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피 쓸 땐 연필로 쓰지 말고 송곳으로 쓰라고
두루뭉술하게 쓰지 말고 송곳으로 콕콕 찔러 쓰라고
무딘 카피는 허파를 건드려 하품이 나오게 하지만
뾰족한 카피는 심장을 찔러 탄성이 나오게 한다고
심장을 깊숙이 찌르려면 송곳을 쥐고 카피를 쓰라고
(p. 23)
책을 읽고 서평을 자주 쓰려고 하면 간혹 당황스러울 때가 있다. 분명히 책을 재미있게 읽어서, 키보드 앞에 손을 갖다 대는데도 얼음이 되어버리는 경우 때문이다. 특히나 인문학 보다도 소설을 읽은 다음에 그런 현상이 두드러져서 답답함에 한숨짓기를 여러번이다. 책 소개글에 ‘회사에서 학교에서 이래저래 글 쓸 일은 많은데 연필만 잡으면, 키보드에 손만 얹으면 얼음처럼 꽁꽁 굳어버리는가? 지금 당장 카피를 써내야 하는데 머릿속이 텅 비어 아무 생각도 나지 않는가? 그렇다면 뭔가를 쓰려 하기 전에 <카피책>부터 읽자.’라는 문구는 카피책을 ‘무조건’ 읽어야 하는 당위성에 대해 잘 설명했다. 당장 나에게 필요한 책이 카피책이었구나, 생각하고 읽기 시작했다.
하지만 내 의도와는 다르게 이 책은 순전히 광고나 홍보, 선전 카피에 대한 정철의 30년 인생 노하우가 담긴 책이었다. 그러나 읽다보니 재미있고 신기해서, 또한 자연스럽게 고개를 끄덕이면서, 책을 잡고 3시간 동안 내리 읽게 되어버리는 멋지고 신기한 책이다. 제일 와 닿는 문구는 단연 표지글이다. '당신이 쓰는 모든 글이 카피다' 그렇다. 전적으로 동의하는 바이다. 사실 우리는 카피천국에서 살고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은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드니까 말이다. 작가들은 이미 배운 것을 토대로 글이 나올 수밖에 없는 것이고, 그 글들에서 자신이 인지하지 못하는 부분에서 원작자의 말을 베끼고 있는 것을. 혹은 일부 몰지각한 사람들은 알면서도 조사만 살짝 달리하며 베끼는 작업을 하지 않은가 말이다.
하지만 우리의 영어 못하는 정철은 그 베끼는 작업을 떳떳이 하라고 한다. 그대로 베끼면 패러디이고 도둑질이지만 그것을 두려워하지 말란다. 그가 세월호 시력표를 만들어낼 수 있었던 이유는 시력표를 도둑질을 해서라고 말이다. “여보, 중랑구청에 박종수 들여놔야겠어요.”(p. 111) 총선에서 승리하기 위한 캐치프레이즈나 슬로건을 누구나 다 아는 기업의 카피를 카피했다고 욕먹진 않는단다. 이 베끼기 작업은 그가 주장하는 ‘어깨에서 힘빼기‘ 작업과도 밀접하다고 생각한다. 즉 우리는 만들려고 하다 보니 힘이 들어가고 글짓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있는 것을 차용하는 'make가 아닌 search'. 매의 눈으로 힘줘서 찾지도 말고 그저 내 주위만 살짝 돌아봐도 내가 원하는 것은 바로 찾을 수 있다고 말하는 정철.
이것은 백만분의 일에 해당하는 예이며, 정작 내 마음을 빼앗겨버린 부분은 다음과 같다.
‘카피라이터는 쓰는 사람이면서 지우는 사람입니다. 카피는 송곳으로 쓰라 했습니다. 송곳을 다 사용했다면 그 다음엔 손에 들어야 할 것은 스푼입니다. 스푼을 들고 아이스크림 퍼내듯 군더더기를 퍼내야 합니다. 송곳과 스푼 두 가지 무기를 다 사용한 후에 카피가 끝납니다. 또 군더더기를 솎아 내려고 반복해서 글을 들여다보면 그 전엔 보이지 않았던 것이 보이기도 합니다. (중략) 반복하여 들여다보기는 자연스럽게 퇴고 역할도 한다는 뜻입니다.’(p. 105)
글을 쓰는 경우라면 항상 고민되는 것이 걷어내기 작업이다. 쓸데없는 글들이 많이 들어가 있지 않나, 하는 우려. 이것은 비단 카피 작업이 아니라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정철은 그의 전작이 이미 출간된 만큼 카피만큼 글쓰기에도 같이 적용된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그의 이번 책 <카피책>이 순순히 잘 읽히며 재미있고 핵심을 요약하고 군더더기가 없다고 생각했는데 그 이유가 이해되었다.
이 외에도 첫 번째 파트에서 다뤄지는 방법인 낯설고 불편하게 조합하고, 깍둑설 듯 잘디잘게 자르고, 반복 나열하고, 간혹 가다가 딱 잘라 말하는 등 그의 진심이 느껴지는 노하우들을 볼 수 있었다. 두 번째 파트 '이렇게 머리를 씁니다'에서는 '연필로 씁니다'의 방법론적인 것과 다르게 카피의 전략적인 측면을 강조하고 있었다. 문재인의 이미지 창출에 성공한 ‘사람이 먼저다’, 할인보다 공짜라는 개념의 카피, 라이벌을 이용해 객관화 시킨 카피, 혹은 라이벌에게 걸고 넘어 오게 하는 카피, 일등을 위해 일등을 까는 카피, 겁주는 카피, 역발상의 카피 등을 이용해 총칼 없는 전쟁에서 살아남는 법을 알려주고 있다.
정철의 카피라이터 30년 노하우가 고스란히 담긴 책, 그가 카피 쓰는 요령을 후배들과 이제는 나눠도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내놓은 책이라고 서문에 밝혔듯이 책을 읽다보면 카피계의 장인인 그가 이 책을 통해 제자 된 우리를 양성하는 기분이 든다는 것이다. 그의 자산을 아낌없이 나눠주고 있다는 생각에 솔직히 깜짝깜짝 놀라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그의 정치적 입장과 그가 추구하는 이상까지도 알 수 있어서 인간 정철, 영어는 못하지만 카피계에 기둥이라 생각되는 그의 기본 마인드까지 이해하게 되었다. 역시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이고 사람은 일반적으로 그 덕이 저절로 빛나게 되어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나보다.
존경합니다. 영어 못하는 정철 작가님.
그런데 궁금한 게 있습니다. ‘결혼해 듀오’와 ‘스칼프는 두피, 메드는 약입니다’는 본인의 카피입니까? 실은 저도, 수많은 카피 중 ‘결혼해 듀오’ 만큼 단연 돋보이는 카피가 드물다고 생각하는데요. 글의 문맥상 아닌 것 같은데, 서두에서는 본인의 카피만으로 책을 만들겠다고 했기 때문에 많은 분들이 헛갈려 하실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