들. 수많은 사람들이 얽혀서 풀어나가는 이야기가 재미는 있지만 현실과도 비슷하게 닮아 있는 듯 하여 쓴 맛이 뒤돌아 남아있다.

이미 한국에서 오래전에 ‘철학의 뒤안길’이란 제목으로 출간되었던 빌헬름 바이셰델의 스테디 셀러가 새로운 제목으로 새로운 번역자와 함께 독자를 찾아왔다. 그런데 알고 보니 2009년 밀리언스마일북스에서 안인희가 번역한 동명의 책이 이미 출간했다는 점이다. 각종 인터넷 서점에서 이 책이 여전히 팔리고 있고 어느 곳에서는 반값으로 할인해서 7500원에 구입이 가능한데 출판사만 바뀐 두 배 가격의 책을 구입할 소비자가 과연 있을지 의문이 드는 게 사실이다. 결국 소비자의 선택의 몫일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외국어대학교 철학과 교수인 이기상 번역의 원어에 충실한 ‘철학의 뒤안길’이란 제목을 더 좋아하지만 안인희 번역자가 같은 제목으로 책을 번역 출간할 수 없어서 자구책으로 제목을 바꾼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두 책을 잠시 비교하자면 다음과 같다:

“ 파스칼은 아주 뛰어난 신동이었다. 한 심술궂은 비평가는 그렇기 때문에 그는 결코 학교에 다닌 적이 없다고 주장한다. 그렇다고 그가 개인 교사의 교육마저 받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저명한 세무관이었던 아버지가 직접 파스칼에게 필요한 기초 지식을 가르쳐 주었는데 그의 아버지는 매우 엄격했다.”-철학의 뒤안길

“파스칼은 특별한 신동이었다. 악의적인 보고자라면 그가 학교를 다니지 않았기 때문에 신동이라고 주장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가 공부를 아예 안 한 것은 아니다. 존경받는 세금 징수원이었던 아버지가 그에게 최초의 지식을 가르쳐주었다.”-철학의 에스프레소

 

독일어 원서가 없는 상황에서 어느 책이 더 좋다고 말할 수는 없기 때문에 결국 최종 선택은 독자의 결정에 달려있다고 볼 수 있다. 다만 철학의 에스프레소를 읽을 때 다른 철학 관련 서적과 함께 읽는 것도 도움이 많이 되리라고 본다. 그 이유는 철학의 에스프레소에서 번역되는 용어들이 철학 전공자들에게는 익숙하지 않은 부분이 종종 등장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에서 ‘존재’를 ‘있음’으로 번역해서 혼란을 가중시킨 점이 있기 때문이다. 지금의 세대는 ‘있음’이 더 친숙할는지는 모르겠지만 나와 같은 90년대의 철학 서적에 익숙한 일부 독자에게는 다소 혼란을 주는 게 사실이다. 그리고 그노시스파는 성서학계에서 영지주의라는 용어로 널리 사용되는데 번역자가 이를 간파하지 못한 것 같다. 한 가지 더 지적하자면 빌헬름 바이셰델이 독일 학자이다 보니 이 책에는 대부분 유럽대륙, 특히 독일 사상가들 중심으로 책이 구성되어있다. 서양철학사의 한 획을 그었던 영국 공리주의나 영미철학이 빠져있다는 점에서 강성률 교수의 ‘한 권으로 읽는 서양철학사 산책’과 같은 좋은 서양철학사 서적을 함께 읽는 선택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일반인이 부담 없이 철학자의 일생과 사상에 대해 접할 수 있는 책을 고른다는 게 상당히 어렵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옥스퍼드에서 출간한 Very Short Introductions 시리즈의 철학 관련 책을 개인적으로 좋아하는지도 모른다. ‘철학의 에스프레소’는 철학의 입문서나 개론서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긴 철학의 역사와 많은 수의 사상가를 다루고 있어서 철학 전공자나 전공하려는 대학생에게는 적당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철학에 관심이 있고 철학을 딱딱하고 어려운 학문이라는 고정관념을 가지고 있는 일반 독자층에게 필요한 책임에는 틀림없을 것이다. 사실 전공자들에게도 어려운 철학의 사상에 일반 독자들은 관심을 덜 가지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유명한 철학자들의 당시 가지고 있었던 사상과 생각들이 오늘날 현대인에게 흥미와 더불어 시간의 흐름에서도 변하지 않는 진리를 전달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철학은 과거에 살았던 사람들의 삶 자체라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현대를 사는 우리들에게는 과거의 사상을 통해서 미래를 준비하는 귀한 교훈을 얻게 된다고 생각한다. 철학의 에스프레소를 읽으며 에스프레소처럼 약간은 쓰지만 고급스러운 철학의 참 맛을 느껴보는것도 가을을 맞이하는 현명한 계획일 것이라고 생각하며 이 책을 추천해 본다.

미야베 미유키는 작가 본인이 게임광이라 할 만큼 게임을 좋아한다. 그래서 제목도 롤 플레잉 게임의 줄임말인 r.p.g가 되지 않았을까 한다. 과연 저자가 게임에 빠져들지 않았다면 이런 포맷의 소설이 등장할 수 있었을까 할 정도로 특색 있는 구성을 가지고 있다. 아마 롤 플레잉 게임이 일반화되기 전인 몇 년 전에 이 책이 나왔어도 사람들이 과연 이 소설을 읽고 이해할 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도 생긴다. 책도 영화나 다른 여타의 문화들처럼 시대상을 반영한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는 작품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름의 첫 글자들을 따서 미미여사라는 닉네임으로도 불리는 작가의 다른 작품인 '모방범'과 '크로스파이어'에서 나왔던 두 명의 형사가 이 작품에서는 파트너로 호흡을 맞추고 있다. 그조차도 아마 작가가 이 게임의 형식에 맞추고자 설정했던 이미지라고 보인다. 내용상 가족의 구성원을 맞추기 위해 노린 하나의 노림수가 아니었을까? 처음 이야기의 시작은 일반적인 추리소설이나 미스터리 소설처럼 누군가의 죽음으로 시작하고 있다. 교살로 추정되는 한 여자의 죽음. 그 죽음이 또 하나의 죽음으로 이어진다. 몸 전체가 칼에 찔린 한 가족의 가장이기도 한 한 남자의 죽음. 두 사람의 죽음을 각각 조사하던 경찰은 둘의 연관성을 밝혀내고 연쇄 살인에 초점을 맞추어 공동수사를 하게 된다. 그리고 노트북을 보다가 그들은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게 되는데 그 남자는 온라인상에서 다른 하나의 가족을 만들어 생활하고 있었다. 서로 마주보고 만나는 대상이 아닌 단지 온라인 속에서 자기 딸과 같은 이름을 쓰는 딸의 고민을 들어주고 보듬어 주고 그 관계에 아들이라는 남자아이도 하나 끼게 되고 마지막으로 자기가 어머니라면서 완벽한 구성의 4인 가족을 구성하게 된다. 실제로 그들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오프 즉 실제로 만나기도 했는데 별달리 특별한 모임을 아니었던 듯하다.

 

인터넷이 발달을 하게 되면서 채팅이라는 문화가 발달했고 그럼으로 인해서 사람을 새롭게 만난다는 것은 전혀 어렵지 않은 일이 되어 버렸다. 외국에서는 흔한 일이지만 한국에서는 길가다가 마주치는 사람들에게 '안녕'이라고 얘기하면 '저 사람이 나를 잘 알지도 못하면서 왜 인사를 할까'라는 표정으로 돌아보지만 채팅방에서는 누구나 들어오는 사람들에게 안녕이라고 인사를 한다. 오히려 실제로 누군가를 만나는 것보다 더 편하고 즐겁고 나를 모르는 사람이니 내 고민을 털어놓아도 전혀 부담이 없는 상태가 되어 버린다. 이것에 과연 좋은 방향으로만 생각되어지는 것일까? 익명성으로 인하여 십대 여자아이들은 간단히 자신의 몸을 대가로 돈을 벌기도 하고 죽을 용기가 없는 사람들이 집단의식에 휘말려 함께 죽기도 한다. 죽은 그 남자는 이미 결혼한 지 오래 되었고 바람기가 있었고 그럼으로 인해 부인은 그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냥 같이 사는 남편일 뿐 그 이상의 감정은 없었다고 진술한다. 또한 십대에 들어선 딸조차도 어린 여자를 찾고 바람을 피우는 아버지를 좋아하지 않았을 것이고 결국 그는 가정에서 사랑을 얻지 못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온라인상에서 가족을 구성한 것이 아니었을까?

 

물론 그가 의도한 바는 아니었겠지만 자기 딸과 같은 이름의 여자아이를 만나서 실제 자신의 딸에게 하지 못했던 다정한 말을 해주고 싶었던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것이 실제로 이루어졌다면 아마 그는 행복한 가정을 이룰 수도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랬다면 그들의 가정은 또한 그의 딸은 슬픈 결론 대신 행복한 가정의 행복한 십대를 보낼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모든 문제 아이들은 문제 부모에게서부터 시작이 된다. 사회에 적응을 하지 못하는 사람들 또는 고집을 피우는 아이들, 자신밖에 모르고 남을 위할 줄 모르는 사람들 모두 교육의 중심이 가정교육이 잘못 이루어졌고 그 뒤에는 부모의 역할을 제대로 배워서 수행하지 못한 그들의 부모가 있는 것이다. 이 책을 읽는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역할에 충실했으면 좋겠다. 게임에서 자신의 역할에 충실해서 그 모든 단계를 클리어 하는 것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