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에 소설 하나를 읽었는데, 자살 결심을 하던 의사가 택시 기사를 가장한 할머니의 사투에 의해, 그가 죽지 않게 되는 내용이었다. 죽음을 목전에 둔 할머니는 사전에 계획해 둔대로 그 의사에게 손을 내밀었고, 적극적이고 극단적인 방법을 총동원하여 그를 구출해낸다(이것이 적절한 표현이 아닐지라도.) 하지만 해피엔딩을 바라던 내게 왠지 쌉싸래한 뒷맛이 느껴지게 했던 작품이었다. 그래도 결론은 하나였다. 도저히 혼자만의 힘으로 빠져나올 수 없는 상황에서 누군가 손을 내민다면, 잡아라.

이 작품의 시작은 LA 외곽의 허름한 변두리 아파트 계단에서 날이 저물도록 하염없이 앉아 있는 한 소녀를 지켜보던 같은 아파트에 사는 이웃집 빌리가, 그 10살배기 소녀에게 위험할지도 모르는 곳에 왜 앉아있는지 묻는 것으로 시작한다.

 

"내가 집 안에 앉아 있으면 아무도 내게 문제가 있다는 걸 눈치 채지 못해요. 그러면 아무도 나를 도와주려 하지 않을 거예요." (p. 32)

총기 등 범죄가 끊이지 않는 미국이라는 사회는 미성년자에 대한 보호가 철두철미하다. 언제나 법적 보호자가 같이 있어야 한다. 그 큰 땅덩어리에서 스쿨버스가 아니라면, 통학하는데 혼자 다니는 건 어불성설이기 때문에 당연한 결과이리라. 그런 곳이니 10살짜리 여자애가 학교를 가야하는 낮에도, 아파트 현관이라고는 하지만 범죄가 일어날지도 모르는 변두리의 으슥한 아파트 계단, 그것도 언젠가 위험천만한 상황이 닥칠 수도 있는 곳에서 계속 있다는 것은 무척 신경이 곤두설 법하다. 이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 태반이 혼자 사는 것에 익숙한 것을 넘어, 오히려 다른 사람들과 경계를 긋고 자신만의 영역을 확고히 지키는 사람들일지라도 말이다.

이곳에는 지하에 사는 약물에 취해 사는 엄마를 둔 그레이스 모녀뿐만 아니라, 전직 브로드웨이 댄서였으나 10년이 넘도록 공황장애로 아파트 밖으로 한걸음도 나가지 못하는 빌리, 직업이 미용사이고 어렸을 때 위탁모 가정에서 전전한 이력이 있는, 사람들과 관계를 맺기 어려워하는 레일린, 아이들을 제외하곤 모든 사람들에게 까칠한 래퍼티 할아버지, 결혼하기로 약속까지 한 여자에게 배신당한 펠리페 아저씨, 친구들을 등지고 남편만 있으면 행복할 것 같았으나, 친구도 잃고 몸도 성치 않아 결국 혼자 있기를 두려워하는 힌맨 할머니 등 소외되고 또는 혼자 있기를 자처하는 사람들로 구성된 집단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레이스는 그녀의 당차고 확성기 같은 크기의 목소리처럼 자신의 생각과 의지를 당당하게 이야기한다. 나는 도움이 필요해요. 나에게 도움을 주실 수 있나요, 라고.

 

가만히 생각해 보면, 어른이 된다는 것은 많은 것을 깨우치게도 하고 생각의 깊이를 갖게 하지만, 체념이라는 것도 포함되지 않나 싶다. 그동안 알게 모르게 사람들과 부대끼며 학습해온 것들로 상처받을 것을 두려워하며, 그 결과가 추측 혹은 예측하기 때문에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기를 거부한다. 그렇더라도 그 누군가에게 간섭받지 않도록 길들여진 삶. 나이 때문에, 아니면 배울 것이 없다는 이유로 그 어떤 시도를 하지 않더라도 사회 속에서 용납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내면을 들여다보면 방치된 존재이다. 그렇게 이 블록 아파트에는 자신의 Safe Zone에서 겉으로는 Out of business를 외치며 조그만 자극에도 털을 곤두세우지만 속살은 여리다. 외롭고 상처받기 두려워하며, 도움이 필요로 하다는 인식도 하지 못한 채로 살아가는 어른들, 바로 우리들 본연의 모습이다.

그레이스에게 자신을 투영하며 먼저 적극적으로 도움의 손길을 내민 레일린이나, 스페인어를 알려주는 펠리페, 예쁜 옷들을 만들어주는 힌맨 할머니, 탭댄스를 알려주는 빌리 등은 그레이스를 도와주지만 작품을 읽어가다 보면, 오히려 이 작은 소녀를 주축으로 그들의 냉랭하고 언제 무너지질 지 몰랐던 어른들의 세계가 작은 고사리 손 덕분에 더 튼튼하게 지어지는 것을 느낄 수 있다. 타인이라 내치고 외면했던 손과 손을 맞잡을 때 삶은 더욱 풍요로워질 수 있다고, 세상은 생각보다 차가운 곳이 아니라고 말이다. 사실은 세상이란 생각보다 더 따듯하다고. 강팍한 곳이 아니라고. 주위를 한번 둘러보고 손을 내밀고 손을 맞잡으라고. 외면하지 말라고.

이 작품의 제목이 <흔들리고 있는 소녀를 보거든>이다. 작품을 다 읽으면 우리는 흔들리고 있는 것은 소녀가 아니라고, 바로 우리 어른들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세상 풍파에 찌들지 않고 꼿꼿한 어린이들의 마음을 보며 우리 어른들이여 힘을 내라고. 그래서 이 작품의 제목은 역설적이게도 <흔들리고 있는 그대, 어른들에게>라고 내게 다가왔다.

영국이라는 나라에 대해 배우거나 듣다보면 자연스럽게 알게 되는 나라가 아일랜드이다. 청교도혁명에서 크롬웰이 아일랜드인을 탄압해 토지를 몰수하고 영국인에게 분배하고 그 후에 일어난 감자 생산성 저하 등과 영국인 지주 아래서 아일랜드의 빈곤이 나왔다고 하는 이야기. 그리고 아일랜드인 거의 대부분이 가톨릭인 나라이기 때문에 영국의 지배에서 벗어나기 위해 IRA라는 과격 무장조직의 적극적인 피의 전쟁으로 영국과 분리를 위해 노력하고 있어서 빈번하게 뉴스를 통해 보았던 기억이 난다. 이젠 지나간 과거지만. 따라서 아일랜드하면 왠지 아직도 정치적으로 불안전하며, 경제적으로 어려운 느낌이 남아 있다. 마치, 우리나라를 제 3의 나라에서 볼 때의 느낌처럼.

그리고 역시 아일랜드하면 떠오는 것은 대 문호들의 나라라는 것이다. 예이츠나 버나드 쇼, 사무엘 베케트 등 내게는 좀 어려운 내노라하는 문학가들의 나라이기에 또한 사시사철 추적추적한 날씨와 구릉지, 나무보다는 낮은 풀들 사이로 부는 편서풍이 치맛자락을 머리카락을 휘감는 듯한 느낌의 나라이기에 푹 가라앉은 그들의 기질이 대 문호를 탄생할 수 있었던 배경이 된 것은 아닐까하는 어렴풋한 추측들을 가지게 만든 나라이기도 하다.

저자 심은희씨가 젊은 나이로 1년 동안 다녀온 아일랜드는 내가 모르는 다양한 것들을, 특히 영화를 통해서 얻을 수 있었던 지식들을 각처를 돌아다니며 상세하게 알려주고 있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타라의 이름이 더블린의 미스카운티의 타라 언덕이 나오는데, 그 영화의 오하라 가문이 아이리쉬라는 것과, 영화 타이타닉에서 춤추고 서로 어우러졌던 3등석의 빈곤한 사람들이 아이리쉬들이며 아일랜드를 떠나 미국으로 향하던 중이었다는 것이다. 그들 거의가 배의 침몰로 물속에 잠겨버렸으니... 안타깝다.

이 책에서도 나오지만 북쪽의 얼스터 일부는 여전히 영국령의 북아일랜드인데, 다행히도 여권은 필요 없이 왕래할 수 있으나 아일랜드의 공식 화폐인 유로가 아닌 영국의 파운드를 쓰고 있으며 국기도 영국의 유니언잭 국기가 펄럭인단다. 그래도 이제는 교전 없이 평화롭게 드나들 수 있으니, 혼란했던 과거는 이미 묻혀 버린 듯해 보이기도 하다.

저자는 아일랜드의 곳곳을 설명해주고 있는데, 역시 말라하이드 성이나 호스 성, 켈커니 성, 영화 브레이브 하트의 촬영지 트림 성 등 고성들의 운치를 마음껏 볼 수 기쁨을 만끽할 수 있다는 점이 가장 큰 매력이 아닐까 한다. 그리고 서두에서도 말했듯 편서풍과 구릉, 나무보다는 풀들과 어우러져 잦은 외세의 침입과 독주를 마시는 아일랜드인의 기질은 우리나라 사람과 닮은 듯한 느낌이 드는 것도 당연하게 생각된다. 거기다 축구에 열광하는 것과 한강과 같은 느낌의 리피 강 역시.

연중 비가 늘 내리는 나라, 그러나 나쁜 날씨는 없고 부적절한 옷만 있다는 아일랜드. 하루에도 수십 번 변화무쌍한 날씨를 자랑하는 곳. 그 날씨에는 펍과 같은 템플바에서 기네스 맥주에 피시 앤 칩스를 먹어야 제격이라는 것을 알게 된 아일랜드. 세계에서 세 번째로 아름다운 스타벅스와 세계에서 다섯 번째로 예쁜 맥도널드가 있는 곳. 마지막으로 예이츠가 그리워하는 이니스프리 호수가 있는 곳.

  

다만 아쉬운 건 심은희 저자가 아일랜드 곳곳을 알려주고 싶은 욕심에 너무 많은 것을 소개한 나머지, 특징이 조금은 희석된 듯한 느낌이 들었다는 것이다. 그저, 관광책자 하나를 보는듯한 느낌이 살짝 들어서 고개를 갸웃하기도 했다. 하지만 우리가 잘 몰랐던 나라이기에 실질적으로 아일랜드에 가서 도움이 될 만한 정보가 알차게 실려 있어 이 책 한권이면 어학연수든, 관광이든 두려움 없이 떠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아주 멀게만 느껴져 막연하기만 했던 아일랜드가 이제는 가깝게 느껴진다.

 

다신북스에서 신간이 나왔다고 해서 살펴보니, 팟 캐스트에서 주가를 올리며 송은이, 김숙이 진행하고 있는 고민해결 프로그램을 책으로 엮은<비밀보장>이란다. 팟캐스트 순위 1위! 누적 다운로드 1700만이라는 경이적인 기록을 갱신 중이며 공중파 <언니네 라디오>까지 진출했다는데 사실, 팟캐스트를 통해 들어본 적도 없고 그녀들의 방송에 대해 금시초문인 나로서는 다소 의아했다. 이건 뭐지, 라고.

그런데 읽어보니 과연 팟캐스트를 통해 제공되는 수많은 프로그램 중에 누적 다운로드 1위라는 기염을 토한 이유가 납득이 되었다. 특히 그녀들의 대화 방식을 그대로 글에 써 놓고 있기 때문에, 송은이와 김숙이 내 앞에서 유쾌하게 이야기하고 있는 듯한 느낌까지 들었다. 물론 대 주제인 '비밀을 보장하며 속 시원한 고민 해결'은 말할 것도 없고. 연애인들이 연애인들과 카운셀링을 한다고 해서 수준 낮게 보면 안 된다. 고민해결을 위해 특화되며, 알만한 연애인으로 구성된 덕후들이기 때문에, 또 변호사 같은 전문가와의 전화 연결로 명쾌하게 풀어가기 때문에, 그들의 설명을 읽노라면 과연 그렇구나, 절로 납득이 되어버린다.

 

‘보밀보장’에 들어오는 고민들은 참으로 다양하다. 목차에서도 나오지만, 사소하지만 목숨 걸린 고민들, 내 주변에서 들어봄직한 연애 고민, 취준생과 신입직원의 고민, 결혼에 대한 고민, 금전에 대한 고민, 법률 고민, 마지막으로 이영자씨에게 카운셀링 의뢰한 영자 언니네 상담소 등. 사소한데 혹시 해결될까 궁금했던 것들이, 살면서 나에게는 정말 진지하고 고민되지만 혹시 다른 사람에게는 별것 아닌 것 같아 의뢰하기도 꺼려지던 것들이, 혹은 일반적인 질문 같지 않아 해결할 길이 없어 답답했던 마음들이, 카운셀링 받을 곳 없어 헤매이던 마음들이 '비밀보장'에 다녀오고 나면, 우선 다른 사람과 같은 동류의 고민을 하고 있었다는 안도감이 든다. 무엇보다 합리적으로, 아니 급소를 찌르면서 그러나 마음 아프지 않도록 진지하게 고민을 해결해준다.

 

혹시 그거 아는가.

토익학원 월수금 반이 나을지, 화목토 반이 나을지?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아이돌에 대한 팬심이 깊어지는데, 특히 어른의 입장에서 남사스럽게 생각되는데 이런 것들도 해결될까?

소개팅을 앞두고 있는 국주같은 스타일의 뚱녀는 과연 어떤 스타일의 옷을 입어야 할까?

대기업, 어떻게 하면 면접을 잘 볼 수 있을까?

가수가 되고 싶은데(혹은 연기자) 이것을 꿈으로만 내버려둬야 하는가?

영원한 희대의 화두, 혼전순결은 지켜야 하는 걸까?

첫키스는 어디가 좋을까?

신혼에 불붙은 소리 '오빠~'가 계속 담을 넘어와 힘들게 한다면?

1년동안 휴학하고 알바로 개처럼 일한 740만원 어디다 써야할까? 등등

 

이 책에서는 이렇듯 액기스만을 모아 때론 변호사님을 대동하여, 때론 각 요직에 앉아있는 분들까지 생생하게 노하우를 전달받을 수 있다. 상담이 고루하고 듣기 힘들다는 편견은 깨지라고 있는 것인가 보다. 그들이 처음 '비밀보장' 프로그램을 만들려고 하던 의도 그대로, 무조건 재미있게, 그러나 '공감'할 수 있도록 알차고 찰지다. 기분 좋게 웃고 즐기다 보면 고민이 해결된다.

 

이제 오징어 잘근잘근 씹으며 들을 준비 다 됐는지? 아마 오늘도 내이야기가 나올지 모른다. 송은이, 김숙의 유쾌 상쾌 사이다 같은 공감 카운셀링.

비밀보장? 드루와, 드루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