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는 일견 21세기는 문화와 역사의 시대인 것처럼 보이지만 상품의 논리가 지배하기 때문에 상품화하기에 적합하지 않은 문화와 역사적 요소는 소외되고 양극화 현상이 생겼다고 한다. 문화의 공간, 역사의 공간을 조성하면서도 문화와 역사가 중심이 되는 것이 아니라, 부수적인 요소에만 머물고 있는 현실을 안타까워하던 중 서울 역사에 관한 글을 연재해 달라는 부탁을 받고 글을 쓰게 되었고, 그 글들이 모여서 이렇게 책으로 나오게 된 것이다. 저자의 서문에 해당하는 ’책머리에’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문구는 "역사는 팔 수 없는 가치, 팔아서는 안 되는 가치도 있다고 말하고 싶었다. 당신들이 원하는대로 가공할 수 있는 역사는 없다고. 바다에 자갈을 던진다고 파도가 움츠릴 턱이야 없지만 그렇게 내뱉기라도 하면 답답한 마음이 조금 풀릴 것 같았다."(p.11)이다.

 

서울에 관한 역사책을 접해 본 적이 없어서 비교는 못해보겠지만, 읽고 보니 지금까지 접해 왔던 역사책과는 조금 다를 거라는 저자의 말이 수긍이 되는 책이었다. 이 책에 관심을 가지게 된 건 서울에 30여년을 살면서도 정작 서울에 대해 관심을 가져본 적도 별로 없고 아는 것도 그다지 많지 않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서울은 인구 천만이 사는데다가 거대하기 때문에 다른 지역 사람들이 자신의 지방, 고향에 대해 갖는 기분이나 느낌을 갖기가 어려웠고 활동반경이 지극히 좁은 탓에 같은 서울이지만 아직까지도 생소한 곳이 많다. 아마 죽을 때까지 살게 될 것 같은 서울에 대해 조금은 더 알고 싶은 마음에 읽기 시작하였다.

 

총 28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서울에서 유명한 장소에 해당하는 덕수궁 돌담길이나 분수대뿐 아니라, 땅거지나 무뢰배와 같은 사람을 다룬 것도 있었으며, 지금은 사라졌지만 당대 사회의 변화를 알 수 있는 공간의 역사인 제중원, 파리국 등과 물장수라는 우리나라만의 독특한 직업에 해당되었던 물장수에 관한 이야기도 있었다. 새롭게 알게 되는 사실도 있었고, 내가 어렸을 때 겪었던 기억을 떠올리기도 하고, 경험하지 못했던 그 시대의 생활상을 머릿속에 그려보기도 하였다. 

또한 이 책의 장점은 글의 내용을 시각적으로 단숨에 파악할 수 있는 사진의 활용과 덧붙여진 설명, 남발되지 않은 각주를 꼽고 싶다. 지면은 한정되어 있으니 어떤 사진을 넣을지도 무척 고심되는 부분일텐데 글과 유기적인 관계를 잘 유지하면서 사진만 봐도 어떤 내용일지 짐작이 가능하다. 그리고 각주는 지나치게 많아도 몰입을 방해하며 각주의 내용이 부실할 경우 없으니만 못한 경우가 있는데, 여기서는 독자가 가장 궁금해하고 조금 더 자세한 설명이 필요한 부분만을 선별하였다. 예를 들면 [제3 편: 정도전의 서울, 이방원의 서울]의 경우 경복궁의 배치도를 넣어 글로 표현한 중앙의 궁역과 궐역의 경계선이 한 눈에 파악되는 식이다. 글로만 읽었을 때와는 이해도에 있어 확연하게 차이가 난다. 사진의 배치와 크기를 비롯한 전반적인 책의 편집도 산만하지 않고 읽기 편하게 되어 있다. 이런 류의 책들에서 흔히 보이는 지나치게 줄 간격이 넓거나 공백이 넓은 것이 보이지 않아서 좋았다. 개인적으로 그러한 편집 형태는 부실한 느낌을 주어서 선호하지 않기 때문이다. 

인상적인 부분을 하나 살짝 소개하자면,

 제 5편: 뒷골목

 이里는 인위적으로 정연하게 구획된 가로와 필지로 구성된 도시 내 거주 공간을 지칭하는 표현이 되어야 맞는데, 다산이 동은 천하고 이는 귀하다 한 것도 이 때문이었을 것이다.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길은 무질서하고 어지러운데 그 이유는 서울은 인위적으로 조성된 계획 도시였는데 길을 다 닦기도 전에 관료들에게 택지를 나눠 주면서 나머지 길 닦는 일을 맡겼다. 문제는 새로 난 소로 좌우에 작은 집들이 들어서면서 발생하였다. 도선의 지리도참설의 영향으로 건물과 대문의 좌향에 대한 맹신적 태도가 길을 막으면서 집을 짓도록 만들었다는 것이다. 충분히 설득력이 있는 견해이다. 대중에게는 그러한 막연하고 단순화된 지식내지 속설이 존재하기 마련이고 원인이나 배경도 모른 채 믿고 따르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좋은 게 좋은 거라는 식으로 말이다.

사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나 동이 아니라, 그 때에는 고관대작의 집과 작은 집들이 같은 골목안에 있었다는 사실이다. 신분과 경제력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이웃이었고 공동체였기에 부자 나리들은 의무감보다는 연대의식을 바탕으로 굶주리는 이웃을 도와 주곤 하였던 것이다. 하지만 '끼리 끼리 모여 살기'가 보편화된 현재 우리는 갈등이 심화된 사회에서 살고 있다. 공동체라고 인식하지 못하고 자신의 처지와 상황이 조금만 달라도 이해하기보다는 배척해 버리는 것이 편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저자가 한 말이 의미심장하다. "공간과 장소를 공유해 보지 못한 아이들이 앞으로 무엇을 공유할 수 있을까."

서울에 살고 있거나, 서울에 대해 좀 더 깊게 알고 싶은 사람들에게 권하는 책이다.

기대했던 것보다 유쾌하게 읽었던 작품이다.

라이팅 클럽은 글짓기 교실을 운영하는 김 작가와 소설을 쓰고 싶어하는 딸 영인이의 이야기인데, 아무래도 부자를 다룬 것보다 내 입장에서는 훨씬 받아들이기가 쉬웠다. 게다가 글쓰기, 창작 활동에 대한 막연한 동경이 있어서 등장인물의 직업이 작가인 경우 마음이 자연스레 기운다.

 

물론 나는 소설과 같은 전문적인 글쓰기에 대한 강렬한 욕망을 가져본 적이 없다. 이 책을 읽는 내내 생각해 보았다. 영인은 뭘 그토록 토해 내고 싶었던 걸까. 처음 시작은 근원적인 외로움이 아니었을까 싶다. 가족이라고는 엄마 달랑 하나뿐인데, 그 엄마는 한동안 나를 친구집에 맡겨두고 같이 살지도 않았는데다가 여타의 엄마와는 전혀 다르게 모성 결핍자였으니 말이다. 의지할 곳은 없는 듯 하고 그러니 또래 아이들에 비해 빨리 어른이 되어야 한다는 심적 압박을 받을테고 빨리 연애를 하고 성경험을 한다든지 하는 여러 가지 시도를 해 보았지만 성공적이지 못했기 때문에 결핍이 안에서 축적되고 그 결핍을 메우려는 행위가 글쓰기로 표현된 것이 아닐까. 나의 경우를 생각해 봐도 일상생활의 글쓰기를 하고 싶을 때는 행복할 때보다 뭔가 짜증나거나 슬프거나 가슴에 울컥하는 뭔가가 있을 때인 걸 보면 말이다.

 

계동의 글짓기 교실의 모인 아줌마들의 글을 보면서 영인은 쓰레기같다고, 그런 글들을 모아 문집을 낸 것이 우스꽝스럽다고 폄하했지만, 그들이 자신들의 이야기를 쓰고자 했던 것은 엄마가 아닌 주부가 아닌 나를 찾는 과정이었을 것이다. 남들이 듣기에는 시시하고 별 재미도 없는 이야기일지는 모르지만 자신에게는 가장 소중한 단 하나뿐인 이야기일테니 말이다. 영인은 그 사실을 나중에야 깨닫게 되고 미국에서 한국으로 돌아와 김 작가의 뒤를 이어 계동의 라이팅 클럽을 맡게 된다.

 

이 작품에서 2가지가 인상적이었는데, 하나는 영인과 김 작가의 관계 설정이었고 또 하나는 계동의 글짓기 교실이 있던 골목길의 이미지였다.

여자는 모성을 타고난다거나 아이를 낳게 되면 모성이 자연스레 형성된다거나 하는 것은 김 작가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데, 딸인 영인의 입장에서는 억울할 만도 하다. 김 작가의 경우는 좀 극단적인 듯 하여 조금 조절이 필요해 보이지만 나는 이미 딸의 나이를 지나 엄마의 나이로 가고 있기 때문에 김 작가가 모성 결핍자인 점이 마음에 들었다. 기실 내가 아이를 별로 좋아하지도 않고, 모성이 부족한 여자를 이상하게 보거나 자신보다 아이를 먼저 생각하지 않으면 잘못된 것으로 보는 사회적 분위기가 거슬렸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날 사로잡았던 것은 계동의 골목길 이미지인데, 계동을 가 본 적이 없어서(사실 계동이라는 곳이 존재하는지 이 책을 읽고서야 알았지만) 내가 사는 동네의 넓고 정돈되었지만 심심한 분위기와는 사뭇 다르게 좀 더 소박하고 여유롭고 쓸쓸함과 따스함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듯 하여 끌렸던 것 같다. 정말 그 골목길에 '글쓰기를 사랑하는 계동 여성들의 모임'이 있을 것만 같다. 그리고 있었으면 좋겠다. 존재만으로 위안이 되는 장소가 있는데, 이 작품을 읽으면서 영인에게 계동의 글짓기 교실이 그런 장소가 된 것처럼 나에게도 그렇게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