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제훈, 소설집 <퀴르발 남작의 성>을 읽고선 관심가는 작가가 되었는데, 그의 첫 장편소설 <<일곱 개의 고양이 눈>>이 나왔다.

이 소설은 연작 소설과는 달리, 네 개의 중편이 모여서 하나의 장편을 이루는 픽스업이라는 독특한 형식으로 쓰여진 작품이다.

사실은 픽스업에 대한 개념이 별로 없어서 네 개의 중편을 하루에 하나씩 읽어나갈 예정이었다. 하지만 읽기 시작하면서부터 그런 계획은 유효하지 않음을 깨닫게 되었다. 여섯번째 꿈, 복수의 공식, 파이, 일곱 개의 고양이 눈, 네 개의 이야기들이 서로 얽히고 설켜서 읽을수록 명확해지는 게 아니라 모호해지기만 하고 결말이 대체 뭐야? 하는 심정으로 계속 읽어나갈 수밖에 없었다.

각각의 이야기들을 따로 떼어놓고 살펴봐도 충분히 흥미진진하고 멋지지만 그 이야기들이 밑바닥에서 서로 연결되어 있는 점이 이 작품의 백미가 아닌가 싶다. 흩어진 조각들이 조합되고 끊임없이 연결되고 하는 이런 구성을 위해 작가는 얼마나 치밀하게 구상을 했을까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쩌면 조그만 꼬투리만 잡아도 레밍 떼처럼 맹목적으로 질주하는 통제 불능의 자유연상 시스템이 발동(p.292)해서 휘리릭 단숨에 써 내려갔을지도...
집중해서 따라가려니 처음엔 좀 머릿골이 아프긴 하지만 샘솟듯 쏟아지는 이야기들의 늪에 빠진 것을 어느 새 즐기고 있었다.

처음에 나오는 <여섯번째 꿈>은 누군가의 독백인지 아니면 대화인지로부터 모호한 것으로부터 시작되는데, 여타의 추리 소설에 많이 볼 수 있는 밀실 살인과 비슷한 양상으로 전개된다. 하지만 다 읽고 나도 범인이 누군지는 모호하기만 하였다. 사람들의 무의식이 악마란 것인가? 라는 생각과 함께 그 산장에 모인 여섯 사람들은 어떤 연관성을 가지길래 선택이 되었을까? 란 의문을 가진 채 그 다음 이야기인 복수의 공식으로 넘어가게 된다.

<복수의 공식>은 <여섯번째 꿈>에 나오는 전신마취(민규), 한니발(영수), 유혈낭자(세나), 왕두더지(태식), 불면증(현숙), 폐쇄회로(연우)의 등장인물들에 대한 이야기를 순차적으로 하고 있는 듯 하다. 자신의 가명과도 같은 그들의 사연들을 하나씩 들려주며 그 안에서 그들은 묘하게 인연을 맺고 있음을 알게 된다. 아무런 관계가 없어 보이던 그들이 왜 같이 선택되었는지가 서서히 드러난다. 하지만 방심해서는 안된다.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처음에 나왔던 사연이 뒤에 가서는 조금 뒤틀려서 다시 나오기 때문이다. 그것도 한번으로 끝나지 않는다. 반복하다 보면 어떤 사연이 진실인지 알 수가 없어진다. 안개 속에 있는 것만 같다. 비슷하지만 조금씩 다르다. 예를 들면 처음에는 간질을 앓고 있는 어떤 남자가 강간당하고 자살한 자신의 쌍둥이 여동생에 대한 복수를 하는 사연이었다가 간질을 앓고 있던 쌍둥이 남동생이 도둑이 들었을 때 발작을 일으켜 죽어버리고 그에 대한 복수를 하는 사연으로 바뀌고 쌍둥이 남매가 서로 사랑하는 사이였는데 이루어지지 않는 사랑을 비관하여 같이 자살하려다가 여자만 죽고 남자만 살아남았지만 결국 그도 자살해 버리는 사연으로 변했다가 이마저도 환상에 불과하다는 식으로 끊임없이 변주된다.

<파이>는 이야기 속에 이야기가 존재하고 그 이야기 속에 또 이야기가 존재하며 뫼비우스의 띠처럼 되돌아올 뿐이다. 이야기를 번역하는 작가(연우로 추정되는)가 나오고 그 이야기에 등장하는 M도 작가이며 M이 번역하고 있는 소설의 내용이 여섯번째 꿈이며(등장인물들의 이름만 일본식으로 바뀐 설정) M이 이야기에 대한 압박을 느끼게 만드는 아르테미스같은 여자가 들려주는 하루의 이야기 속에 쌍둥이 남매에 대한 이야기가 들어가 있는 식이다. 이런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의도적인 데자뷰 현상을 집어 넣었다. 비슷한 문장들이 반복되어서 나오는 부분이 여러번 등장하여 이거 어디서 봤던 건데...라는 생각이 계속해서 들게 만든다. 예를 들면,

진홍빛 화염이 건조한 회청색 하늘을 거침없이 집어삼켰다. 기세가 꺾인 낮의 군대는 대열을 허물고 허둥지둥 퇴각했다. M은 눈도 깜빡이지 않고 노을의 고요한 진격을 응시했다. 그 절정의 한순간을 놓치지 않겠다는 듯, 선연한 붉은 빛이 하늘 끝까지 닿으려는 찰나 (파이 중 p.181)은 M이 본 것을 서술한 것이며

건조한 회청색 하늘을 거침없이 집어삼키는 진홍빛 화염. 하루는 우두커니 서서 눈도 깜빡이지 않고 노을의 고요한 진격을 응시했어. 그 절정의 한순간을 놓치지 않겠다는 듯. 선연한 붉은 빛이 하늘 끝까지 닿으려난 찰나......(파이 중 p.226)은 아르테미스같은 여자가 M에게 해주는 이야기의 한 부분이다.

머리가 터질려는 지점에서 마지막 편인 일곱 개의 고양이 눈으로 넘어간다. 화자가 도서관에서 우연히 미스터리 클럽 Q 제 1권- 일곱 개의 고양이 눈을 발견하는 것으로 시작된다.(내가 읽고 있는 소설의 제목과 동일한) 화자는 첫번째 등장하는 소설은 "폭우"를 읽다가 말았는데, 그 뒷 이야기를 자기 나름대로 상상하여 이어나가는 내용인데, "폭우" 자체로도 굉장히 매력적이었다. 화자는 그 책의 논리적으로 모순되는 점을 발견하고 그 책이 원주율 파이처럼 무한대의 수이지만 결코 반복되지 않는 하나의 완벽한 미스터리 소설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것은 세번째 편인 <파이>에서 M이 쓰길 원했던 것이기도 하고 내가 읽고 있는 이 작품 <<일곱 개의 고양이 눈>>의 저자인 최제훈이 원했던 것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네번째 <일곱 개의 고양이 눈>의 마지막 문장은 ’자, 이야기를 계속해 봐. 잠이 들지 않도록’ 인데, 이것은 작품의 맨 첫 문장으로 이어진다. 그야말로 뫼비우스의 띠. 이 작품을 읽고 있는 독자는 벗어나고 싶어도 결코 벗어날 수 없는 이야기 속으로 들어와 버린 것이다. 벗어나길 체념하고 즐기는 편이 나으리라.

그리고 곳곳에 숨겨져 있는 소소한 묘미가 인상적이었는데, 네 개의 중편에 산재해 있는 연결고리를 발견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이 작품의 첫번째 편에 해당하는 여섯번째 꿈에 등장의 배경이 된 눈 쌓인 산장이 세번째 편인 파이에서 M이 번역하던 여섯번째 꿈이라는 일본소설의 표지로 나오고 네번째 편인 일곱 개의 고양이 눈 속 화자가 본 폭우"라른 소설에 등장하는 형사가 눈 쌓인 산장이 그려진 머그잔을 들고 나오는 식이다.

또한 이 작품은 재미뿐 아니라, 우리가 그동안 무의식적으로 외면하고자 하였던 죽음이 어떤 것인지 한번쯤 깊게 생각해 보는 기회를 준다. 남의 죽음을 유희의 대상으로만 바라보다 자신의 죽음 앞에서는 살고자 발버둥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하고 창조자라도 된 듯 내 손으로 세상을 변형시키고 싶은 욕망의 하나로 살인을 하는 것을 보여주기도 하는 식으로 말이다. 죽음은 결코 유희의 대상이 될 수 없으며 공포로만 느낄 것도 아니다. 어둠이 대한 인식이 있을 때 빛은 더욱 밝게 빛난다고 하였다. 죽음의 실체에 대해 똑바로 바라볼 때 타자화된 죽음의 이미지를 극복하고 오히려 삶이 풍요로워질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근래 읽은 작품 중 가장 기묘한 이야기였는데, 최제훈의 작품엔 기발한 상상력을 뛰어 넘는 특별함이 있는 듯 하다.

좋아하기 시작한 작가 윤대녕의 산문집 이 모든 극적인 순간들이다.

오랫만에 사 보는 작가의 산문집.

가끔 작가의 산문집은 어떨까? 궁금해서 사 보지만 기대보다 별로였던 적이 많아

행여 윤대녕의 것도 그러면 어쩌나...걱정되기도 하였다. 소설에 대한 기대마저 같이 내려 앉을까봐서.

산문집이니 시간 날 때마다 하나씩 꺼내 읽어야겠다. 고 마음 먹었지만

마음 먹은대로 잘 안 되었다. 새벽녁에 읽기 시작했는데 나도 모르게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예전 어렸을 때 쌓아 놓은 만화책을 읽어 가면서 줄어드는 걸 보고 안타까워했던 생각이 문득 들었다.

산문집은 크게 내 어머니 이름은 란/이 모든 극적인 순간들/나의 기차 이야기/나는 왜 문학을 하는가/윤대녕의 독서일기로 구성되어 있다.

독서일기를 제외하고는 다 읽었다. (독서일기는 하나씩 읽을 생각이다. 생각보다 내가 아는 책이 거의 없어서 한꺼번에 읽으면 뒤죽박죽 섞일 것 같았기 때문이다. 작가가 읽는 책들은 대체 뭘까? 라는 게 궁금했었기에 어떤 책들을 읽어 왔는지 알 수 있는 좋은 기회렸다.)

각각의 짤막한 이야기들 속에 그가 살아온 삶과 생각이 살포시 깃들어 있다. 어느 하나를 읽더라도 흠뻑 빠지게 된다. 다들 자기 이야기를 하길 좋아한다지만 이렇듯이 늘어놓는 이야기라면 말을 줄이고 자연스레 귀를 기울이게 될 것이다. 읽은 이야기가 쌓여 갈수록 그와 친숙해진 기분이 들었다.

"내 어머니 이름은 란"은 윤대녕의 가족, 그의 어린 시절과 관련된 이야기가 주를 이룬다. 그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듯 어머니에게서는 항상 뜨거운 흉통을 느끼고 아버지와는 서먹하고 소원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그의 어머니는 달성 서씨에 이름은 란이었다. 나랑 같은 성이라는 거에서 동질감을 느꼈다. 이름이 옛날분같지 않게 단아하면서 예쁘다는 생각이 들었다. 란.

"이 모든 극적인 순간들"은 그가 겪은 극적인 순간들에 관한 이야기이며 그 순간들은 특별한 순간이 아니 매순간이다. 특정한 사건이 같은 시공간에서 벌어질 확률은 천문학적이라고 말을 인용하면서 그러니 나날은 극적인 요소가 내재되어 있으며 만나고 헤어짐에는 불가해한 우주의 섭리가 있다고 그는 생각한다.

그는 매년 절기마다 만나는 사람들이 있다고 한다. 항상 정하여진 것은 아니지만. 자연스레 그 절기가 되면 그 사람이 생각이 날 것이다. 절기와 함께 돌아오는 반가운 인연들을 떠올리며 매해를 반갑게 맞이하였을 것을 생각하니 그가 부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소설가가 윤대녕에게 그걸 소재로 소설을 써보라는 의견을 제시하였다고 한다. 그가 그런 소재로 이야기를 쓴다면 사람과 만나는 법을 읽은 나는 매우 반가울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도 대다수의 현대인처럼 불면증을 앓고 있었는데, 여행을 떠나게 되면 신기하게도 잠이 매우 잘 온다고 하였다. 자기만을 위한 온전한 시간을 위한 여행. 번뇌때문에 잠이 안 오는 것이므로 자족하게 되면 잠이 찾아올 것이고 다음날 아침이 가져다 주는 신선한 기쁨을 만끽할 수 있다고! 불면증이 괴로운 건 이러한 신선한 기분을 느껴 보지 못함이리라. 가끔 푹 자고 아침 일찍 일어났을 때의 그 상쾌하고 뭐든 할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은 오랫동안 느껴보질 못했다. 지금 나에게 여행은 처방이 아닌 것 같지만 자족감이 처방이 된다는 것엔 깊이 공감을 한다.

"나의 기차 이야기"는 윤대녕이 살면서 다녀 봤던 곳들에 관한 이야기들 주로 묶어 놓았다.

그는 봄 또는 가을이 되면 훌쩍 떠나기를 좋아한다고 했다. 바다로 가서 낚시도 하고 산 중의 조용한 암사에서 지내기도 하고 거기서 그렇게 지내며 글도 쓰고 자연 속에서 정화를 한다고...살면서 이 곳 저 곳을 별로 다녀본 기억이 없어서 그런가 그가 언급한 곳 중 내가 직접 가 본 곳이 거의 없었다. 안 가 봤으니 상상력이 부족한 나로써는 그 곳의 풍광에 대해 한정된 것밖에 그리질 못했다. 참 심심하게 살아왔나 보다. 경험의 양이 중요한 것이거늘...뭐 그리 귀찮다고 집 근처를 벗어나질 못하는지...그처럼 절기따라 그렇게 살면 자유롭고 좋겠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작업실 밖에서 문득 들었던 딱따구리 소리에 마음의 안정을 찾았다고 한다. 보지는 못하고 듣기만 했는데도. 나 역시 그 소리가 들리는 듯 하다. 물론 나 역시도 본 적도 들은 적도 없지만.

그리고 제주도에 다시 한번 가게 된다면 제주도 해안도로 일주하기를 참고하여 다녀 보고 싶다. 고작 2번 갔다 왔으면서 볼 거 다 봐서 이제 볼 게 없다라고 생각한 나한테 뭔가를 느끼게 해 줄 것만 같아서이다. 난 회를 별로 좋아하진 않지만 윤대녕이 추천해 준 도근네 횟집은 꼭 가보고 싶다. 회를 무척이나 좋아하는 친구랑 같이 가면 되겠지...

"나는 왜 문학을 하는가"는 자신의 문학에 대한 이야기들을 엮은 것이다. 글 쓸 때 받는 스트레스가 복통으로 나타났던 일, 작가의 등단, 소설의 결말 부분에 대해 고민하다 우연히 만난 미당에게서 얻은 영감, 이야깃거리에 대한 아이디어를 얻게 되는 오대산 하늘 등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작가는 자신의 경험에서 많은 걸 끄집어내서 쓰나 보다. 당연한 거겠지만 지금까지 그리 인식하고 있질 못했었다. 작가의 삶에 대해 관심을 가져본 적이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이 산문집을 읽고선 그가 일산에서 살았던 것이 <못구멍>에, 정릉 근처 북한산이 <연>에게, 동갑내기 작가의 갑작스런 죽음이 <낙타 주머니>에, 제주도에서 산 2년이 <탱자>에 영향을 주었을 것이란 걸 알게 되었다. 작가가 쓴 글에는 어느 정도 자전적 요소가 들어갈 수밖에 없음을 새삼스레 깨닫게 되었다. 많은 것을 경험하고 사색해 보지 못하면 글을 잘 쓸 수 없겠구나...

하나 하나의 이야기마다 나의 삶을 되돌아 보게 해 주는 그런 것이 있었다. 그와 삶과 나의 삶을 연결지어 보기도 하고 내 속에 있지만 인식하지 못한 부분을 건드려 주기도 하고 사람과 자연과 우연과 인연에 대한 사념에 잠기게도 하였다. 무척 소중한 글들을 드러내 준 그가 참으로 소중하다. 문화라는 건 타인을 알아가는 과정처럼 어느 정도의 능동적인 자기 투자와 이해가 필요하며 그를 통해 자신의 가치와 삶의 깊이를 체험할 수 있다는(p.190) 그의 말처럼 그의 글을 음미할 수 있게 앞으로도 계속 건강하게 글쓰기에 힘써주길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