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읽어주는 남자』의 이야기 속 미하엘 베르크와 한나 슈미츠는 열 다섯살 소년과 삼십대 여성으로 만나 서로를 사랑하는 관계가 되었다. 이 책을 처음 읽었을 때는 미하엘과 한나의 관계가 정말 '사랑'이었을지 의아했는데 이번에 책을 다시 읽어보면서 진짜 사랑이었음을 깨닫게 되었다. 줄거리를 파고들게 하는 여러 사건들이 소설 내부의 깊숙한 것들을 놓치게 한 셈인데 다행히 나에게는 다시 읽는 기회가 주어짐으로써 둘의 사랑을 보다 더 자세히 들여볼 수 있었다.
먼저 미하엘과 한나의 이 이야기는 나에게 마그리트 뒤라스의 소설 『연인』을 떠올리게 한다. 그녀의 소설 『연인』에 등장하는 소녀와 중국인 남성의 관계가 미하엘과 한나를 연상시키기 때문이다. 서로 나이 차이가 많이 남에도 불구하고 소녀는 중국인 남성과 육체 관계를 맺는다. 그러나 소설 속 퇴폐적인 분위기 가운데 소녀는 중국인 남성을 깊이 사랑하지는 않는다. 소녀는 그저 욕망하는 것에 그쳤을 뿐이었다. 오히려 아버지를 극복하지 못한 중국인 남성이 그녀에게 이별을 고하며 사랑으로 흐느낄 때 소녀가 약간은 무심한 듯이, 그리고 너무나 덤덤하게 이별과 사랑을 동시에 받아들이는 모습에서 발견할 수 있다. 이 『연인』과 『책 읽어주는 남자』의 공통점은 사랑의 시작이 '욕망'이었다는 것이다.
미하엘이 곤경에 처해 있었을 때 한나가 도와주었고, 그 과정에서 우연히 포착하게 된 한나의 에로틱한 모습에 강렬한 충격을 받는다. 그녀를 욕망하는 상태에서 도움을 준 은인에 대한 감사표현의 이유로 다시 찾아가게 되었고 그의 욕망을 알아챈 한나와 육체적 관계를 맺는다. 한나 또한 미하엘의 욕망을 미하엘의 육체를 성적 쾌락의 도구로써 욕망했던 것이다.
그렇지만 그 둘의 관계는 결코 평등하지 않았다. 미하엘의 첫사랑 상대였던 한나를 그는 열렬히 숭배하며 그녀의 모든 것을 좇으려 했지만, 그때마다 한나는 거부와 단절의 태도를 보이며 미하엘에게 좌절을 주었다. 한나와의 관계가 끊어질 것을 두려워한 미하엘은 그럴 때마다 항상 먼저 모든 것이 자신의 잘못이며 용서해달라고 부탁했고, 그때서야 한나는 그를 받아들여 주었다. 따라서 미하엘과 한나의 갈등은 상호관계에 있어서 우위를 재확인하는 과정이 되었던 것이다.
"'내 생각으로는?' 너 네가 내 마음을 아프게 한 것 같다고 말하려는 거지? 넌 내 마음을 아프게 할 수 없어. 넌 그렇게 할 수 없어. 이제 제발 좀 가줄래? 난 일하고 왔어. 목욕하고 좀 쉬고 싶어."
p.67
후에 한나가 미하엘을 떠났을 때, 그는 다른 여자들과의 관계에서 이전처럼 굴욕적인 위치에 서고 싶지 않았다고 1인칭 시점으로 말하기도 했지만 한나가 그를 사랑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너에게선 전혀 상처받을 수 없다고 말했지만 실제 상처받은 듯한 그녀의 모습에서 그에 대한 사랑을 느끼며 행복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왜 한나가 그와의 관계에서 자신의 권력을 확인하고 싶어 하는지, 그리고 때때로 보이는 이상 행동에 대한 이유를 알지 못한다. 그리고 그녀에 대한 막연한 죄책감을 지니고서 살아가는 동안 그의 평생에 드리워진 한나의 그림자를 느낀다.
한나에게는 다른 이들에게 절대 밝힐 수 없고, 따라서 영원히 회복할 수 없었던 열등감이 자리잡고 있었다. 바로 그녀의 문맹이다. 한나는 이 치부를 밝히지 않기 위해 승진을 제안하는 직장과 미하엘을 떠나고, 짓지도 않은 죄까지 떠안아 범죄자가 되는 것을 택한다. 미하엘은 한나의 선택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수감중인 한나에게 책을 읽어주는 녹음 테이프를 보낸다. 아무런 말도 덧붙이지 않고서 오직 텍스트에 대한 내용만 담겨 있는 것이었다.
한나는 미하엘이 보내온 것들을 무척 좋아했고 그에게 감상을 보내기 위해 문맹을 극복하고자 노력했다. 다른 사람에게 그 치부가 까발려지는 것을 감수하고 말이다. 이와 같은 모습에서 나는 한나가 미하엘을 정말로 사랑했음을 알 수 있었다. 한나는 사랑하는 미하엘과 무엇인가를 나누기를 바랐다. 감옥에서 의욕적으로 다른 사람들의 믿음을 얻었던 그녀가 변화가 두려워 삶을 끝낸다는 선택을 하진 않았을 것이다. 미하엘의 태도에서 비어있음을 느끼고, 그에게서 편지가 오지 않았을 때 자신을 놓아버린 것처럼 공허를 느끼고 극단적인 결정을 내린 것이다.
뿐만 아니라 한나의 배경에는 나치와 1945년의 정치적 상황이 반영되어 있다. 그녀로서는 철저히 무지했기 때문에 그 순간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을 한 것일 테다. 후에 언어를 습득하고 나서야 그녀는 그 행동의 의미를 알아내기 위해 관련 서적을 탐독했고 그때 비로소 알 수 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그 행동을 '죄'로 판단한 법정과 그 결정에 대해 미하엘은 곱씹고 탐독한다. 그 과정은 읽는 사람들에게도 그의 물음에 답해보면서 함께 고민하게 만든다. 그 고통을 겪어보지 않은 자는 절대 이해할 수 없듯, 겪어보지 않은 세대로서는 쉽게 판단할 수 없기에 그만큼의 무게를 지닌다. 한편으로 유대인들을 핍박했던 감시자격의 사람들-한나와 같이-에 대한 생환자의 입장이 잘 드러난 것으로는 아우슈비츠 생존자인 프리모 레비의 자살하기 전 유서와도 같았던 마지막 서적인『가라앉은 자, 구조된 자』의 이 구절들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이러한 변명을 읽는 사람이 맨 처음 보이는 반응은 몸서리나는 혐오감이다. 그들은 거짓말을 하고 있다. 사람들이 자신들을 믿어줄 거라고 생각할 수 없다, 자신들이 야기한 죽음과 고통의 어마어마함과 늘어놓는 변명 사이의 불균형을 못 볼리 없다, 그렇다, 그들은 속이는 줄 알면서 속이고 있다, 따라서 그들은 악의적이다.
이제, 세상일에 대한 충분한 경험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선의와 악의의 구별(언어학자들은 대립이라고 할 것이다)이 낙관적이고 계몽주의적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구별이 방금 언급한 사람들과 같은 이들에게 적용된다면 더더욱 그러하고, 더 타당한 이유로 그러하다. 정신적인 명료함은 소수의 것이다. 또한 그 소수조차도 어떤 이유에서든지 간에 과거나 현재의 현실이 그들 마음속에 불안이나 불편함을 불러일으킬 때에는 즉시 그 명료함을 잃게 된다. 선의와 악의의 구별은 바로 이러한 정신적 명료함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조건에서 냉담하게 현실 그 자체를 변조함으로써 의식적으로 속이는 사람도 있지만, 닻을 올리고 일시적으로 든 영원히든 원래의 기억으로부터 멀어지면서 편리한 현실을 만들어내는 사람들이 더 많다.
p.27
결국 인간은, 덜 믿음직스럽거나 서로 앞뒤가 맞지 않거나, 입수한 사건들의 큰 그림과 양립할 수 없는 세부 사항들을 여기저기 갈고 다듬으면서 자신이 거듭 반복해온 그 이야기를 완전히 믿고 만다. 처음의 악의는 선의가 되어버렸다. 거짓으로부터 자기기만으로의 소리 없는 이행은 유용하다. 선의로 속이는 사람은 더 잘 속이고 자신의 역할을 더 잘 연기하며 판사에게, 역사에게, 독자에게, 아내에게, 자식에게 더 쉽게 신뢰받는다.
p.28
이 구절들을 읽으면서 마지막 한나의 유언에 따라 유품을 건네받은 딸의 입장과 묘한 연장선상에 놓여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비록 그 행동의 의미를 다 몰랐다고 해도, 생환자의 입장에서는 한나가 죄가 없다고 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녀가 몰랐기 때문에, 생존하기 위해 어쩔 수 없다고 한다면 생환자들은 분노할 것이고 그만큼 상처입을 것이다. 그래서 더 어려웠다. 그 과정을 거치며 이 책은 정말로 많은 것을 다루고 있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상대를 욕망하는 것, 오직 그에 지나지 않는다면 그 사랑의 진위 여부를 의심해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미하엘과 한나의 관계에 있어서는 그 시작이 욕망이었음에도 그 이상의 의미를 바랐기 때문에 그 둘은 사랑이 아니었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미하엘과 한나 사이의 짙은 사랑 이야기, 그리고 개인적인 사랑과 사회적인 역할들이 이루는 정치적 관계로 인간의 삶에 있어 심층적인 단면들을 담아낸 소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