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때부터 대학 4학년 때까지, 아니 대학은 제외한다손 치더라도 대한민국 국적을 지닌 사람이라면 거의 12년을 공교육 아래서 역사를 배우게 된다. 다른 과목들도 그러하겠지만 역사에 대한 것만은 왜곡된 채 배우는 것이 많다고 생각한다. 유구한 역사 속에 수많은 외침으로 소실된 문화재가 많기 때문일 수도 있겠지만 기록하는 사람들, 권력에 정점에 있는 사람이 자신의 이기와 맞물려 제대로 된 역사 집필을 방해해서일 수도 있겠다. 지금처럼 역사 국정교과서로 자신들의 입맛에 맞는 기록을 남기려는 기득권들처럼 말이다. 어쩌면 우리가 아는 우리의 역사가 사실은 모순덩어리이며, 이기주의의 집합체이고, 양반들이라 불리는 기득권들의 권력 나눠먹기로 얼룩진 흔적일 수도 있다. 사실을 있는 그대로 '어리석은 민중들'에게 알려준다면 나라에 대한 충성심은 기대할 수 없으니. 역사의 왜곡과 자신들의 입맛에 맞는 짜깁기는 비단 오늘 내일의 문제도 아닐 것 같다. 

이와 같은 흐름들 속에 사연 많은 조선왕조실록을 대대로 기록할 수 있었던 원동력인 사관들 이야기가 나온다. 지난번에 소설 <사관>도 재미있게 읽었지만 역시, 그들의 기개 어리고 끊임없는 임금 감시 프로젝트가 빛을 발한 순간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이와 더불어 독보적인 역사서가 있다면 바로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일 것이다. '삼국사기 이전의 역사 서술은 과거 기록을 그대로 옮겨 쓰고 나열한 수준이었지만 김부식은 우선 과거 문헌 기록을 확인하고 그 기록의 사실 여부를 검토 판단하고 편찬자의 철학에 따라 사료를 취사선택하고 그에 따라 가치관을 서술하는 등 과거보다 혁신적으로 진보한 역사기록 형식을 채택합니다.' (p. 160) 수많은 야사를 보면 어쩌면 진짜일지도 모르는 내용들이 많다. 야사 내용의 신빙성을 의심하기도 한다. 따라서 위문장은 야사를 왜 역사기록으로 채택할 수 없는지 왜 삼국사기, 삼국유사에 대한 신뢰도가 높은지 정확하게 알려주는 부분이라 할 것이다. 그 많은 야사를 후대에 남기지 못하는 것은 확인되지 않는, 즉 신빙성이 떨어지는 이야기라는 점일 것이다. 물론, 실제의 이야기도 야사로 취급되는 예도 있겠지만.

'평소에 나라를 욕되게 한 사람이라 오직 한 번 죽는 것만 남았노라 하시더니 이제 나라를 찾았고 큰 원수마저 갚았거늘 무엇 때문에 평소의 맹세를 실천하셨던가.' - 명 수군제독 진린의 제문 중 (p. 193)

이순신 장군에 관한 이야기는 볼 때마다, 들을 때마다, 그리고 읽을 때마다 울컥하게 되는 것 같다. 왜란 시 선조는 나라를 저버리고 명나라에 망명하려던 계획이 류성룡을 위시한 대신들에 의해 좌절되고, 23전 23승이라는 무패신화를 쌓아가고만 있었던 이순신을 시기 질투해 몇 번이나 백의종군하게 만든 인물이다. 들불처럼 일었던 의병들 역시 의심해 유배 보내거나 죽게 만들고, 아들 광해군까지 자신을 위협하게 만드는 존재라고 느꼈던, 왕이라고 부르기조차 아까운 선조를 위해 이순신 장군은 어떻게 싸우고 가셨던가. 그의 충정과 애민이 얼마나 절절하기에 명나라 진린마저 저런 제문을 남겼을까.

'가문의 힘으로 권력을 쥔 뒤 혼자만 좋은 시절 잘 누리고 그 결과로 여성 후진들의 기회의 문을 닫아버리는 논리를 만들고만 문정왕후의 사례는 아마 지금의 현실에도 던지는 교훈이 적지 않을 것이다.' (p. 228)

완벽한 유교주의를 펼친 조선에서 잠시 불교가 흥한 적이 있다. 문정왕후 치하 시절이다. 명종의 치하 시절이라고 해야 하지만, 꼭두각시를 부리는 손은 따로 있듯 명종을 앞에 두고 뒤에서 완벽히 주인 행세를 한 문정왕후. 그를 잘 모르는 사람들 입장에서, 여자라는 이유로 같은 여자에게 동경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문정왕후는 승려 보우와 합심해서 불교의 부흥을 이끌었다. 단, 민초들의 보혈을 쥐어 짜내면서 말이다. 명종의 외숙부인 윤원형과 문정왕후의 사리사욕을 채우는, 엄마라는 이름을 앞세워 만인지상 임금조차 좌지우지하며 한 나라를 틀어쥐고 사리사욕에만 힘쓴 문정왕후는 프랑스 단두대에서 처형된 마리앙트완네트보다 더 어리석고, 민중들에게 더욱 악독하다. 

'고지접유재(古之接有才)
금지접무재 (今之接無才)

옛날의 접(接)은 재주(才)가 있었는데
오늘의 접(接)은 재주(才)가 없네.' (p. 262)

문정왕후는 자신의 이점을 충분히 살려 이익을 살펴 나라를 쑥대밭으로 만들더니, 대비적으로 학문적으로 뛰어난 인재 허난설헌의 삶은 참으로 애달프다. 유교주의 사상이 뿌리박힌 조선이었으니 여자는 밖에 나갈 때 장옷으로 얼굴을 가려야 하며, 글을 배워서도 안되고 무조건 내조에만 힘서야 하는 나라였다. 이때에 남성들을 압도하는 글 솜씨를 시기 질투하는 남편과 시집 식구들의 멸시와 학대 속에 허난설헌(허초희)은 제대로 피어 보지도 못하고 스러진 삶이 안타깝다. '그가 세상을 떠난 해는 1589년입니다. 스페인 이사벨라 여왕이 콜럼버스 함대를 파견해 신대륙을 개척한지 97년이나 지난 뒤입니다.' (p. 266)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여성이 남성보다 빼어나는 것을 못 견뎌하는 것이 우리나라다. 지금은 많이 완화되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결혼하면, 애를 낳으면 직장에서 관두는 사례가 적잖다. 역사 속에서, 현재에서 전문직 여성으로 우뚝 서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2011년 8월 30일 반구대암각화와 함게 세계적인 암각화 유물인 국보 147호 천전리 각석에 들로 세긴 '이상현이라는 낙서가 발견됩니다. 위치는 오른편 하단 쪽입니다.' (p. 65)

수많은 외침으로, 혹은 도굴단에 의해 우리의 문화재를 약탈당하고 도난당한 사례가 적잖다. 그리고 이처럼 어리석은 사람들에 의해 훼손된 우리의 유물은 얼마나 부지기수인가. 전 국토가 문화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흔하다지만, 5천 년 역사를 유유히 지나온 산 증거들을 관리 소홀과 더불어 사람들의 잘못된 문화재 인식이 이처럼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낳기도 한다. 그래서 이제 유물을 만나러 가면 으례히 낙서나 이름도 발견하겠구나,라고 생각하게 된다. 문화재 위에 자랑스레 새겨진 이름을 보는 우리들 마음에는 상처가 차곡차곡 늘어난다. 나만 기쁘면 되는 생각, 한순간 뽐내고 싶은 치기. 그로 인한 결과를 생각해 보면 좋겠다. 우리 시대, 우리 유물, 전 세계에 알리는 우리의 대표 얼굴이라는 것을 잊어버리면 안 되겠다. 

<보이는 것은 아주 작습니다>는 이처럼 우리에게 잘 알려지지 않고 놓치기 쉬운 우리 역사, 조금 엇나가 자신들의 입맛에 맞게 포장된 그들의 역사를, 포장지를 하나하나 풀어내려 가면서 제대로 실체를 바라보도록 하고 있다. 

내가 다시 대학 새내기로 돌아간 듯한 설렘을 느끼게 만드는 로맨스 미스터리를 만났다. 아, 캠퍼스가 그리워지는 순간이로구나.
 
취연 동호회에 가입 후 '술잔'이라는 별명을 얻게 된 사카즈키 조코는 아역 출신 배우지만 사람들이 자신을 알아보는 것이 싫다. 앞머리는 내리고 안경까지 쓰며 자신의 모습을 철저히(?) 감추고 있다.  재수까지 해서 자신이 원하는 대학에 합격하고 추리 동호회에 가입하기 위해 어슬렁거리는 도중 바다 밑바닥 같은 눈동자와 만난다. 바라보고 있으나 아무것도 담지 않은듯한 눈동자로 "너는 여기야."라는 말과 함께 조코를 취연 동아리에 가입하게 만든 장본인 미키지마 선배를 말이다. 자신이 원했던 동아리는 추연(추리 연구회)이었으나 한 끝 차이의 오해로 취연(취리 연구회)에 가입하게 되고, 본격적인 취중의 세계로 빠져본다. 정작 우리의 주인공 조코는 아무리 먹어도 취하는 법이 없지만서도.
 
이 작품은 총 5개의 에피소드로 구성된 미스터리다. 단 거기에 하나를 덧붙이자면 청춘과 낭만을 만끽할 수 있는 로맨스 미스터리라고나 할까. 각  에피소드에는 반드시 해결해야 하는 하나의 미스터리가 있고 매 에피소드마다 사랑 이야기가 존재하며, 각각의 에피소드를 지날 때마다 조코와 미키지마 선배의 감정의 진폭이 조금씩 커지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어쨌든 1년간 우리한테 맡겨 보라고." (p. 10)
 
술 마시는 동호회에 1년을 맡기면 어떻게 된다는 것일까.
그리고 말이다. 추연은 무슨 뜻인지 알겠는데, 취연은 도대체 무슨 뜻이란 말인가. 바로 이것을 연구하는 뜻이란다.
 
'취, 취, 취취취취, 취하면 멋진 이치가 보인다.
취, 취, 취취취연, 마시면 당신도 이치가 보인다.' (p. 86)
 
음? 아!
  
벚꽃이 만개한 봄날, 가로등에 의지하며 조금은 쌀쌀한듯한 바람과, 저 멀리서 어슴푸레 비쳐오는 달빛 아래서 새내기들의 설레임이 한데 어우러져 캠퍼스에 앉아 술 한 잔 기울어보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뭐가 그렇게 중차대한 일이라고 친구에게 대출 부탁하거나 그것도 안되면  과감히 강의를 째기도 하면서 그렇게 술 한 잔에 선후배 모여 두런두런 이야기꽃을 피우던 그 시절 우리의 조코는 취연 동아리에서 소소하지만 미스터리 한 사건들과 맞닥트린다. 
 
초저녁부터 시작한 술자리에서 갑자기 사라진 조코의 기숙사 동기 에리카의 미스터리 하나. 서서히 대학 생활에 적응해갈 무렵에 걸리게 된다는 '고독인가 연애인가 병', 그 병에 걸린 '실로폰'이라는 별명의 우치노는 왜 사귀는 여자에게 데이트 날 바람을 맞았을까에 대한 미스터리 둘. 해변으로 떠나게 된 MT, 취연 동아리 회장(미키지마)의 전 여친과 함께 나타난 그녀의 남자친구는 왜 미키지마 아닌 부회장과 술로 맞짱을 떴는지가 하는 미스터리 셋. 150kg에 해당하는 축제 전단지 3만 장은 누가 훔쳤는가라는 미스터리 넷. 마지막으로 조코의 아버지가 밀어붙인 약혼식에서 조코의 약혼자를 쓰러트린 아리따운 범인은 누구인가라는 미스터리로 대 단원의 막은 내린다. 미키지마 선배가 조코에게 말한 그 1년을 3개월 앞둔 시점이다.
 
미키지마는 취한 듯 안 취한 듯, 깨어있을 때나 술에 취했을 때나 약간은 풀어진 모습으로 조코 옆에서 사건들을 명쾌하게 풀어나가고 있다. 아무것도 담기지 않을 듯해 보이일지언정 그의 예리한 눈을 피해 가는 방법은 전혀 없다. 우리들은 조코와 같이 호흡하며, 같은 감성과 고민으로 자리를 함께하지만 미키지마를 통해 듣게 되는 날카롭고 명석한 풀이는 혀를 내두르게 한다. 다만, 모든 미스터리들이 해프닝에 가깝고, 어쩌면 청춘들의 뜨거워진 가슴으로 흐려진 눈 덕분에 생건 것일지도 모르지만.
 
거의 사계절에 해당하는 시간 동안 조코는 미키지마 선배와 같은 동아리원들과 동고동락하며 추연이 추구하는 주도(酒道), 아니 취리(酔理)에 푹 빠지게 된다. 그들의 구호대로 취하면 이치가 보이기 때문에. 
 
각각의 에피소드 속의 사연들은 각기 하나의 고유한 특성을 가진다. 그러면서도 다섯 편의 에피소드는 분리됨 없이 유려하게 이어지고 있다. 로맨스답게 조코가 사랑을 조금씩 알아가듯 미키지마 선배 역시 조금씩 조코에게 자신의 마음을 표현한다. 대학 청춘답게 유쾌하고 기분 좋게, 그리고 살짝살짝 설렘도 안겨 주면서. 그래서 더 풋풋하고 젊은 향기가 폴폴 풍기는 것 같다. 
 
갓 들어간 대학, 꿈도 많고 그만큼 고민도 많을 나이. 조코가 자신만의 번뇌와 싸웠듯이 미키지마가 아무리 술에 절어 생각 없이 생활하는 것처럼 보였을지언정 그 역시 꿈을 향한 고민은 계속되었나 보다. 그래서 더욱 공감되고 지난 옛 추억이 새록새록 생각나게 만드는 작품이었다. 아, 싱그러운 청춘이여. 그들의 고민과 방황이, 사랑이, 이렇게 예뻐 보일 수 없다. 어쩌면 많이 어긋나 보이고, 엉뚱해 보이는 그들이었지만, 이야기들을 전부 다 듣게 되면, 술이 익어 깊은 맛을 내듯 그들의 삶도 맛있게 익어갈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어 흐뭇한 웃음이 절로 나온다.
 
이 작품에서는 조코가 속한 동아리가 취연이기 때문에 당연히 다양한 술 종류가 나온다. 나는 술을 거의 못 마시기 때문에 술을 잘 모른다. 일본 술이라는 이유도 있겠지만 전혀 생소한 술 이름이 많이 나오고 그 맛에 대한 평가도 각각인데, 아마 내가 조금만 술에 조예가 있었다면 더 재미있게 읽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다. 물론 몰라도 읽는데 전혀 상관없지만. 그래도 술을 모르는 나에게 이 작품은 오히려 술을 알고 싶다는 욕구를 만든 작품이었다고나 할까. 
 
'청춘은 긴 터널에 분명했다.
우리들은 그저 마구 그 안을 달리는 유령일지도 몰랐다.
그래도 터널 안에서 뿅 하고 밝혀진 등불을 만난다면 그걸 놓쳐서는 안된다
꽃 불빛인지, 달 불빛인지,
눈 불빛인지 알 수 없지만,
그걸 의지해,
더듬거리면서 어둠 속을 나아가는 것이다.' (p. 250, 251)
 
마구 달리는 이름 없는 영혼, 나비들. 그렇게 청춘들은 들끊는 열정과 반대로 출구가 아득한 긴 터널을 답답하게 더듬어가며 팔랑이는 나비라는 이름의 유령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 길, 저 길을 끊임없이 탐색하고 헤쳐나가다 보면 자신만의 찬란한 이름을 갖게 되리라. 여기 조코와 미키지마가 자신들의 이름을 찾아가듯이 말이다.
 
청춘과 캠퍼스 그리고 사랑을 소소한 미스터리와 함께 맛있게 버무렸기에 벚꽃이 만발한 이 계절, 딱 읽기 좋은 작품이다.

 

제대로 섬찟한 책을 만났다. 읽으면서 오돌오돌 떨기만 하는 이 새가슴이란.

"크리피는 원래 '벌레가 기어 다니는 듯한'이라는 뜻이야. 그게 변해서 '기분 나쁜, 소름 끼치는'이라는 뜻으로도 사용돼. (중략) 맨슨 신봉자들이 살해할 목표를 찾아서 할리우드 주변을 돌아다니는 걸 나타내는 데 딱 맞으니까. 그것도 사람들이 붙인 게 아니라 자기들이 그렇게 붙였다더군." (p. 95)

여기서 맨슨은 마릴린 맨슨이라는 뮤직 아티스트로 그의 노래에서 등장하는 과격한 언어표현과 퍼포먼스 수많은 팬들을 양성했으며, 일부 신봉자라 자처하는 사람들 중 '크리피'라는 이름을 자신들 스스로 붙였다고 추측된다. 정말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히지 말입니다.

뜻을 알고 작품을 읽어 나가니까, 이다지도 딱 맞아떨어질까 하는 생각이다. 범죄자들의 대부분이 크리피하다. 어슬렁어슬렁 자신이 범행할 곳을 돌아다니다가, 즉 우리 주변에 기생하며 기어 다니다가 범죄를 저지르는 것이 맞다. 이 작품에서 니시노는 그중 탑이 아닐까 싶다. 적확하게 일치하기에 등골이 서늘하다. ​

스토리에 들어가 보면, 중년의 다카쿠라는 대학에서 범죄심리학을 가르치는 문학부 교수다. 그는 아내와 단출하게 이웃과 떨어진 한적한 주택가에 살고 있다. 앞집은 아흔이 넘은 노모(老母)를 모시는 나이 든 딸과 함께 살고 있고, 옆집은 다카쿠라 부부가 이사 오기 10년 전부터 거주했다는 중년의 부부와 남매가 살고 있다. 다만 그 부인과 아들의 얼굴은 본 적이 없는 정도랄까. 이렇게 세 집은 이웃과 공터 하나로 주변 이웃들과 고립된 형태이다. 

대학에서 강의를 하고 본인 논문도 쓰고, 젊고 예쁜 졸업생 린코의 논문도 봐주기도 하고, 그녀와 가끔 식사도 같이 하면서 다카쿠라는 평범한듯한 일상을 살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어느 날 경찰에게서 여중생 폭행 사건으로 인한 불시 검문을 받게 된 후로 뭔가 조금씩 틀어지기 시작한다. 고등학교 동창이라고 밝힌 형사 노가미가 8년 전 일가족 실종 사건을 의뢰해 오고, 애제자 린코는 과 동기에게 스토킹을 당하고, 뭔가 미심쩍어 보이던 중년의 앞집 남자를 그의 중학생 딸이 자신의 아빠가 아니라며, 부정한다. 이 모든 것들이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 혼란스러운 가운데 한밤중에 노(老)모녀가 살고 있는 집에 화재가 발생하게 되고, 앞집의 그 중학생 딸은 아빠에게서 자신을 도와달라는 간곡한 요청까지 한다. 

자신에게 사건 의뢰한 동창 노가미는 그 후 연락이 없다. 그리고 화재현장에서 머리에 총상 입은 2구의 시체 외에 또 다른 시체 한 구. 노가미와 이혼한 전 부인에게 받게 된 편지 한 통으로 노가미가 어떻게 죽게 되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그가 의뢰해온 사건과 다카쿠라 자신이 살고 있는 고립된 형태의 주거 환경이 비슷하다는 이야기가 머릿속에 맴돈다. 마치 범죄가 일어날 것을 예언한 듯한 노가미의 말과, 그의 부인을 통해 받은 편지에서 자신의 종말을 암시하는 말들은 모두 하나를 지칭하고 있다. 하지만 이것도 허구와 사실을 교묘하게 섞은 것으로 10년이 지난 후, 노가미의 전 부인인 소노코를 통해 알게 되는 놀라운 반전이란.

"그 사람은 아빠가 아니에요."
"전혀 모르는 사람이에요." (p. 133)​​

이 작품을 읽으면서 처음 드는 생각은 나는 과연 이웃을 얼마나 알고 있는가이다. 사실 현대를 살면서 가장 취약하다고 생각되는 것이 바로 이웃과의 교류이다. 전통적인 농경사회는 두레를 해서든 품앗이를 해서든 서로 협력할 수밖에 없었다. 내 집 앞이 일터고, 생활전선이었다. 혼자서 논밭을 일구기는 어렵기 때문에 봄철, 혹은 가을철 이웃 주민들과 협력하여 봄에 씨앗을 뿌리고, 가을에 추수해야만 하는 환경. 하지만 지금은 어떤가. 아침에 집을 나가면 퇴근 후 돌아오기까지 집은 비어있고, 집에 왔다손 치더라도 저녁 이후는 거의 나가지 않기 때문에 이웃과 접촉하기 힘들다. 반상회가 있다 하더라도 직장에 다니는 바쁜 현대인들에게는 나가지 않아도 면책특권이 되고, 주말에는 아이들과 놀이동산으로, 산으로 바다로 온전히 가족만의 시간을 즐긴다. 아이들도 오죽하면 주위에 친구들이 없어서 친구들 만나려고 학원을 다닐까. 

아파트나 빌라에 사는 나홀로족이 성폭행 범죄의 타깃이 된다는 것은 뉴스를 통해 심심찮게 보게 되고, 그래도 앞집 숟가락 개수까지 알고 있다는 시골에서는 독거노인들이 사기꾼들의 갈취 대상이 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집의 지리적 상황마저 고립되어 있다면, 이것은 완벽하게 사람들과의 사각지대에 놓이게 되는 것이 아닐까. 현대인들의 소원한 이웃 교류와 인적이 드문 주택가는 완벽한 고립무원 상태를 유발한다. 옆집에서 불이 나도, 범죄가 발생해도 알아채지 못하는 상황이 발생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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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군다나, 이 작품에서처럼 완벽한 악인, 악의 천재라 지칭할만한 야지마 같은 사람이 주변을 지나치게 된다면 그다음은 범죄의 표적이 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리라. 니시노​ 행세를 하고 있는 야지마는 선천적으로 완벽한 정서 결핍인 사이코패스다. 보이시한 느낌의 여중생에게 변태성욕을 느끼고, 학교에서 1, 2등을 다툴 정도로 뛰어난 두뇌를 이용해 사기행각을 밥 먹듯이 저지르며, 완벽한 살인과 사람의 심리와 주변 환경 등 모든 것들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이용하는 치밀함까지. 따라서 그가 있었던 가정에서조차 무소불위의 권력을 이용해 부모를 제압했으며, 형제들의 심리를 이용했고, 사람들을 유린했으니 이 책에서처럼 완벽하게 이웃을 속이고 아빠 행세를 할 수 있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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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악역이 충만하기에 끝까지 긴장감을 유지한 채 읽을 수 있었다. 그리고 이 작품을 읽는 묘미는 현대사회가 안고 있는 병폐 문제 중, 이웃과 교류 없이 점점 고립된 채 살고 있는 우리들의 문제를 꼬집은 것이라 하겠다. 그리고 내 이웃은 과연 내 이웃이 맞을까 하는 섬뜩한 물음이다. 또한 나는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까지 던지게 된다. 더불어 후반부에 등장하는 반전으로 뒤통수를 호되게 후려맞기 때문에 이미 공포의 늪에 빠져버린 독자들을 얼빠지게 만들기도 한다. 처음부터 끝까지 쉴 틈 없이 쫄깃한 심장으로 읽은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