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평이 자자하던 김훈님의 남한산성을 이제야 읽었다.

역시 김훈님 특유의 문체는 그대로였다.

[칼의 노래]나 [현의 노래]에서 처럼.

일체의 비유적인 표현이나, 감정이입을 극도로 배제한 건조한 문체.

그래서인지 너무나 단아하고 고풍스러운 문체.

김훈님 특유의 이런 문체는 이런 류(역사소설이라고 해야할까?)의 소설에

너무나 잘 어울리는 것다.

김훈님의 단편소설 [언니의 폐경]이나 [화장] 등 현대물(?)에서는

건조하고 딱딱한 느낌은 있어도(이런 느낌은 곧잘 공허감을 느끼게도 하긴 하지만)

고풍스럽다거나 단아한 느낌은 없는데,

소설의 시대배경에 따라 이렇게 문장의 분위기가 달라질 수 있다는게 놀랍기만 하다.

 

그리고 어느 한문장도 쉽게 쓰여지지 않았음을 느끼게 하는 문장 문장들.

어느 평자는 최고의 문장가를 논하면서

 예전에 이청준이 있었다면 현재엔 김훈이 있다라고 까지 했다던데,

가장 아름다운 문장을 구사한다는 김훈님의 문장들은

극도로 건조함에도 불구 역설적으로 독자의 감성을 자극한다.

 

남한산성에서 항전의 의지를 불태우지도 못하고

그저 추운 겨울을 견디는 것으로

날선 겨울 바람보다 더 에리는 인고의 시간을 견뎌야 했을

임금과 세자, 그리고 신료들과 군병들, 민초들의 모습과

결국 그 모든 꽂꽂한 자존감 마저 내팽겨친채

오랑캐라고 여겼던 것들에게 극진한 예를 다하며 수차례 예를 갖추고 절을 해야 했던

치욕의 순간들이 그저 조용히 펼쳐진다.

감정의 흔들림없이 그저 꿋꿋이 써내려간 글자라도 되는 양,

독자에게 감정이입을 요구하는 유혹의 손길 한번도 없이,

그저 먼 산을 바라보며 말하고 있는 듯한 분위기만으로도

독자들은 저도 모르게 400여년 전으로 돌아가

마치 당대를 살아낸 민초라도 된 것인양 먹먹한 심경으로 책장을 넘기게 된다.

 

화친을 주장했던 최명길도,

배척을 주장했던 김상헌과 당상, 당하 관원들도,

자신의 주장을 굽히고 교묘히 가운데 줄을 탄 영의정 김류도

그 상황에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음을,

조그마한 산성에 갖혀 나아가지도 물러서지도 못하는,

진퇴양난의 그 상황에서는 누구나 그럴 수 밖에 없음을,

그들의 뼈를 깎는 고통과 슬픔을 공감하고,

그저 안타까워 할 수밖에 없었다.  

 

400여년 전의 이 사건을 두고, 현재의 우리는 '삼전도의 굴욕'이라느니,

광해군과는 달리 명분만을 중시하고 실리는 챙기지 못했던

조선의 무능한 임금과 관료들로 인해 생겨났던 일이라고

너무나 쉽게 비판하고 폄하하곤 하지만,

그러한 일들이 비단 400여년 전의 역사적 사건에만 그치고 있는가?

역사는 끝없이 순환된다는 누군가의 말처럼

21세기를 사는 오늘날에도 유사한 모습으로 되풀이 되고 있는건 아닌지,

그래서 2008년의 이 시끄러운 모습들을 후대의 역사는

쇠고기 굴욕이니, 무능한 정부라느니 라는 말로

비판하고 폄하하지는 않을런지 생각해 볼 일이다.

 

수능을 준비하는 고교생이라면 반드시 읽어야할 우리나라 단편소설들이 있다.

이상의 [날개], 김동인의 [감자], 현진권의 [운수 좋은 날],  김유정의 [동백꽃],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 황순원의 [소나기],  염상섭의 [표본실의 청개구리] 등이 그것이다.

김승옥님의 [서울, 1964년 겨울]도 그러한 필독 소설 중의 하나이다.

 

나 역시 중고생 시설에 이런 필독 소설들을 일부러라도 찾아서 열심히 읽곤 했지만,

어쩐일인지 김승옥님의 [서울, 1964년 겨울]은 중고생 시절에는 읽지 못했었다.

제목이 멋있어서 꼭 읽어 봐야지..라고 늘 생각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필독 소설들은 굳이 찾아서 읽어보지 않더라도

수없이 풀어야 하는 각종 언어영역 문제집들과  모의고사 등을 통해

문제를 풀기위한 지문으로라도 만날 수 밖에 없도록 되어 있다.

[서울, 1964년 겨울]도 어느 언어영역 문제집에선가

지문으로 읽었었는지는 모르겠으나,

분명 내 기억으로는 이 소설을 읽지 않았음에도 불구

버스에 손잡이를 잡고 서서 좌석에 앉아 있는 여성의 아랫배가 숨 쉴때마다

오르락 내리락 하는 모습을 보는 것을 사랑한다고 하는 장면을

어디선가 읽었던 듯한 기억이 난다.

 

이 책은 김승옥님의 단편소설 3개를 한권으로 묶은 책이다.

[서울, 1964년 겨울] 외에도 [역사(力士)], [누이를 이해하기 위하여]가 같이 있다.

모두 처음으로 접하는 김승옥님의 작품들이다.

각기 다른 소설들이긴 하지만,

이들 세편은 모두 공통된 정서르 가지고 있다.

도시화에 따른 어두운 측면이다.

 

[서울, 1964년 겨울]에서는 어느 겨울밤

세 남자의 행보를 통해 이런 측면을 여실히 보여준다.

도시의 익명성, 타인에 대한 무관심, 개인적 고립감, 물심주의, 빈민층의 절망감 등

 

[역사]에서는 희곡작가 지망생의 하숙생활을 통해

빈민굴과 양옥집으로 선명하게 대비되는 공간과

그 안에 거주하는 사람들과 그리고 그들의 생활방식을 통해

도시에서의 양극화를 보여주는 한편,

타인과 이웃으로부터 단절되고 고립된 개인들의 모습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이는 역사인 서씨의 기행을 통해 상징적으로 드러난다.

동대문의 돌을 바꿔놓는 기행이라니...

동대문의 성벽을 쌓는 돌이 바뀌어 있다는 것은,

직접 그 돌을 바꿔놓은 본인만이 알 수 있는 사실이며,

모두가 볼 수 있는 것에 대해서 자신만 알고 있는 비밀이 있다는 것에 대해

짜릿함마저 느낀다.

이는 [서울, 1964년 겨울]에서 안과 김이

서대문과 종로2가에서 발견해 낸, 자신만 아는 사실들에 대해 이야기하며

좋아했던 장면과도 일맥상통하다.

 

[누이를 이해하기 위하여]에서도

도시생활의 어두운 측면을 이야기하는 논조는 변함이 없다.

등을 떠밀리다시피 해서 고향을 떠나 향했던 도시,

도시에서의 2년이라는 생활동안 누이는 침묵을 배운채 돌아온다.

그런 누이를, 누이의 침묵을 이해하기 위해 도시에 흘러온 김,

그러나 그는 도시에서 개인주의적 고독에 심하게 학대왼 나머지

’조리에 맞지 않은 감정의 기교만을 배운’ 정신적 분절을 경험하면서

도시에서 ’침묵’을 배운 누이가 자신보다 훨씬 낫다고 되뇌인다.

 

이들 소설에 쓰여진 시기가 1960년대 중반인 점을 감안한다면, 그대 당시의 도시라고 해봤자

우리나라의 상당부분이 고도로 도시화된 현재의 기준으로 본다면  

지금의 농촌과 크게 다르지 않을거라고 생각되지만

당시에 느끼는 도시화의 속도와, 그에 따른 생경한 삶의 방식은

당대의 사람들에겐 커다란 충격임과 동시에, 좌절이었던 것 같다.

김승옥님의 소설에서 그런 현실에 대한 강함 비애감과 좌절감이

너무나 어둡고 무겁게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물신주의, 개인주의, 개인적 고립과 소외, 타인에 대한 무관심 등

흔히 도시화의 어두운 측면이라 여겨지는 것들은,

도시화가 고도로 진행된 오늘날이 훨씬 더 심하게 나타나리라는 것은

누구나 짐작할 수 있는 사실이지만,

요즘 쓰여진 소설들은 도시생활에 대해서

그렇게까지 비장하고 절망적으로 바라보지 않는다.

농촌과 자연에 대한 동경을 가득 담고 있는 경우라도 말이다.

그저 삭막한 도시생활에 대한 불만과 함께

자연을 동경하는 수준 정도에서 그치는 경우가 많다.

40여년이 지나면서 도시화에 대한 충격이 그만큼 사그라졌다는 뜻일까.

그만큼 사람들도 도시생활에 익숙해졌기 때문일까.

 

암튼 김승옥님의 소설은 흔히 고교생 필독 소설로 분류되는 근현대 소설들과는 분명

다른 감성과 느낌을 지닌 글인 것 같다.

당대에 이런 감성으로 이런 소설을,

것도 20대의 젊은 시기에 썼다면

 상당히 예민한 감수성의 소유자였던 듯하다.

작가해설을 통해 알 수 있듯이,

독재정권 하에서는 소설을 거의 쓰지 않고,

기성 소설들을 영화화하기 위한 각색작업메만 몰두했던 것도,

그가 너무나 예민했기 때문은 아니었는지...

우울한 시대상황만 아니었다면

천재 작가의 창작력과 감성이 마음껏 꽃피울 수도 있었을텐데,

소설을 사랑하는 독자의 한 사람으로 마음이 아프다.

 

 

언젠가부터 우리는 ‘쿨(cool)'이라는 말을 자주 쓴다.

남녀간의 사랑을 다루는 드라마에서도

등장인물들의 입을 통해서 자주 들을 수 있다.

이별을 선언하는 연인에게

조금이라도 매달리는 듯한 낌새를 보일라치면

마음이 이미 떠난 상대는 냉랭한 표정으로

‘쿨하게 헤어지자’, 내지는 ‘쿨하지 못하게 왜이래?’

등의 말을 한다.

또, 헤어진 연인을 잊지 못해 미련을 보이는 친구를 보며

우리는 누구나 그를 딱하게 여기며

‘그냥 쿨하게 놔줘’라고 충고한다.

또, 멋지게 옷을 차려입은, 스타일리쉬한 남자나 여자를 보면

우리는 자기도 모르게 ‘쿨하다’라고 하고,

혹은 합리적이고 이성적이면서도 성격좋은 사람들을 가리켜

‘그 사람, 쿨해’라고 평하기도 한다.

다양한 상황에서 쓰는 ‘쿨(cool)'이라는 말.

이 책은 이러한 ‘쿨’의 의미 찾기를 위한 책이다.

우리 사회에서 ‘쿨’하다고 인정받는, 혹은

강준만님의 입장에서 ‘쿨’하다고 생각되는

우리 사회의 유명인사 10인을 통해

쿨의 의미를 탐구해보는 책.

강준만님이 꼽은 10인에는

이영애, 전지현, 유재석, 박진영 등 연예인도 있고,

강금실, 반기문 등 정치인도 있으며

손석희 같은 언론인도, 김훈 같은 소설가도, 김갑수 같은 평론가도,

장준혁 같은 드라마 속 허구의 인물도 있다.

그들은 각각 쿨의 다양한 면모 중 한가지씩을

특징적으로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다.

강준만님이 뽑은, 그들의 쿨의 면모는 이렇다.

이영애는 쉽게 범접하기 어려워 보이도록 하는 도도한 기품,

(냉랭한 표정으로 발사되는 ‘너나 잘하세요’라는 멘트로 대표되는.)

전지현은 뜨거운 욕망마저도 쿨하게 만들어버리는

모순적 이미지, 내지는 이중적인 면모,

강금실은 기존의 정치인들과는 다른 전혀 새로운 모습과 이미지를 통해

보는 사람을 한순간 빨아들이는 유혹의 힘을 가진 신선감, 신비감,

손석희는 냉랭하고 창백해보이면서도 날카로운 외모에

어떠한 상황에서도 좀처럼 흥분하지 않는 초연함,

(그가 진행하는 라디오 프로그램 ‘시선집중’에서의 인터뷰 방식과,

그가 사회자로 있는 TV 프로그램 ‘100분토론’을 보면 누구나 느끼는 거다)

유재석은 그를 국민MC로 만들어 준 가장 큰 원동력인 진행방식인 배려

(진행자로서의 배려는

‘짧게 보지 않고 멀리 내다보고, 부분보다는 전체를 보는 기술’로,

아웅다웅하는 출연자들을 조정하는 역할을 주로 하게 된다.)

박진영은 독특한 외모와 딴따라에 대한 사회일반의 편협한 고정관념에도 불구,

가수로서, 작곡가로서, 제작자로서 국내외에서 성공할 수 있도록 한

그의 지독한 프로근성

반기문은 ‘칭찬과 아첨의 경계를 뛰어넘어 궁극에 달하게 하는’

그의 조용한 열정과 겸손함,

김훈은 세상의 것들에 초연한 듯한 ‘고립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의 고독’과

냉소적인 허무주의,

장준혁은 마피아식 인맥관리의 맥락속에서 발휘되는 리더십과,

불우한 출신･환경에도 불구 확신을 갖고 질주하는 코리안드림,

그리고 그 과정에서 그가 보여준 기존 시스템에 대한 냉소와 조롱

또한 그런 그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그에 대한 과잉순응,

시인, 문화･평론평론가, 방송인, 음악칼럼니스트로서 활동하는 김갑수는

온갖 기성의 것에 대한 과잉된 혐오감에서 비롯되는

공정성을 뛰어 넘는 마니아적 기질 등

2002년 월드컵에서 보여준 뜨거운 거리 응원에서 볼 수 있듯

우리 국민은 분명 열정적이다.

달리 얘기하면 감정적이고, 그건 강준만님이 지적했듯이

‘욱’하는 기질이 다분히 많은 그런 문화다.

그런 문화, 그런 국민들 가운데

주변의 것들에 대해서 ‘거리두기’에 능하며

늘 초연하고 냉소적인 듯한, 그래서 고독해보이면서도 도도한,

그러면서도 남에 대해 배려를 아끼지 않는 그런 사람은

대다수의 사람들과 다르기에 신선한 매력을 던져주고,

흔히 ‘쿨’하다고 칭해지며, 많은 사람의 관심을 받게 된다.

나는 어떤 사람인가?

‘욱’한 사람인가, ‘쿨’한 사람인가?

‘쿨’한게 멋져 보여서 의식적으로 쿨하려 하지만

늘 욱한 모습을 보이고 있지는 않는지.

강준만님의 지적처럼 이제 우리사회도

조금은 쿨해졌으면 좋겠다.

* 강준만님이 하루키의 [노르웨이 숲]에서 제시한 것이라며 언급한 쿨의 법칙

 : 모든 사물을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 말것.

   그리고 모든 사물과 자신 사이에는 적당한 거리를 둘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