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알았던 것을 그 때도 알았더라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회자되는 이야기이다. 많은 사람들이 지금 아는 것을 가지고 과거로 돌아가면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한다. 나는 지금의 기억을 가지고 돌아간다 해서 더 좋은 결과가 나올 것 같지가 않다. 인생에 비해 인간의 소견은 짧다. 앞에 있는 것만 겨우 내다보는 것이 대다수 인간이 수준이다. 바로 눈에 보이는 결과를 좋게 하는 선택을 했다하더라도, 큰 결과까지 좋아진다는 보장은 없다. 오히려 미래를 알고 선택을 하는 ‘편법’으로 인한 ‘업보’로 더 좋지 않은 결과를 맞이하지 않을까 한다.

 

‘이반 오소킨의 인생 여행’은 우스펜스키라는 신비주의자가 100 여 년 쯤 전에 쓴 소설이다. 이반 오소킨은 26세의 젊은 나이에 인생이 망했다는 생각을 하고 자살까지 생각한다. 그러다가 마법사를 찾아가 현재의 기억을 가지고 14살로 돌아가게 된다. 여기서 독자는 오소킨이 인생을 어떻게 바꿔나가고, 그 과정에서 어떤 결과를 얻을지 기대하게 된다. 어떤 것은 더 좋게, 어떤 것은 더 나쁘게 바뀌지 않을까 생각한다.

 

미래의 기억에도 불구하고 오소킨의 인생은 똑같이 흘러간다. 일종의 ‘인생이 꼬이기 시점’에 다다라 오소킨은 절대 그러지 않겠다는 결심은 당시의 충동과 욕망에 힘없이 무너진다. 하지않으려고 했던 행동의 결과 앞에서 상황을 더 좋게 만들려고 그가 선택한 방법 또한 과거와 무서우리만치 똑같다. 이는 나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겪는 일상을 떠올리게 하였다. ‘오늘은 ~했지만 내일은 ~하지 않아야지. 오늘을 ~하지 않았지만 내일부터 ~해야지.’ 등의 생각 말이다. 결국 생각만 매일 되풀이 될 뿐 행동은 별로 변하지 않는다. 그런 나날들이 켜켜이 쌓여 만들어지는 미래도 변함없이 고만고만하다.

 

결국 그는 26세가 되어 똑같은 상황을 맞이하고 다시 마법사 앞에 서게 된다. 오소킨은 과거로 돌아가더라도 인생이 더 좋게 바뀌지는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런 그에게 마법사는 인생을 바꾸려면 자기자신이 바뀌어야 한다고 말한다. 반복되는 삶에서 무언가 깨달은 자로서 15년의 수행을 거쳐 진리를 추구하는 삶을 제시한다. 그에 대해 오소킨은 우선 여행을 떠난 연인 지나이다를 만나보고 결정하기로 한다. 이것도 대다수의 많은 사람들과 같다. 제일 중요한 무엇보다 엉뚱한 일에 시간과 정신을 소모하는 것. 나중에 한다는 말은 계속 반복되는 것.

 

오소킨의 반복되는 삶, 반복되는 처음 2~3 단락을 읽다보면 묘한 느낌이 든다. 오소킨이 살면서 ‘이런 일을 겪었었는데?’하며 드는 느낌과 비슷하다. 계속 도돌이표속에서 흐르는 인생, 내 것인 것 같은데? 라는 생각이 든다. 소설의 끝부분이 오소킨이 명백한 해답을 내리는 것이 아니라 지나이다를 만나러 떠나는 진행형으로 끝나 마치 해답을 내려야 하는 당사자가 오소킨이 아닌 나인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이런 신비한 느낌은 소설을 다 끝마치고서도 한동안 계속된다.

 

내가 찾아야 하는 삶의 진리는 무엇일까? 마법사가 말한 수행은 왜 15년일까? 마법사와 오소킨의 마지막 대담을 더 읽으며, 살면서 의문을 풀어나가야겠다.

 

‘델리’라는 소설은 인도에서 가장 저명한 작가라 할 수 있는 쿠신와트 싱이라는 노작가가 남긴 소설이라고 한다. 그의 문학적, 역사적 역량을 한껏 발휘하여 델리의 600여 년의 역사를 담은 책이라 한다. 델리라는 도시 하나를 선정하여 600년의 역사를 서술한다는 뼈대 또한 대가다운 선택이라는 생각이 든다. 역사를 좋아하는 나로서는 반가운 책이었다.

 

델리를 펼치면 꼭 우리나라의 단군신화와 같은 인도의 창세신화와 온 몸이 붉거나 파란 신이 주인공으로 나오는 이야기가 먼저 나올 줄 알았다. 맨 처음 이 책에서 만나는 시대는 현대에 가까운 근대나 현대쯤이다. 주인공은 50대 저널리스트 겸 여행 가이드, 여자 주인공은 그가 좋아하는 자웅동체 창녀이다. 외국에서 귀국한 주인공이 말하는 델리는 사랑하지만 혐오하는 곳이다. 더러운 냄새, 더위, 툭하면 고장나는 기계들, 정신나간 문지기, 자웅동체 창녀, 그럼에도 유구한 역사를 품은 곳이다. 그래서 주인공은 사랑하지만 혐오스러운 대상이라는 점에서 델리와 자웅동체 창녀를 동일시한다.

 

매력적이라기보다는 이상한 남자 주인공과 여자 주인공이 나오는 이야기를 읽다보니 ‘델리의 600년 유구한 역사는 언제 나오지?’ 하는 생각에 목차를 봤다. 목차 제목에 역사적인 사건 사이사이에 자웅동체 창녀의 이름이 있다. 바그마티-불가촉천민-바그마티-아우랑제브 이런 식이다. 그러니까 바그마티라는 자웅동체 창녀의 이름이 붙은 부분은 현대, 세포이 항쟁 같은 이름이 붙은 곳은 해당 역사가 나오는 곳이다. 바그마티가 달리 하는 일이 없어도 현대 부분의 제목은 바그마티다, 남자 주인공이 어떤 여자를 만나던 염두에 두는 것이 바그마티라서 그런가 보다. 특이한 구성이다.

 

역사적 사실이 나오는 부분은 더 새롭다. 화자는 불가촉천민, 서기, 왕, 시인, 인도에 사는 영국 여성 등 다양하다. 지배층의 시선에서 일방적으로 정치나 전쟁에 대해 서술하는 것이 아니다. 역사적인 변동 속에서 다양한 사람이 자기가 겪은 입장에서 역사적 사건에 대해 서술한다. 유명한 작가인 만큼 문학적, 역사적 수준은 말할 것도 없다. 사건을 누구의 입장에서 서술을 해야만 역사가 된다는 법은 없다. 참 새롭고 재미있는 접근이었다.

 

‘델리’는 나같이 인도의 역사와 문화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보다 잘 아는 사람이 훨씬 더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책이다. 이 책에는 길고 이국적인 이름, 다양한 종교와 문화가 잘 섞여 이야기로 엮어져 나온다. 쟈 사한이나 아우랑제브와 같이 이름이라도 아는 사람이 나오면 읽기가 수월하고 재미있다. 그렇지 않은 부분은 머릿속이 혼란해진다. 힌두교? 이슬람교? 회교도? 친한 듯 혹은 적인 듯 과거부터 현재까지 엎치락 뒤치락하는 데서 정신을 못 차리겠다. 인도인이라면 정말 재미있을 것 같다. 나도 한국 역사 버전으로 이런 책이 있으면 자랑스러우면서도 참 재미있게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델리’는 어려웠으나 새로운 경험이었다.

 

인터넷 페이지를 넘기다 우연히 ‘샤오홍의 황금시대’라는 책을 알게 되었다. 표지에 실린 ‘긴 사랑의 여정을 떠나다’는 문구와 흑백 사진 한 장에서 시대에 희생된 불운한 여자 천재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샤오홍은 31세의 짧은 생에서 100여 권의 저작을 남긴 천재 작가이다. 우리나라에서는 널리 알려지지 않았지만 중국에서는 국민 작가쯤 되는 유명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샤오홍의 황금시대’라는 책을 펼쳤다.

 

이 책을 받고 놀란 것은 책 분량이 너무 적어서였다. 이 소설은 샤오홍에 대해 깊이 들어가지 않는다. 스스로 100여 권의 저작을 남겼고, 동료 문인들이 남긴 기록도 많을 텐데 다소 의아스러운 구성이다. 다만 유년 시절, 만났던 남자들, 루쉰을 순서로 소단원을 짜서 샤오홍이 애정결핍이었으며, 사랑에 목말라하는 과정만 주로 비춘다. 문학을 접하고 문학적 발전을 이뤄가는 과정, 생활에 찌들어 받은 고통, 건강이 쇠하는 과정, 샤오홍의 예민한 정신 등 샤오홍의 일생에서 중요하다 할 만한 거의 모든 것이 간단하게 생략되어 뜬금없이 진행되는 감이 있다. 샤오홍의 천재성만큼이나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 애정사에 대해 짧게 알고 싶은 분들께는 오히려 나을 듯하다. 샤오홍의 일대기를 기대하는 분들은 다른 책을 권한다.

 

샤오홍의 불행은 어디에서 기인한 것일까. 과거의 여러 천재 여성이 그랬듯이, 연약한 선지자였다. 그녀의 불행도 지나치게 앞서나간 여성에게 가해진 가혹한 테러에서 상당 부분 기인했다. 샤오홍은 당시 관습이었던 부모님이 정해주시는 결혼을 거부하고 안락한 삶을 박차고 나온다. 이것이 그녀가 본격적인 고생길로 들어가게 된 시작이었다. 결혼은 인생을 결정짓는 중요한 요소이다. 자신의 삶을 자신이 선택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이러한 인식은 여성을 억압하는 당대의 풍조에서는 지나치게 선구적이었다. 자신의 인생을 자신의 뜻대로 살아보겠다는 그녀의 뜻은 스무살도 되지 않은 나이에 족보에서 제명, 경제적 지원상실, 가족과 고향으로부터 영구히 격리되는 가혹한 징벌로 다가왔다. 경제적인 문제와 외로움에 허덕이던 샤오홍이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어려울 때마다 손을 내민 남자들이었고, 그녀는 그들의 무책임한 태도에 일생을 휘둘린다.

 

샤오홍은 매우 주체적이고 용감한 여성이었다. 자유로운 삶을 사는 현대 여성들 중에서도 어려운 사회생활을 접고 돈 많은 남자에게 ‘취집’을 가고 싶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녀가 집안에서 정해준 귀족자제를 선택했다면 안락한 삶은 예약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결혼을 거부하고 도망친 사건에서 그녀가 얼마나 고집이 세고 용감한지 알 수 있다. 또한 모든 친구들이 샤오쥔의 불륜과 폭력을 다 알면서도 유지하기를 권했던 관계를 끝내버리고, 두안무와의 새로운 삶을 선택한 것도 매우 용감한 결정이었다. 당시 많은 여성들은 집안에서 정해준대로 결혼하고, 남편이 학대한다면 둘 중 하나가 죽을 때 까지 견디는 삶을 살았을 것이다. 샤오홍은 여자에게 가해지는 관습과 주변의 시선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마음이 옳다고 생각하는 방향으로 살아간 사람이다.

 

샤오홍은 20대에 흰 머리가 생길 정도로 어려운 삶 속에서 100여 권의 저서와 찬란히 빛나는 이름을 남겼다. 자신을 괴롭히는 주변 환경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주관을 관찰해나갔던 그녀답다. 대신 그 치열한 싸움에서 소모한 것은 그녀의 생명력이었나보다. 책이 깊은 내용을 다루지 않아도 삶의 궤적만 봐도 짐작할 수 있었다. 샤오홍은 관습에 따라 무력하게 사는 것이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다. 샤오홍의 삶은 고통스러웠지만 그녀가 주체적인 선택을 하며 문학적 재능을 피워 올린 삶이었다. 범인은 따라가지 못하는 한 천재의 짧고 굵은 삶을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