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읽기 전에
과학책을 새롭게 읽은 기억이 가물가물해 졌다.
과학의 분야들에 대해서 미지근하고도 꾸준한 관심은 있었지만,
확 끌려서 책을 사서 읽지 않고는 못 배길 정도의 매력을 느낀 적이 없어서 였던 것 같다.
굳이 분야별로 구색맞추어 책 읽어야 할 필요가 없다는 게 내 독서지론이기도 하고..
그러던 어느 날, 이 책을 알게 되었다.
이 책에 끌리게 된 건, 목차 때문이었다.
주로 인터넷에서 책을 구입하다보니, 책 제목과 서평, 목차 등으로 책을 짐작해서 구입하는데,
(그러다보니, 책제목과 목차만 빵빵하고 내용이 부실한 책에는 가끔 속을 때가 있다.)
이 책 속의 목차들은 책 제목처럼, ’진화의 아주 다양한 모습들’에 대한 풍부한 이야기거리를 담고 있는 듯 했다.
그런데, 막상 배달되어 온 책은, 에게! 200p 가 되지 않는 얇으리한 책이었다.
두꺼운 책이라고 항상 알찬 책도 아니고, 얇은 책이라고 대충 지어진 책이 아니라는 것도 알지만,
내 독서경험상,
얇은 책이 깊고 풍요로운 통찰을 담고 있는 경우는 거의 없었는데..
그러고보니, 표지 디자인이 과학에 대한 심리장벽을 낮추려 애썼던 모양인지,
아동. 청소년용 보급판 요약 과학책같은 모습에다가..
어쨌든, 그런 찌뿌드드한 첫인상으로 이 책을 읽기 시작했다.
* 읽고 나니,
일단, 이 책이 말하고자 하는 통찰은
이 책의 표지에 단 한 문장으로 요약되어 있다.
" 진화에서 중요한 것은 얼마나 완벽한 존재가 아니라
결점을 받아들이고
거기서 최선의 것을 얻어내는 일이다."
책에서 얻어지는 지적인 쾌감은
얼마나 의미가 깊은 통찰을, 얼마나 풍요롭게 느낄 수 있는가에 달려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 책이 담고있는 통찰이 단 한 문장으로 요약된다는 것 자체가
이 책의 페이지가 200p도 안되는 얇은 책이라는 점과 함께
한마디로 ’허무한 책’ 이 될 가능성이 높았는데,
이 책은 놀랍게도, ’전혀’ 허무하지 않았다.
이 책의 주제가 아까 그 한 문장이었다면,
이 책의 내용은, 그 문장에 대한 온갖 예시들의 나열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 예시들의 생각을 초월하는 다양함과
자연과의 치열한 상호작용의 모습이 얼마나 놀랍고도 재밌던지,
이 책 처음부터 끝까지, 거의 모든 페이지를 줄 긋게 만들었다.
아마, 이 책에 등장하는 이야기들이, 어떤 작가의 머리속에서 만들어진 스토리라면,
그 작가의 풍부한 상상력에 박수를 보낼 정도 이지만,
사실은, 그 이야기들이, 꾸며낸 픽션이 아니라,
현실 속에서 엄연히 존재하는 자연의 모습이라는 점이 놀랍다.
자연이 품고 있는 다양성의 모습에 경이로움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십대, 이십대에는, 자연의 광대한 풍광이나 아름다운 계절변화를 바라보면서, 자연에 외경심을 가졌다면,
나이가 들면서는, 자연을 움직이는 보이지 않은 질서와 작동 메커니즘(이게 바로 물리와 화학 아닌가.)
그리고 그 자연속을 살아가는 생명체들의 무한한 적응력과 생명력에 대해 감탄과 경이로움을 느끼고 있었는데,
이 책이 나의 경외심에 또 한 번의 깊은 감동을 더해주었다.
이 책의 표지에 보면, 흥미를 끌기 위한 마케팅 문구이겠지만
’다윈과 맞장뜬 동물들의 따끔한 일침’ 이라는 말은 오해의 소지가 있다.
다윈의 ’종의 기원’ 책을 읽어보지도 않고서, 쉽게 판단할 수는 없겠지만,
이 책을 다 읽고나서 내가 느끼기로는 그 문구에는 100% 동의하고 싶지 않다.
’진화여야만 한다’ ’창조여야만 한다’ 라는 결론을 이미 내려놓고서 벌이는
’진화’와 ’창조’의 해묵은 논쟁에는 관심도 없지만,
이 책의 내용이 그 문구처럼
’다윈이 틀렸다’ = ’진화론은 엉터리 이론이다’ 라고
오해되어선 안된다고 생각한다.
물론, 다윈으로 대표되는 초창기 진화론에서는
진화가, 생물체가 점점 더 완벽해지도록 발전해가는
’방향성’과 ’발전성’을 가지고 있다고 여겨졌다면,
이 책은 진화가 그런 ’목표의식’과는 전혀 무관하다는 사실을
생태계의 수많은 예시들을 통해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즉, 다윈과 초기 진화론이란 학문에서 수정되어져야 할 일부를 언급했다고 본다.
하지만, 다윈 진화론의 가장 근간이라 할 수 있는
’자연선택’ 과 ’자연도태’ 의 진리는 이 책 속의 예시들에서도 어김없이 빛이 난다.
단, 자연이 주체가 되어서 수많은 생물군상 중에서
그 자연에 가장 적합한 생물들을 ’고른다’ 라는 개념보다는,
그 수많은 생물군상 들이 자연으로부터 ’간택’되기 위해서
(즉, 자연과 환경에서 적응해서 살아남기 위해서)
얼마나 치열하게 노력하고 진화해왔는가..하는
’생명체의 역동성 자체가 진화의 핵심주체’라는
’관점’ 상의 미묘한 차이는 있겠지만..
나에겐, 이 책의 주제가 다윈과 ’맞장을 뜨거나’ ’일침을 가한’ 게 아니라,
’진화’ 라는 이름의, 자연과 생명체의 상호작용이
그 ’스케일’ 이 얼마나 풍요롭고 거대한지를
한 번 더 확인했을 뿐이었다.
그래도, 나역시 이 책을 통해,
기존에 내가 가지고 있던 진화의 개념에,
몇가지 소소한 새로운 통찰들을 더 할 수 있었다.
첫째, 이 책의 주제 - 즉, 진화는 항상 ’최상’을 향해 ’발전’ 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점점 더 자연 앞에 ’약점’을 줄이는 과정으로 진화할 것 같은
상식적인 생각대로 진화가 진행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즉, 인간사로 빗대어 말하자면,
’완벽한 인간’이 살아남는게 아니라,
나름 ’결점투성이’ 지만, 그 결점을 안고서도 결점을 보완해가며,
어떻게든 ’적응’ 해내는 사람이 살아남는다는 말이다.
예전에, ’경이로운 지구(Miracle planet) - 지구대진화’ 라는 다큐멘터리DVD를 보면서 처음 눈치채게 된 사실인데,
도태되지 않고 살아남는 종족은, 결코,
가장 ’우수한’ 종족이 아니었다.
어류에서 육상생물로의 진화도,
어류중에서 도저히 바다의 양육강식 속에서는 살아남을 수 없는 열등한 존재가
다른 살 길을 찾던 중에 육상생물로의 진화의 조상이 되었고,
공룡이라는 약육강식의 최정점에 오른 동물에
늘 쫒쳐다니던 포유류가 새로운 자연변화에 살아남는데 성공하면서 포유류의 번성이 시작되었고,
그 많은 포유류 중에서도, 가장 약한 무리인 영장류가
신체적 핸디캡을 보완하기 위해 손을 사용하고 두뇌가 발달하면서 인류로 진화했었다.
즉, 현세까지 살아남은 모든 생물의 조상은,
강하고 힘세고 완벽한 놈이 아니라,
약하고 결점 많아도, 유전자의 다양성을 토대로, 자연의 고비 고비를 겪어낸 질긴 놈들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말한다.
우리(포유류 - 영장류) 가 진화의 단계를 비록, 원생생물이나 어류에 비해 더 많은 단계를 거쳐 왔다고 해서,
우리가 더 ’업그레이드’ 된 ’버전’ 이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조금만 더 깊이 생각해보면,
진화의 무대에서 뒤늦게 등장한 포유류와 우리들은 자연의 질곡을 견뎌낸 시간이 비교적 짧은 반면,
박테리아나 가깝게는 어류 같은 경우엔,
우리보다 훨씬 더 오래전에 출현했으니,
훨씬 더 긴 시간을 견뎌내어 현세까지 살아남은 놈들이니
진화게임에 있어서 훨씬 고참이라 할 수 있겠다.
그 놈들은 공룡이 멸종하고 수많은 생물들이 뜨고 지는 시간을 견뎌낸 생명들이기 때문이다.
즉, ’진화게임’에서의 ’승리’ 를 판단함에 있어,
미묘하지만 중요한 관점의 변화를 이 책을 통해 얻을 수 있었다.
두번째로, 내가 이 책을 통해 새롭게 알게 된 통찰은,
그런 ’개체보존’과 ’종족보존’ 이라는 진화 게임의 승리법칙을 유지하기 위한 수많은 전략 중에,
’짝짓기’ 과정이 아주 중요한 적응변수가 된다는 점이다.
이 책에는 수컷이 암컷으로 부터 선택받기 위해, 암컷은 우수한 수컷을 골라내기 위해 갖은 전략을 다 쓴다.
심지어는 그 전략자체가 생명을 위협할 정도로 소모적이고, 필요이상의 에너지를 낭비하게끔 하는, 비효율적인 전략임에도,
오직 ’선택받고’, 최상의 유전자를 ’선택하기 위해’ 그야말로 ’목숨’을 다 바친다.
’죽고 사는 문제도 아니고, 고작, 짝짓기 하나 하자고 이렇게까지 무모해야 돼?’ 하는 물음이 저절로 튀어나온다.
그 과정에서, 예전에는 깊이 깨닫지 못했던,
’성’ 의 생물학적 의미를 의미심장하게 깨닫게 된다.
자기의 유전자를 후세에 조금이라도 더 끈질기게 전달하고자 하는 노력과,
상대로부터 조금이라도 더 우수한 유전자를 받아 후손을 남기려는 노력이
알고보면,
그 유전자가 자연에서 살아남기 위한 결정적인 노력이 될 수 밖에 없다.
’개체를 희생시켜서라도 자연적응에 최적의 유전자를 후세에 전달하기 위한 치열한 혈투’ 라는
비장한 의미를 새롭게 깨달을 수 있었다.
그리고, ’생명력’ 에 대해서도 새로운 통찰을 얻게 된다.
개체를 무모하게 희생시켜서라도 최적의 유전자가 후손에 남도록 하는
그래서 전체 종족이 멸종되지 않고 끈질기게 살아남게 하는,
’초월적인’ 전략으로 살아남았구나.. 라는 것,
한 개체는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유전자를 이어주는
’유전자’가 옮겨 타고다니는 ’배’에 불과하다라는 말을
어디선가 주워들은 적이 있는데, 딱 일맥상통하는 이야기가 아닌가 싶다.
그러니, ’배’를 옮겨 타는 행위(잘 옮겨타야 자연이라는 망망대해에 좌초되지 않고 다음 ’배’로 옮겨 탈 수 있다.)
- 즉 짝짓기가 그 ’유전자’ 의 운명을 쥐락펴락하는 절대절명의 순간일 수 밖에 없는 거 겠지.
그러고보면,
내가 뉘집 자식이었던, 우리 조상이 어떤 인물이었던,
장구한 유전자의 배에서 그야말로, 끝까지 살아남은
바로 그 끈질긴 유전자의 자손이라는 것을 새삼스레 깨달을 때
어릴 적 생물시간에
우리는 1억개가 넘는 정자 속의 하나 - 즉 1억분의 1의 확률로
태어났다는 걸 처음 배웠을때 만큼이나,
내 존재의 생물학적 가치가 격상되는 뿌듯함을 느끼게 된다.
어쨌건,
평소 그저 상식적으로만 알던 막연한 ’진화론’의 개념이
이 책을 통해 훨씬 더 풍요로운 예시들을 통해 피가 되고 살이 붙어
자연과 생명체의 상호작용에 대해 생기있게 살아숨쉬는 통찰을 체득하게 된 것 같아 지적 쾌감이 상당했다.
이 책에 칭찬해 주고 싶은 점이 몇 가지 더 있다.
과학책은 자칫 무미건조하기 쉬운데,
저자의 재치있고 위트가 넘치는(그러면서도 너무 오버하지는 않는)
(알고 보면 번역의 묘미였을까?) 글이 이 책을 읽는 재미를 더 했다.
이 책의 챕터 제목에도 추가점을 주고 싶다.
진화론적 관점에서 평가한 각 생물군의 특징을
짧은 한 문장으로 요약해여 그 챕터의 내용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책의 완성도를 높여 주었다.
* 곰토의 평점 : 9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