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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허하고 메마르고 아무 쓸모도 없는 그 말들이 그녀를 몹시 우울하게 만들어서
때로는 자신도 그런 말들에 감염이 되어 말할 수 있는 모든 능력, 의미 있는
무엇인가를 말할 수 있는 능력을 빼앗기게 되는건 아닌지 두려웠다.
-p223

국회의원 엘리오 피오라반티의 부인 마야는 엘리오와의 결혼 생활이 이제 무미건조한것을 부인할 수 없다.
사랑하는 딸 카밀라와 뱃속에 자라고 있는 아이의 존재가 주는 기쁨과는 별게로 자신의
결혼생활은 결코 행복하지 않다.
상류층의 귀부인으로 보일지만 엄연히 인위적으로 포장된 모습일지도 모른다.
엘리오의 아들 아리스와 친구라고는 하지만 그 둘은 입에 담기조차 민망한 사이임을 알 수 있다.

5월 어느 날, 의문의 총성으로 시작된 스물네 시간의 대서사시 - 어느 완벽한 하루
책의 정보를 살펴봤을 때 내 호기심을 마구 자극하던 이 한 줄의 글 귀 때문에 많은 이 책에 대한 기대를
가졌던 것이 사실이다.
로마라는 거대한 도시 속에서, 어쩌면 퇴색해버린 도시에서 사는 사람들의 24시간을 엿보는 것만으로도
무언가 흥미로운 일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허나 예상과는 달리 작가의 배려심으로 보이지만 너무도 상세한 설명과, 조금은 과한 듯 한 그 배려로 인해
내가 받아들이기에 조금은 거부감이 들었던 것 같다.

정신과 치료가 절실히 필요한 엘리오의 경호를 맡은 경장 안토니오는 인간의 이중성을 내포하고 있다.
자신을 심복이라고 믿어주는 사람이 있지만 이젠 일이 없는 휴일도 그에겐 행복하지 않다.
사랑하는 아내 엠마와 딸 발렌티나, 눈엣가시 같지만 그래도 사랑하는 아들 케빈이 자신의 곁에
이제 더 이상 없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연인에 대한 애정은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고 광기어린 애증으로 발전한 그의 사랑이
좀 과하게 표현되자면 구역질이 날 정도로 불쾌했다.
육감적인 몸매와 남자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는 두 아이의 엄마, 하지만 실패해버린 결혼생활과
전 남편에 대한 감시가 두려운 약한 엠마.
부모의 이혼으로 열네살이라는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철이 들어버린, 비행 청소년 같아
보이지만 열네살 어린 소녀의 순수함도 갖고 있는 발렌티나.
눈에 반창고를 붙이고 스컹크라는 별명을 갖고 있는 발렌티나의 동생 일곱살 케빈.
이렇게 네명은 예전에는 평범한 한 가족이었다.
그렇지만 안토니오와 엠마의 이혼으로 한 가정은 파괴되고 점점 더 짙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사람들의 존경을 받고 있고 대통령의 신뢰도 얻고 있는 여자를 무척이나 좋아하는 엘리오.
스물 세 살 어린 나이에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뭔가에 이끌려 나이 많은 엘리오를 택하고 결혼한 그의 젊은
아내, 하지만 적어도 사람들 눈에는 귀부인으로 보였지만 적어도 그녀 자신은 자신이 얼마나
문란한지를 아는 마야.
엘리오와 마야의 사랑스러운 공주 카밀라.
엘리오와 전 부인 사이에서 태어난 남들과는 다른 삶, 다른 모습, 다른 가치관을 갖고 있는
자유로운 영혼 아리스.

발렌티나의 학교 선생님 사샤는 동성애자 즉 게이이다.
10년간 유부남과 연애를 해왔지만 학교에서는 조금은 고리타분하고 어수룩해 보이는 국어 선생님이다.
우연히 만난 발렌티나의 엄마 엠마와 함께한 몇 시간을 굳이 이야기 속에 포함시켰던 건
사랑이 없이 못사는 인간을 표현하고 싶었던 건 아닐까 작가의 속내가 궁금했다.

9명의 등장인물들은 2001년 5월 4일 로마에서 하루 동안 벌어지는 모든 이야기의 주인공이다.
한명 한명의 시각에서 그들의 심리를 대변하므로써 꽤나 안정적이고 자세하게 표현한 작가의 노력이
보이는 책이었지만 우울한 결말은 허망하기까지 했다.

자신의 아이들을 죽이고 자신도 죽음을 맞이할 수밖에 없었던 한 남자의 광기 어린 사랑을
이해하기 어려운 점은 부족한 내 포용력이 문제일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그러나 다시 비행기를 타게 되면 구름 밑으로 과거가 아니라 미래를 보고 싶었다.
미래는 아직 일어난 일이 아니기 때문에 너무나 아름다울 수 있었다.
-p450

과거 비행기를 처음 타고 신혼여행을 떠났을 때 엠마의 곁엔 사랑하는 안토니오가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떠올리기조차 싫은 과거의 한 사람이다.
지금 자신의 곁에서 평범한 대화를 나누는 사샤를 생각하며 꼭 그가 아니더라도 자신은 정말 사랑하는
사람을 만날 수 있을 거라는 막연한 기대감을 갖고 있는 그저 그런 평범한 여자 엠마의 속내가
드러나는 이 구절은 같은 여자이기에 느낄 수 있는 어떤 동질감을 갖게 한 부분이었다.

행복한 가정의 모습이 아니라
파국을 맞은 가족, 가정을 소재로 삼아
책의 설명처럼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흔한 이야기들로 그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소설이었지만
아직까진 따뜻한 온기가 더 좋은 나라는 걸 실감케 한 책이었던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