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00년대 후반에 쓰여진 연기 이론서.
배우는 감성이 예민한 사람들을 위한 직업인 것처럼 인식되어 있었다. 그 날카로운 감성이 타인의 고통을 실제 내 몸에 느끼게 해주고, 그 도취된 감정으로 나와는 다른 삶을 산 인물을 연기 할 수 있게 해준다고 사람들은 생각한다. 하지만 이 책의 저자 디드로는 그것은 일반인들의 지극히 잘못된 상식이라고 피를 토하며 역설한다. 배우는 끊임 없는 관찰과 반복되는 연습을 통해서 그 경험을 상상하고 가정할 수 있어야 한다고, 그래야 그 연기는 지속적일 수 있고, 더욱 냉철한 지성 위에 확고히 바로 설 수 있다고 주장한다.

어느 정도는 맞는 말일 것이다. 특히 어떤 장면에서 자기 안의 감정에 완전히 몰입되어 관객에 대한 전달은 뒤로한 채 자기 감정의 해소만을 이뤄낸 뒤 마치 좋았던 연기인양 뿌듯한 눈빛으로 객석에 시선을 던지는 배우들을 볼 때 그런 배우들에게 냉정한, 자기 자신을 관찰 할 수 있는 지성을 겸비해라는 말은 나도 꼭 던져주고 싶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디드로는 그 모든 연기의 해답을 감성이 완전히 배제 된 지성에서만 찾으려고 했다. 연기의 모든 것들이 감성에 의한 동화가 아닌 지성에 의한 모방이고 묘사여야 그것이 배우의 훌륭한 연기라고 말이다. 여기서 나는 조금 갸웃했다.

다양성을 너무나 존중하는 포스트 모더니즘의 세계에 살고 있는 우리들은 시험을 볼 때 어떤 시험이든지 객관식 문제의 보기에서 "절대"나 "모든"이 들어가는 보기는 의심의 눈초리를 던져라 라는 요령을 터득하고 있다. 당연히 지적인 연기의 극단을 추구하는 디드로의 주장도 이런 의심스런 눈초리를 피해 갈 수는 없었다.

디드로가 살았던 시대는 1700년대다. 종교에 억눌려 있던 모든 예술들이 르네상스를 거치면서 태동하던 시기였을 것이다. 이전까지 있어왔던 연극에 대한 의문이 고개를 들기 시작하면서 디드로도 동일한 고민을 시작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1700년대에 있었던 연기에 대한 고민이다. 그리고 연극은 이미 그 시대 이후 수많은 천재들을 만나면서 다양한 변화를 시도해왔다. 그래서 지금 디드로가 쏟아내는 지적인 연기에 대한 찬미는 조금은 색이 바랜 느낌을 주게 된다.

물론 다음과 같은 말은 어느 시대를 불문하고 배우가 간직해야 할 마음가짐을 일깨우기도 한다.

’결국 배우의 재능을 완성시키는 것은 타고난 목소리나 섬세함뿐 아니라 "인간의 마음과 세상의 관례에 대한 지식"으로부터 자신이 모방해야 할 모델을 머리에 설정하고 꾸준한 노력과 폭넓은 경험 등을 통해 그것에 근접해가려는 노력과 의지이다. 그러므로 좋은 연기란 감수성 자체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외적인 신호들을 얼마나 잘 파악하고 숙지하고 표현해내느냐에 달려 있다.’

결국 책을 읽고 나오는 결론은, 참고할 부분은 참고하면서 비판의식을 가지고 읽자라는 뻔한 이야기 였다는...

세익스피어의 리어왕을 원작으로 훨씬 더 강렬한 표현과 정치적인 색깔을 물들여 재탄생한 에드워드 본드의 리어(Lear)는 원작과는 많은 다른 느낌으로 머리를 채웠다. 많은 표현들에 있어서 세익스피어가 가지는 문장의 아름다움이나 복선, 은유, 단어의 상징성들은 다소 약해진 느낌을 준다. 하지만 그 상황이 가지는 정치색이나 대화 등은 더욱 사실적이고 현실적으로 다가온다.


’ 아 자네 생각은 알고 있어! 닳아빠지고, 천박하고, 거칠고, 편협하고 잔인한 것에 대해서는 무조건 자비나 연민이 없는 - 그게 바로 자네 생각이고 또 그걸 자랑하고 있는 거지! 착하고 품위 있고 정직학 올바르고 질서를 믿고 법을 잘 지키는 자네는 - 마지막 인간이 죽을 때, 그를 죽이려고 할 거야! 난 살인자들, 자객들과 같이 살아왔네. 그들의 탐욕과 폭력에는 한계가 있으나 너희 품위 있고 정직한 인간들은 지구를 삼킬 거야!’
- 4막에서 ’리어’의 대사 -

이 대사는 표리부동한 의원에게 리어가 던지는 대사다. 리어는 권력에 기생하며 사람들의 피를 빨아먹는 의원에게 그가 가지는 폭력성과 이기주의에 대한 독설을 퍼붙는다. 이런 현실 인식과 사회에 대한 비판은 세익스피어의 ’리어왕’이 가지지 못하는 현실에 대한 문제의식을 나타낸다.


리어가 추구했던 이상은 그 자신에게는 의미있었고 아름다웠는지 모른다. 하지만 그가 택했던 폭력이라는 방법은 여러 사람을 거치며 돌고 돌아 결국 리어 자신에게로 돌아온다.

’어쩌란 말이냐? 감옥을 부수고 열쇠를 망가뜨렸어. 그러나 아직도 죄수 신세야. 언제나 머리를 벽에 박고 있어, 사방이 벽이야. 벽에 생매장돼 있으니. 이 고통과 처참함이 영원히 계속 될 것인가? 아무도 살 수 없는 사막을 만들기 위해 폐허를 건설하고 이 목숨들을 낭비해도 된단 말인가? 그걸 나에게 설명해 주는 사람도, 내가 정의를 위해 구걸할 사람도 없어. 난 늙고 이제는 사는 방법을 알아야 하는데, 아무것도 몰라, 아무것도 할 수 없어, 나는 쓸모없는 인간일 뿐’
- 4막에서 ’리어’의 대사 -

리어는 절규한다. 그가 행사했던 폭력들이 결국 다시 나에게 돌아오는 과정에서, 그가 잃어버렸던 가족과 이상에 대해서, 그가 추구했던 모든 것들이 결국 먼지로 화하고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던 현실에서. 그는 아마도 울며 절규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결국 아무것도 그의 곁엔 남지 않았다. 그리고 그것은 그가 마지막 순간에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하나밖에 남지 않은 방법이었을 것이다.

'난 비극을 쓰는 것이 아니다. 단지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쓰는 것 뿐이다.' 라고 했던 아서 뮐러의 말처럼.


개인적으로 노골적이고 사회적인 희곡을 별로 좋아하지는 않는 편이다. 하지만 이 거친 표현 속에서 작가가 변화시키고자 했던 사회와 사람들에 대한 애착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끝 맞은 조금 쌉싸름 하다.

2부부터 지워지지 않고, 씻겨지지 않은 오랜 된 가난과 한에 대한 이야기들이 진득하게 시작된다. 6.25가 일어나기 전까지의 시기들을, 작가는 머릿말에서 전쟁이 일어날 수 밖에 없었던 문제들을 되짚어 본다고 했다. 너무나 부조리했던 사회와 시기.

얼마전 우연찮게 프랑스 혁명에 대해서 쓴 어느 사회학자의 글을 접할 기회가 있었다. 사실 이공계생인 나에게 프랑스 혁명은 왠지 엄청난 사상이나 예술, 그리고 인간성에 대한 예찬이 뒤를 이을 것 같다는 느낌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나중에 알게 된 것은 그 혁명도 농민의 배고픔이 그 밑바탕이라는 사실이었다. 결국 배고프고 살아가기가 너무나 힘들기 때문에 혁명이 일어나는 것이란 걸, 혁명은 이념도 이상도 꿈도 아닌 현실로 인해서 일어나게 된다는 것을 알았다. 아마도 이 시기가 그런 혼란스런 시기였으리라.

배고픔은 그것을 겪어보지 못한 사람에게는 아마도 알 수 없는 서러움일 것이다. 그런 안쓰러움이 4권에서부터 좀더 절실하게 다가오기 시작한다. 1부가 지주와 농민, 사회주의와 일제의 잔제들이 횡횡하는 사회를 묘사하는데 중점을 두었다면, 2부는 그런 작은 사람들의 고난과 생활과 일상을 보여주는 데  좀더 중점을 두는 것 같다. 5권을 마저 읽어보아야 할 것이지만.

4권은 재미보다는 사람들의 배고픔이 왜그렇게 안쓰럽게 다가왔는지, 쩝 괜히 씁쓸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