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일본의 소설가인 에쿠니 가오리의 작품을 좋아한다. 누차 말하지만 그녀의 작품에는 불륜이 자주 소재로 사용되고 나는 그 불륜을 즐긴다. 아주 느긋한 마음으로 제3자의 입장에서 분석하며 그들의 사랑이 어느 순간 시작되었는지를 파악하며 그들의 인생이 어떻게 달라질까를 상상하며 즐긴다. 만약 누군가 사강의 소설들이 이런 느낌으로 읽힌다는 것을 나에게 알려주었다면 나는 좀 더 일찍 사강의 작품을 읽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내가 무엇을 두려워해야 하는데? 베르트랑이 나를 죽이지는 않을 거고, 프랑수아즈는 나를 떠나지 않을 거야. 너는 나를 사랑하지 않을 거고. 107p

 

이 한 문장이 이 이야기의 모든 것을 말해준다. 이루어져서는 안되는 만남이다. 베르트랑과 도미니크. 둘은 풋풋한 청춘이다. 베르트랑이 삼촌 뤽을 만나러 가는 길에 도미니크가 동행을 한다. 뤽은 아내 프랑수아즈와 함께 산다. 둘 사이에 아이는 없다. 네 명의 남과 여. 결코 이루어져서는 안 되는 사이. 조카의 여자친구와 삼촌. 그 관계가 온전하리라는 것을 믿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뤽조차도 도미니크를 만나면서 저렇게 말을 하지 않는가. 자신의 조카가 자기를 죽일 리 없고 아내는 자신을 떠나지 않을 것이며 한참 어린 도미니크가 자신을 사랑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이다. 그렇다면 지금 뤽과 도미니크의 관계를 무엇이라 정의 내려야 옳은가.

 

 

지금까지는 좋은 남편의 본보기였어. 하지만 이제는 분별력을 잃고 방황하는 비둘기가 되었어. 121p

 

첫눈에 사랑에 빠진다고 말을 한다. 그것이 가능한지는 모르겠다. 사람은 자신이 직접 경험해 보지 못한 것에 대해서 장담은 할 수 없으므로 말이다. 누군가가 그런 경험을 했다고 하니 그럴 수도 있는가보다 하고 생각만 할 뿐이다. 그렇다면 그런 첫눈에 빠진 사랑의 유효기간은 얼마나 갈까. 아니 처음부터 안 되는 사랑인줄 알고 시작한 만남은 얼마나 유지가 될까. 또한 불륜에 빠진 남편을 보는 아내의 심정은 어떨까. 그 모든 것을 알고서도 남편이 다시 자신에게로 돌아와주기만을 바랄까.

 

어떻게 보면 가장 힘들고 불상한 것이 프랑수아즈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자신의 남편은 젊은 여자와 바람이 나서 일주일 간 아니 연장을 했으니 그보다 더 긴 시간 동안 여행을 떠나버렸으니 말이다. 자신 또한 그 시간에 집에 있지 않았기에 모를 수도 있건만 여자의 감이라는 것이 그렇게 무디지는 않다. 프랑수아즈는 모든 것을 알고도 뤽이 말한 것처럼 그를 떠나지 않을까. 

 

젊은 날엔 젊음으로 모든 것을 다 극복할 수 있다고 한다. 나이가 들면 조금은 더 현명해진다고들 한다. 사랑에 있어서도 그것이 가능할까. 미친 사랑이라는 것을 실제로 존재할까. 로미오와 줄리엣 효과처럼 주위에서 말리면 말릴수록 그 둘은 더욱 뜨겁게 불붙게 될까. 청춘은 지난 지 오래고 이제는 세상의 모든 이치를 좀 안다 싶은 나이에 이르렀음에도 불구하고 사랑은 여전히 내게 어렵다. 풀지 못할 미지의 영역이다. 언젠가 나는 정말 제대로 된 사랑을 할 수 있을까. 누군가에게 어떤 미소를 보낼 수 있을까.

늘 그랬듯이 후기를 먼저 읽는다. 작가 후기가 될 수도 있고 번역자가 있는 경우는 역자 후기가 될 수도 있다. 후기는 때로는 스포가 될 수도 있다. 그런 걸 감안하면서도 먼저 읽는 이유는 혹시라도 내가 잘못 이해할 수 있는 실수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함이다. 특히 문학 작품의 경우가 그러하다. 만약 역자 후기를 먼저 읽지 않았다면 나는 이 책의 구성이 왜 이렇게 되어 있는 줄도 모르고 주인공이 누구인지 어디서 누구의 시점으로 인칭이 변하는지도 모르고 헤맸을 것이 틀림없다. 후기의 첫문장에서 밝히고 있듯이 이 책 참 독특하다.

 

후기에서는 '에세이소설'이라는 신종 장르를 만들어 놓았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이 이야기는 사강의 실제 이야기인 에세이와 그녀의 작품 속 주인공이었던 세바스티앵과 엘레오노르가 등장을 해서 자신들만의 이야기를 펼치고 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분명히 나뉘어져 있지만 남매의 이야기를 하다가 자신의 이야기를 할 때도 있고 그러다가 '다시 나이트클럽으로 돌아가자.'면서 원래 소설 속의 주인공이 있던 그 배경으로 돌아가기도 한다. 그 경계는 뒤로 갈수록 모호해져서 나중에는 사강과 그 남매가 함께 있는 그런 장면을 그려내기도 한다. 작가만의 새로운 시도는 이토록 혼종이면서도 신선함을 더했다. 그녀이기에 내린 과감한 선택일수가 있겠다.

 

쓰려고 하는데 써지지 않는 것은 절정 없이 나누는 사랑, 마셔도 취하지 않는 술, 목적지에 도달할 수 없는 여행과 같다. 그것은 지옥이고, 실패다. 100p

 

작가라고 언제나 글이 잘 쓰여지라는 법은 없지 않은가. 그런 힘듦과 불안함을 아주 잘 드러내는 문장이라 할 수 있겠다. 우리나라 식으로 하면 팥 없는 찐빵이자 고무줄 없는 빤쓰와도 같은 그런 느낌이려나. 자신이 쓰고 싶지만 글이 나오지 않을 때의 그 고통은 오로지 작가만이 느낄 수 있는 그런 고통이리라. 지옥이자 실패라고 적어 놓은 문장을 보는 순간 그 안타까움을 위로해주고 싶다. 역자 후기에 보면 실제로 6개월 간 아무것도 쓰지 못했다고 하니 실제로 작가가 직접 겪은 절망에서 끌어 나온 그런 문장이리라.

 

소설 속의 이야기는 한 남매의 삶을 따라간다. 그들이 만나는 사람 그들이 머무는 곳 그들의 일상 그런 모든 것들이 잔잔하게 흘러가고 있다. 그런 중간 중간 작가의 일상이 섞이는 것이다. 물과 기름같이 동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경계가 잘 어울리는 물 위에 뜬 오일 페인팅 같은 그런 느낌이려나. 그대로 잘 걷어낸다면 한 폭의 멋진 작품과도 같은 그런 색들의 조합이다. 뚜렷한 형체를 보이지는 않으면서도 그 자체로 환상적인 그림 말이다. 형이상학적이면서 추상적인 그림을 생각하면 되려나.

 

세바스티앙과 엘레오노르가 등장하는 사강의 희곡인 <스웨덴의 성>을 읽어보고 싶어졌다. 남매는 그 희곡 속에서는 어떤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을까. 이 작품 속에서처럼 조금은 나른한 같은 모습으로 그려질지 도는 전혀 다른 모습을 드러낼지 같은 사람의 다른 모습을 비교해 보는 것도 동일한 주인공이 다른 작품에 나오는 것을 읽는 재미일 것이다. 나는 아직 사강의 첫 작품인 [슬픔이여 안녕]을 읽어보지 못했다. 다섯 권의 전집을 읽고 나면 그 작품을 읽을 수 있을까. 이제 나는 프랑스 문학에 대해서 사강을 통해서 한 발 더 가까이 다가섰는지도 모르겠다.

그들은 모두 오늘 밤, 루이지가 몹시 아름답지만 퍽이나 오랫동안 사귄 스웨덴 여자 잉게 잉글레보리와 요란하고 즐겁게 헤어질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191p

 

유럽이라는 대륙은 그렇다. 나라들이 서로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아 굳이 다른 나라에 가려고 다른 교통수단을 이용하지 않아도 된다. 그저 차만 있으면 몇 시간 죽 달려 다른 나라에 도착할 수 있다. 그래서 유럽에 간다하면 조금은 더 시간을 내는 편이다. 그곳까지 갔는데 한 곳만 보고 오면 섭하지 않은가. 이 책은 그런 유럽 여행과도 같다. 이탈리아인가 하면 어느 틈엔가 프랑스이고 파리인가 싶으면 어느 틈엔가 독일이다. 그런 식으로 여러 나라를 배경으로 하는 짧은 단편들이 있어서 그야말로 각각의 다른 유럽 나라들을 짧게 여행하는 느낌으로 읽게 된다.

 

단편보다는 장편을 좋아하는 편이고 그래서인지 이 이야기가 단편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그것도 아주 짧은 이야기들이 자그마치 열아홉 편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참 막막했다. 단편이 이해도가 장편보다는 확 떨어지기 때문이다. 그런 걱정에도 불구하고 이 이야기들은 잘 읽힌다. 뭐 그래서 어쩌라고? 식의 이야기 맺음이 없다. 물론 짧은 이야기답게 오픈 엔딩이 나오는 경우도 많다. 그럴 경우 시비를 걸기보다는 마음대로 상상을 해보게 된다. 그래서 이 주인공은 어떻게 되었을까 하는 생각으로 말이다. 

 

마지막 계단을 돌아 내려오는데 갑자기 '삶'이 현관에 나타났다. 200p

 

표제작인 <길모퉁이 카페>는 제목만큼 그렇게 서정적이지는 않다. 여기 한 남자가 있다. 그는 진료소에 들렀다 나오는 길이었다. 그에게는 앞으로 삼 개월의 시간이 남았다는 선고가 내려졌다. 그는 어떤 생각을 하면서 그 길을 내려오게 될까. 그는 아무것도 들리지도 모이지도 않는 듯이 행동하다가 길모퉁이 카페로 들어간다. 분명 거기 있었으나 그 이전에는 눈에 잘 띄지도 않았던 그런 카페였다. 그는 그곳에서 사람들에게 있지도 않은 사실을 이야기하며 골든벨을 울린다. 그는 왜 그런 행동을 했을까.

 

이야기는 금방 끝나버렸지만 그 이후로도 다른 이야기를 읽어가는 내내 내 머릿속을 지배하는 한 가지 문장이 남았다. 삼 개월. 만약 누군가 나에게 삼 개월이 남았다고 한다면 나는 그때부터 무엇을 어떻게 정리하게 될까. 일단 쌓아두고 읽지 못했던 책을 다 읽어야겠지. 그 이후로 정리를 할 거다. 팔 책은 따로 정리해서 엄마한테 두고 시리즈로 된 책들은 모아서 가지고 싶어하는 사람들에게 보내야겠다. 좋아하는 장르라 모아두었던 책들은 나눔을 통해서 보낼 수도 있을 것이다. 블로그에 임시 카테고리에 저장된 서평들은 올려놓고 떠나야겠지. 약 삼백 개의 미완성 글들. 부지런히 정리하면 떠나기 전에는 다 올려놓을 수 있겠지. 내가 없는 빈 공간을 누군가 들여다볼 수 있도록 지우지는 않고 가야겠다. 뭐 이런 식의 책 정리 생각 만으로도 훌쩍 생각이 떠나는 것을 잡을 수가 없었다. 이야기 속의 그는 길모퉁이 카페의 사람들에게 골든벨을 울리면서 삶을 정리했던가. 나는 나만의 방식으로 책으로 골든벨을 울리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내 나이, 지금 이순간 내 나이는 잊어버려. 불장난을 피하기엔 너는 아직 어려, 니콜라. 43p

 

이렇게 짧은 이야기이지만 많은 생각을 만들어 버리는 글들이어서 좀체 마구 속도를 낼 수가 없다. 그야말로 사강 단편집의 진수인 셈이다. 만약 누군가 사강을 읽어보고 싶은데 어려울 것 같아서 걱정이 된다고 하면 나는 이 단편집을 추천할 것이다. 길게 시간을 내서 책을 읽기 힘든 사람들에게 그먀말로 딱인 그런 작품일테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