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한의 모닥불]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해방 직후부터 여순사건이 발생하기 전까지 전라도 벌교지방에서 일어났던 이야기를 중심으로 한 이야기가 끝이 났다.

한국 근대사에 대한 이야기는 학창시절 교양시간에 한 학기 동안 수업을 받은 적이 있었다. 그 때 읽었던 책이 한겨레 신문사에서 발간 된 [대한민국사]이란 책이었다. 그 때가 아마도 한국 근대사에 대해서 처음으로 깊게 생각했던 시기였을 것이다. 누군가들에 의해서 저 어두운 땅 속 깊이 묻혀져 있던 이야기들은 내 가슴을 울렸다. 그 시대에 억울하게 죽어간 사람들의 울음은 내 머리를 혼탁하게 만들었다. 태백산맥 1부의 이야기는 그 몇년 전의 감상을 시간을 넘어 고스란히 나에게 되돌려 놓았다.


 ’손승호는 아무 할말이 없었다. 서민영 선생의 말 앞에서는 언제나 그랬다. 논리적이기에 앞서 교훈적이고, 설득적이기보다는 대화적인 그분의 말에 이의를 제기할 수 없이 압도되는 것은 -설득되는 것이 아니라 분명 압도였다- 그분이 가진 진실의 힘 탓이었다. 자신이 공산주의에 등돌리게 된 것도 그분의 영향이 컸음을 손승호는 자인하고 있었다. "하늘이 세상만물을 창조하실 때 상호간에 조화와 균형을 이루며 생존해나갈 수 있는 질서와 지혜를 주셨지. 그 질서를 인간의 말로 하자면 먹이사슬이고, 지혜는 동면을 위한 영양섭쉬나 갈무리가 되겠지. 그런데, 만물 중에서 유일하게 하늘의 뜻을 거역한 존재가 일찍부터 있었어. 그게 바로 인간이야. 하늘이 내린 지혜를 활용하되 탐욕적 이기를 채우는 무기로 악용하기 시작한 거야. 인간의 역사란 탐욕을 채우기 위해 지혜를 악용해가며 인간끼리 살육을 되풀이해온 기록에 불과해. ... 중략... 그런데 인간은 어떤가. 다음해 봄까지가 아니라 자신의 평생을 위해, 그것만으로도 모자라 자손대대로 이어질 갈무리를 하고자 탐욕한 것이야. ... 중략... 인간이 탐욕과 자만을 버리지 못하는 한 제아무리 새로운 주의나 사상을 내세워도 거기에는 또 다른 모순과 불합리를 내포하게 마련이야. ... 중략...’


그 시절의 이야기는 서글픈 감상만을 불러 일으킨다. 내가 태어나기도 훨씬 전의 일이건만 여전히 그 시절의 이야기는 그 부조리함으로 내 무력함으로 서러운 감상만을 불러 일으킨다. 사상은 무엇일까? 그것에 대한 진지한 이야기가 1부에서는 가득하다. 민족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어떤 길을 가야 하는가? 이런 물음들을 쉼없이 던지며, 이야기 안의 인물들은 고뇌한다. 그것은 요즘 대두되는 일상과 개인에 대한 이야기가 아닌 국가와 민족에 대한 이야기다.

1부에서 쉼 없이 등장하는-아마도 이 책의 마지막까지 쉽 없이 등장하리라 예상되는- 가족의 이야기, 어머니의 이야기, 아버지의 이야기, 아내와 아이들의 이야기는 내 정서를 자극했다. 그것은 내가 한국 사람이기에 너무나 당연히 느껴지는 그런 정서의 무게였다. 가족과 삶에 대한 이야기.

이제 산맥의 초입을 넘어섰다.중반으로 넘어가기 전에 잠시 숨을 가다듬어야 할 듯 하다.

2권부터 이야기가 슬슬 달리기 시작한다. 사람들의 한과 감정은 그 흐름이 졸졸 흐르는 시냇물에서 거칠게 흐르는 계곡의 초입에 도달한 느낌이다. 다른 말은 일단 제쳐두고 ’재밌다’. 글을 엮어 나가는 조정래씨의 글솜씨는 속도감이 정말 정확하다는 느낌을 받는다. 조금은 느리고 설명이 많은 완곡어법을 구사하는 것 같지만, 점점 글을 읽다보면, 마치 헐리웃 영화처럼 극적인 장면에서 컷아웃되고 다른 장면으로 넘어가는 듯한 부분이 종종 눈에 띄면서 호기심을 자극한다. 덕분에 책을 손에 쥐면 쉼없이 읽어나가게 되는 매력이 분명 있다. 아직 산의 초입일 뿐이지만 왠지 산을 오르는 길이 즐거울 것 같다. 앞으로 한 2주 정도는 일상이 무료하지는 않을 듯한 예감이 들기 시작했던 2권이다.

사실 흐르는 이야기에 별다른 사건은 없는 편이긴 하다. 조선이라는 나라가 겪어야 했던 근대사에 대한 서글픈 작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주된 내용이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그 속에서 사람들이 만들어가는 소소한 삶의 단편들과 거기에 부합되는 역사의 강줄기는 잘 버무려진 골뱅이 같다고나 할까 -_-; (참 비유가... 애주가 답다.)

어제는 내 손에 든 책을 본 어떤 영문과 후배 녀석이... 그럼 ’토지’는 읽으셨어요? 라는 물음을 던졌다. 한국인이라면 읽어야 한다는 말을 또 들었다. 음... 다음 달에는 토지를 잡아야 하나라는 생각이 불현듯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는... 쩝

오늘은 잠들기 전에 일단 산이나 좀 더 타야겠다. ㅋ

태백산맥.
누군가 나에게 그랬다. 이 책을 읽으면 그냥 내가 한국인인 것을 알게 된다고, 그 말의 의미가 궁금했다. 그래서 책을 읽기 시작했다. 조정래씨의 태백산맥 현재까지 수 십만권이 팔린 최고의 베스트 셀러. 그런데 1권을 마치고 사실 난 잘 모르겠다. 책이 재미없지는 않았다. 해방 직후 격동의 시대를 살아간 몇몇 인물들의 이야기가 얽히고설켜 여러 사건들이 흐르기 시작하는 1권은 그 갈등들이 아직 고조를 이루지 않았음에도 충분히 높은 가독성을 제공한다.

하지만 아직은 잘 모르겠다. 해방 직후 혹은 전쟁 직후의 혼란스러웠던 한국 근대사를 엮은 책들은 몇권 보아왔었다. 이 책도 그와 크게 다르다는 느낌을 아직은 받지 못했음이리라. 고정적인 한국인의 정서. 수탈과 핍박의 역사를 대변하는 가난한 사람들의 억눌린 한. 서서히 이야기에서 배어져 나오는 것은 그러한 너무나 한국적인 '한'이 섞인 이야기일 뿐이었다.

아직 이야기의 시작을 읽은 것 뿐이기 때문에 속단은 금물임을 상기한다.

그냥 격동적이었던, 그리고 타국의 힘으로 이루어진 해방은 많은 해결되지 못하는 문제들을 낳았고, 그 문제들은 결국 더욱 부조리한 사회구조를 낳았다. 그것은 지금까지도 해결되지 못했고, 앞으로도 해결되지 못할 것이다. 지금의 정치구조를 보고 있으면, 새삼 예전의 사람들과 지금의 사람들, 예전의 지주와 지금의 정치인들이 하나도 다를 것 없음에, 인간에 대한 실망에 버거워할 뿐이다.

앞으로 어떤 이야기가 전개될지, 각각의 계층들을 대변하는 이 글의 주된 인물들이 어떻게 그 갈등을 엮어갈지 궁금하다. 무엇을 해결해 줄지, 아니면 어떤 희망이라도 던져줄지, 그것을 기대해 본다.

그럼 2권을 읽으러 가봐야 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