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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중록이 정조의 어머니이자 사도세자의 정비인 혜경궁 홍씨가 쓴 거라는 건 누구나 알 것이지만 한중록을 읽어 본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나도 그런 사람들 중에 하나였고 사실 한중록에 별 관심이 없었었다. 그러다가 문동의 우리 시대 명강의 중 하나인 권력과 인간"이란 연재를 읽게 되면서부터 관심이 생겼다. 한중록이 중요한 역사적 자료인 까닭은 공식적 기록인 승정원일기나 조선왕조실록에는 미처 실리지 못한(예를 들면 영조의 출신에 대한 컴플렉스라든가 하는)사건이나 뒷 이야기 등을 가장 측근에서 그 모든 것을 경험해 온 혜경궁 홍씨가 직접 서술하였기 때문이다.

이 책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뉘어 있으며, 제 1부는 사도세자의 죽음에 관련된 이야기, 2부는 혜경궁 홍씨의 어린 시절부터 궁중 삶에 관한 이야기, 3부는 자신의 친정에 대한 이야기로 18세기 정치사의 이면의 모습까지 볼 수가 있다. 혜경궁 홍씨가 쓴 순서는 2부를 조카 홍수영의 부탁으로 먼저 쓰고(1795년), 친정을 위한 변명을 1802년 7월 친정의 무죄에 대한 항변 목적으로 썼으며, 같은 해 봄 초고를 작성한 내 남편 사도세자는 순조의 생모인 가순궁이 후손들이 경모궁(사도세자)의 사건에 대해 알 수 있게 해달라는 요청에 의해 1805년 4월에 완성하였다. 후에 정순왕후의 수렴청정이 끝나고 그 배후세력이 몰락함에 따라 친정을 위한 변명에 추록에 해당하는 병인추록을 1806년 하반기에 추가로 작성하였다.

혜경궁 홍씨가 쓴 한중록의 1부에 해당하는 내 남편 사도세자를 읽다 보면 사도세자가 매우 안쓰럽게 느껴졌다. 영조 앞에서 늘상 주눅 들어 있던 사도세자. 영조는 사도세자의 성격이 본인과 맞지 않아 별로 좋아하지 않았으며 별다른 일이 아님에도 꾸중을 많이 하였고 그런 일이 어렸을 때부터 반복되자 사도세자는 영조를 매우 두려워했던 것 같다. 그러니 실수가 더 잦아지고 영조는 더 노여워하고 탐탁치 않게 생각하고 오해가 쌓여서 나중에는 결국 그런 비극적인 결말을 맞게 되었던 것이리라. 게다가 영조는 자식들간 차별대우가 무척 심하여서 자신이 총애하던 첫번째 딸인 화평옹주와 화완옹주(정처)가 사도세자와 같은 장소에 있지도 못하게 하고 같이 있으면 사도세자에 불같이 화를 냈다고 한다. 영조는 왕위에 오르기까지 우여곡절이 많았고 왕위에 오른 후에 있었던 이인좌의 난 등으로 인해 죽음에 대한 공포가 심하여 미신적인 행위를 신봉하였는데 그에서 비롯된 행동이 사도세자에게는 깊은 마음의 상처를 남겼으리라 본다. 그런 마음의 상처가 풀리지 않고 계속 쌓이다 보니 화증이 생기고 의대증이란 강박증까지 생기고 심지어 사람들까지 죽이게 되었다. 사도세자에게 광증이 나타났던 것이다. 정병설이 옮긴 한중록에서는 사도세자의 죽음이 노론에 의해 희생된 억울한 죽음(영조의 잘못)이라기 보다는 사도세자가 아파서 그런 것인지 몰랐던 영조가 어쩔 수 없이 종묘과 사직을 먼저 생각해야 하는 왕의 입장에서 내린 결정이었다고 보고 있다.

1부를 읽으면서 점점 뒤틀어져 버리는 영조와 사도세자의 관계를 가장 가까이서 지켜본 인물인 혜경궁 홍씨의 안타까운 심정이 전해져왔다. 자신이 나서서 오해를 풀어 줄 수도 없고 지켜만 보자니 답답하고 안쓰럽고...영조가 진작에 자식의 허물을 조금만 따뜻하게 감싸주었다면 이런 비참하고 참혹한 사건은 벌어지지 않았을텐데 라는 생각이 들었다. 1부는 굉장히 드라마틱한 요소를 가지고 있어 문학작품을 읽는 재미도 느낄 수가 있다.

2부에서는 자신의 삶 전체를 담담하게 회고하고 있는 부분으로 자신의 어린 시절, 궁중에서의 삶, 친인척과의 일화 등을 서술하여 당시 풍속 등을 짐작해 볼 수가 있다.

3부는 친정을 위한 변명인데 정처와 정후겸라든지 특히 정순왕후의 외가의 갖은 중상모략으로 인하여 자신의 친정의 화가 미친 일련의 사건들에 대해 근거가 없는 날조된 것이라며 근거와 정황(자신이 직접 목격한 일, 정조의 말과 글, 시간상의 모순 등)을 들어 조목조목 반박을 하고 있다. 혜경궁 홍씨는 동생 홍낙임이 전례 사건에 연루되어 억울하게 사사당하고 아버지인 홍봉한 또한 역적의 괴수로 지목되는 일을 겪으면서 무척 분노하였을 것으로 생각되는데 감정적으로 대응하기 보다는 나름의 논리적인 근거를 들어 반박하려고 했던 점이 돋보인다. 3부는 당시 인물들간의 관계, 여러 사건 등 역사적인 배경 지식이 없으면 조금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들이 있는데 저자의 덧붙여 놓은 "한중록 깊이 읽기"(총 40개)라는 것을 통해 읽으면서 느꼈을 궁금증을 해소하고 이해를 높이고 있는 점이 좋았다. 나주에 그 부분만 따로 뽑아서 읽어봐도 좋을만큼 숨은 배경이나 지식에 대해서 재미있게 서술해 놓았다.

보통 왕이나 세자, 세자빈, 재상 등의 높은 위치에 있으면 좋은 날만 있을 것 같아 보이지만 혜경궁 홍씨의 삶의 기록들을 들여다 보면 정말 파란만장한 삶이구나 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세자라도 왕에게 미움을 받고 왕권에 위협이 된다고 판단되면 제거되며 재상의 위치에 있어도 언제 누구의 상소로 인해 역모의 죄를 받을 수도 있었다. 오늘의 충신이 권력의 행방에 따라 내일은 역적이 되고 오늘의 내일의 적이 되기도 하는,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것이 권력를 둘러싼 쟁투인가...

한중록을 읽으면서 우리 역사에 대한 관심이 살아난 것 같았다. 나중에 기회가 되면 원본 한중록을 읽어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