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타지라는 영역은 여성작가들에게는 미개척지였다. 과학적 이론과 정치적 이념, 인간 평등과 인권 존중에 입각한 민주주의, 그리고 살짝 가미된 로맨스까지 두루 갖추고, 완성도까지 끌어올리며 인기를 끌었던 작품들 태반이 남성 작가에 의해 쓰여졌기 때문이다. 따라서 철저하게 남자 주인공의 관점으로 길들여진 독자들에게 그와는 사뭇 다른 여성을 주인공인 원탑으로, 로맨스보다는 모험을, 모험을 넘어 정치적 야심을 실현시키는 여성작가들만의 판타지 작품들을 읽다 보면 묘한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된다. 아마도 이것은 페미니즘의 발로 때문 아닐까 생각되는데, 현 추세대로라면 아니 앞으로는 더더욱 여성 원탑의 판타지 소설이 인기를 끌 것이라 추측 되어진다. 이런 가운데 이번에 황금가지 출판사에서 강력한 작품이 나왔다. 25살의 아리따운 작가가 쓴 것이 맛나 싶을 정도의 짜임새가 있는 이 작품은 판타지 소설치고는 독특한 문체와 장르를 넘나들며 자랑하고 있었는데, 우선은 짧게나마 줄거리부터 이야기하고 넘어가자면.

노르타 왕국에서는 피 색깔에 의해 철저하게 계급이 나뉘는데 평범한 '적혈'과 그들 위에서 군림하는 초능력을 가진 '은혈'이 그것이다. 우리의 주인공 메어 배로우는 적혈이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낮은 신분이다. 취미이자 특기가 소매치기인 그녀는 세 명의 오빠들이 그래왔듯, 그리고 적혈이면 누구나 그렇듯 18살이 되면 징병되어 은혈들의 총알받이 신세가 될 예정이다. 그녀의 소꿉친구인 킬런 또한 징병되어 끌려 갈 위기에 처하게 되고, 이를 피하기 위해 필요한 돈을 마련하려고 메어는 특기를 살려 은혈들의 세계에서 소매치기를 하려고 한다. 하지만 일은 꼬이게 되고 어떻게 된 건지 메어는 왕궁에 끌려가게 되어 그곳에서 자신이 적혈임에도 초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왕과 왕비는 그녀의 능력을 감추기 위해 서둘러 둘째 왕자 메이븐과 약혼을 시키지만 사실 메어는 소매치기로 곤란한 상황이었을 적에 잠시 마주친 적 있는, 자신에게 더없이 상냥한 왕세자 칼에게 호감을 느끼고 있던 참이다. 셋째 오빠의 죽음으로 은혈들에게 더욱 반감을 갖고 있던 메어는 적혈과 은혈의 평등을 주제로 한 메이븐의 열렬한 이상의 실현 이야기에 설득당해 적혈들로 뭉친 반란군 '진홍의 군대'와 함께 일을 도모하게 된다. 이것이 왕비를 중심으로 한 왕자들의 권력 다툼에서 장기말로 쓰여졌다는 것을 모른 채 말이다.

판타지의 세계를 그릴 때 디스토피아적 관점에서 그리기 때문에 평등과 민주주의라는 현대의 시각에서, 특별히 신분적인 부분만 과거로 회귀해 완벽한 계급주의(봉건주의) 사회를 상상하기란 그리 어렵지 않다. (물론 현대인들이 물질만능이라는 신계급주의에 살고 있는 것은 어느 정도 동조하지만) 미래에서 특히나 부족한 자원으로 인해 부와 권력에 따라 계급이 재배열되었을 때, 어떤 세상이 펼쳐질 것인가라는 우울한 예측을 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 작품에서는 그 신분이 타고난 피의 색깔에 의해 결정된다는 설정이다. 의도적으로 권력이든 부(富)든 있는 자와 없는 자로 신분을 나눈 것이 아닌, 태어날 때부터 이미 다른, 도저히 변할 수 없는 형질의 것으로 계급이 이분화되었다. 아무 능력 없이 평범하게 태어나서 살아가야 하는 적혈, 다양한 초능력을 보유한 채 태어나고 은색 피를 가진 은혈로서 말이다. 색의 차이는 능력의 차이를 만들고 계급을 확정한다. 둘은 섞이려야 섞일 수 없고 화합하려야 화합할 수 없다. 피지배자와 통치자, 억압받는 자와 누르는 자, 뜨거운 피와 차가운 피, 적혈과 은혈은 그렇게 완벽하게 양분되어졌다.

왕궁 생활을 하며 적혈들의 인권을 착취하고 있는 은혈. 그들에게 끊임없이 저항하고 있는 '진홍의 군대'는 은혈에게는 반란군이지만 적혈들에게는 저항군이다. 메어는 이 계급사회인 노로타 왕국의 시스템이 잘못되어 있다는 것을 알지만 이 세계에 저항하기 위한 행동을 섣불리 옮기지는 못하고 있었다. 그녀를 깨우고, 설득하고 저항군의 한 영역으로 서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리기도 한다. 그녀에게는 은혈의 세계가 보호되기 위해 적혈들을 착취하는 것이 정당화될 수 없듯이 세상을 뒤집기 위한 방편으로 은혈들을 죽여야 한다는 것 또한 받아들이기 힘들다. 그 대척점에서 혼란을 겪기도 한다.

'누구든 누구라도 배신할 수 있어' (2권 p. 223)

이번 <적혈의 여왕>편에서 관통하는 문장은 이것이 아닐까 싶다. 완벽한 계급주의를 표방하는 노르타 왕국에서 왕자는 은혈임에도 적혈의 편에 서서 이상향을 메어에게 심어주고, 메어는 은혈임에도 믿고 의지하며, 가끔 죄책감도 가졌지만, 그에게 철저하게 놀아났다. 무엇보다 자신이 좋아하던 왕세자마저도 이상향이 다르다는 이유로 그 손을 놓아버리며 선택한 결정이었기에 심적 치명상은 대단하다. 언제 어디서나 자신에게 위기가 닥쳐오면 그때마다 구해주었지만 전혀 다른 곳을 바라보던 왕세자, 그의 그늘에서 아버지인 왕의 사랑을 받지 못해 일그러진 마음의 소유자일지라도 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다고 생각했던 왕자였기에 이것은 또 다른 대척점일 수밖에 없다.

자신의 모습을 투영하면서까지 믿었던 사람에게는 배신을 당하고, 반대로 놓아버렸던 손은 여전히 메어 자신을 구하는 아이러니라니. 하지만 이를 겪은 후 메어는 그 혼란 속에서 자신이 나아가야 할 바를 '스스로' 깨닫고 성장해 나갈 것이라고 생각한다.

무엇보다 이 작품이 마지막으로 달려가보니, '누구든 누구라도 배신할 수 있다'는 것이 그 사람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닐 것 같다는 암시를 살짝 받게 된다는 것이다. 어쩌면 노르타 왕국은 적혈 위에 군림하기 위해, 그리고 그들만의 나라를 지키기 위해 자신들과 동등한 능력의 소유자인 적혈들을 찍어 누르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진실을 은폐하고 적혈의 힘을 억제하며, 적혈들을 억압하면서 말이다. 혹시 그렇지 않더라도, 적혈 위에 세워진 은혈의 성은 만인의 이름으로 다시 세워져야 한다. 피부색이 다르든 눈동자 색이 다르든 다 같은 사람이듯, 노르타 왕국처럼 설령 피의 색이 다르다 할지라도 누구나 존중받아야 하며, 자유와 평등 속에서 인권을 지키며 살아갈 수 있어야 하기 때문에. 그렇다. 메어는 그래서 그녀가 함께하는 '진홍의 군대'와 전진할 수밖에 없다.

"칼날 위에 있는 세상이 보인다. 균형이 맞지 않으면, 세계는 무너지겠지." (1권 p. 250)

이 작품에서 메어와 대치되는 듯 짝을 이루는 인물이 칼이다. 노르타 왕국을 유지시키고, 아버지 세계를 지키는 것만 최선이라고 생각했던 칼은, 아슬아슬 칼날 위의 줄타기 속에서도 그는 메어를 선택할 수 없었다. 자신은 정치가가 아니고 군인이기에 충성심 하나로 사랑을 놓아버렸다. 하지만 자신이 알던 세계가 무너지는 상황에서 그 역시도 또 다른 선택을 해야만 하는 상황이 올 것이다. 여전히 은혈의 세계를 지킬 것인지, 아니면 모두가 화합하는 세계를 만들 것인지 말이다. 메어와 그 무리들이 목적지를 향해 달리기 때문에 칼의 세계관은 넓어질 것이고 그도 함께 성장하리라 믿어 의심치 않다.

이 작품을 읽다 보면 동적인 감정 표현과 대사처리로 인해 고개를 갸웃하게도 하는데, 이런 사뭇 다른 희곡적 문체는 아마도 저자 빅토리아 애비야드가 극작과 출신이라 더욱 그런듯하다. 코앞에서 연극 무대를 보는듯한 느낌이 들 정도로 노르타 왕국에서 메어가 겪는 모든 상황 사황이 내 눈앞에 펼쳐지는 신기한 경험을 하게 된다. 이와 같은 색다른 방식의 문체는 판타지 소설과 결합하여 독자들에게 극한의 긴장감 유지시키며 한 호흡이라도 놓칠 수 없도록 몰입감을 유도한다.

빅토리아 애비야드의 색다른 시도 속에 새롭게 탄생한 판타지 <레드 퀸: 적혈의 여왕>은 과연 우리의 주인공 메어 배로우가 레드의 혈통을 가지고 퀸이 되면서 두 세계를 어떤 식으로 화합하게 될지 기대감을 갖게 만드는 작품이다. 이제 시작이다. 그 긴 여정 속에 메어가 적혈의 신분을 딛고 퀸이 되는 과정은 험난하고 고될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메어의 인간애에 대한 고민이 계속되기 때문에 우리는 메어를 믿고 따르게 될 것이다. 자, 이제 다시 원점으로 돌아갔다. 아니, 같이 걷게 될 동지를 얻고야 말았다. '새벽은 적혈처럼 붉게 타오르니, 일어나라.' 어둠이 깊을수록 찬란한 여명은 가까운 것이고 내일은 반드시 새로운 태양이 떠오른다. 오직 전진뿐이다.

 

'나는 음악이에요. (중략) (프랭키) 그가 세상에 나오면서 내게서 떼어간 꽤 커다란 재능을 찾으러 왔죠.
나는 누군가의 소유물이 아나라 대여물이거든요.' (p. 10)

그런 건가요? 음악적의 재능은 제로섬과 같은 대여물인 건가요? 지구 상에는 동량의 재능이 존재하기 때문에 한쪽으로 재능이 가버리면 나머지들은 음악적 재능을 아주 적게 갖거나 아니면 잃거나, 뭐 그런 건가요. 아니면 그저 사람을 찾지 못할 때는 나무에, 풀에, 자연에 깃들어 있다가 다시 재능을 부여할 사람을 찾는 건가요. 장례식에서 그의 재능을 거둬들이고 그 재능을 나눠줄 누군가를 찾는다는... 위대한 음악씨. 대답을 해주세요.

 

우리의 주인공 프랭키가 태어난 곳은 1936년 스페인으로 내전의 한가운데였다. 엄마는 순산을 위해 성당에 갔지만 의외의 참변을 맞고 프랭키는 수녀 손에 맡겨진다. 그러나 수녀 또한 프랭키를 강물에 던져버리고, 털 없는 개에 의해 발견되어 바파는 프랭키를 양아들 삼아 키우게 된다. 프랭키는 눈먼 교사 엘 마에스트로에게 음악을 배웠고, 오로라라는 소녀를 보고 사랑을 알았다. 9살 되던 해 양아버지 바파는 사회주의자로 몰려 12년형을 아 감옥살이를 하게 되고 엘 마에스트로와 양아버지에 의해 프랭키는 미국으로 향하게 된다.

갖은 고생으로 엄마라 생각되는 사람을 찾았지만 엄마가 아니었기에 배신감은 극에 달하지만 유일하게 가지고 있던 기타와 6개의 줄, 잘생긴 외모와 천부적인 재능으로 성공에 이른다. 첫사랑 오로라와 가정도 꾸리고 음악인과의 교류 및 밴드에도 드나들며, 프랭키는 음악인으로 성공하게 된다. 그러나 성공에 따른 부담이 뒤를 따르고 아내, 오로라마저 변을 당해 아이도 잃고 술과 마약에 절어 생활하게 된다. 한차례 오로라와의 이별을 겪은 후 무대에서도 완전히 자취를 감추고 은둔으로 점철하다가 오로라와 재결합하고 아이를 입양해 키우게 된다. 자신을 버린, 이제는 노파가 된 수녀를 통해 자신의 출생에 관해, 부모에 관해 진실을 알게 되고 노파를 미워했던 마음은 마지막 무대를 통해 용서라는 이름을 갖는다.

'누구나 살아가는 동안 어느 밴드에든 들어가죠. 여러분의 연주는 항상 누군가에게 영향을 미치죠.
가끔은 온 세상에 영향을 미치기도 해요.' (p. 550)

이 작품을 통해 우리는 프랭키 프레스토라는 위대한 음악인을 만나게 된다. 그의 출생의 비밀에서부터 어떻게 음악을 접하게 되었는지, 운명과도 같은 친 아버지와의 만남. 그리고 그로부터 사사 받은 음악적 지식, 천부적 재능이 어떻게 빛을 발하고 어떤 무게로 다가오게 되는 말이다. 책을 읽으며 나는 그를 만나는 내내 나는 어떤 음들에 둘러싸여 있어야 했다. 그 음들은 경쾌해서 나를 기쁘게 하는 것이 아닌, 어쩌면 흑인 재즈같이 서글퍼서 블루 빛깔로 뒤덮인 방 한가운데에 놓여있는 기분을 느끼게 했다. 아니, 어쩌면 프랭키가 엘 마에스트로에게 제일 처음 들려준, 그리고 그의 생애 마지막에 연주한 '라그리마' 음률일지도 모르겠다.

"전 언제 음악 공부를 끝낼 수 있나요, 마에스트로?"
"절대 끝낼 수 없어."
"절대로요?"
"넌 알아야 하는 모든 것을 전부 깨우치지는 못해. 죽는 날까지 배워야 하지. 그런 다음에야 다른 사람에게 영감을 줄 수 있지. 그것이 예술가의 삶이란다."
"영감이 무슨 뜻이에요?"
"네가 음악을 사랑하는 방식대로 다른 사람도 음악을 사랑하게 하는 거란다."
"그럼 그들도 저처럼 연주를 하고 싶어 하나요?"
"그럴지도 모르지."
"제가 정말로 그럴 수 있을까요?"
"말로는 부족하지." (p. 544)

음악에도 혼이 있다면, 혼은 자신을 알아봐 주는 사람에게로 재능이라는 이름으로 스며드나 보다. 우리의 프랭키가 천진난만한 이름으로 스펀지처럼, 아니 블랙홀처럼 음악을 받아들이고 또 자신이 음악 자체가 되어가는 과정들을 그와 함께 혹은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과 같이 동참하게 된다. 때로는 상실과 아픔, 배신이라는 이름으로, 때로는 사랑이라는 이름의 '혼'이 되어버리는지도 모르겠다. 그 속에서 잠시 음악은 뒤로 물러나기도 하지만 결국 프랭키와 음악은 서로를 이해하게 된다. 이때 중요한 건 음악이란 것은 살아 있어서 프랭키를 통해 존재감을 내뿜기 때문에 그 위용이 전방위적으로 뻗어나간다는 것이다. 따라서 음악이란, 나만의 홀로 즐기는 것이 아닌 사람과 사람을 연결하고 영혼과 영혼을 연결하며, 누구라도 교감하며 소통하는 힘을 지니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감내해야 되는 고통이 따르고 그것을 승화했을 때 한 인간을 넘어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자리매김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

"다시 손가락 연습을 해보자."
"이 굳은살들은 보기 싫어요."
"나중에 없어질 거야."
"그러면 아프지 않게 되나요?"
"조금만 있으면."
"그렇다면 음악은 고통이 아니네요?"
프랭키는 자신의 첫 번째 기타를 잡고 있는 딸을 쳐다보았어요. 그는 가슴이 부풀어 오르는 것을 느꼈어요.
"항상 고통스러운 것은 아니란다."
그가 말했어요. (p. 487)

이제 프랭키는 음악의 스승이자 친아버지인 엘 마에스트로조차 몰랐던 것을 알게 되었다. 음악이란, 자신에게 주어진 재능을 가지고 살아왔던 삶이란 결코 고통스러운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말이다. 그래서 그는 자신에게 깊숙이 박혀 있던 쓴 뿌리를 거둬낼 수 있었다. 용서라는 이름으로, 또 다른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면서.

<매직 스트링>은 프랭키의 삶을 통해 나조차도 음악에 사로잡히게 만들기도 하고, 여러 번 울컥하게 한 작품으로 꼭 한번 읽어보시길 권해 본다.

언제 읽었는지 기억나지도 않을 정도로 오래전에 읽었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꿈속에서 앨리스가 토끼를 따라가며 몸이 커졌다 작아졌다 하기도 하고, 다양한 동물들을 만나 때로는 이해하지 못하고 때로는 엉뚱하기도 한 이야기 속에 함께 한다. 회중시계를 바모 늘 바쁘다고 외치는 토끼, 담배를 피우는 애벌레, 체셔 고양이, 험프티덤프티, 사형선고를 입에 달고 사는 여왕 등 너무도 다양한 인물들에 기상천외한 이야기들은 때로는 무슨 뜻인지 몰라 헤매기도 했었다. 그 후속편인 <거울 나라의 앨리스>가 나왔다. 팀 버튼 감독에 의해 영화로도 만들어질 예정이라는 게 이 책인지는 모르겠지만, 여전히 기상천외하고 여전히 엉뚱하고 여전히 말장난을 즐긴다.

'저기, 거울 속의 있는 방이 보이니? 방 안에 있는 물건들이 전부 반대 방향에 있다는 것만 빼면 우리 거실이랑 똑같이 생겼어. (중략) 그 부분은 우리 집 복도랑 정말 비슷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부분은 우리 복도랑 완전히 다를지도 몰라. 키티! 우리가 거울 속의 집에 들어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분명 그 안에는 아주 아름다운 것들이 가득할 거야!' (p. 19, 21)

한 겨울 속에서 집에서 고양이들과 투닥거리며 장난을 치고 있는 앨리스는 이번에 거울을 통해 여행을 떠나게 된다. 매일 보는 거울, 그러나 정확히 좌우만 바뀐 채 비추어 주는 형상들을 보면서 같으면서 다른, 거울 속 세상을 상상하며 궁금해한다. 그리고 앨리스는 거울 속 세상에 직접 들어가 보게 된 것이다. 평상시 궁금하던 벽난로의 불은 타오르고 있었고 체스 말들이 짝을 지어 움직이고 있었던 것이다. 붉은 왕과 붉은 여왕, 하얀 왕과 하얀 여왕, 룩, 폰 등을 구경하다가 바깥 정원으로 나오고, 그곳에서 키가 커진 붉은 여왕을 필두로 앨리스는 자신도 체스판의 장기짝처럼 칸을 옮겨가며 다양한 인물들을 만나고 거울나라를 탐험하게 된다.

"어쩌면 그럴 수도 있어. 만약 그게 맞다면 그럴 수도 있어. 하지만 그렇지 않으니까 아닌 거야. 그것이 논리란 거야." (p. 83)

루이스 캐럴의 본명이 찰스 루트위지 도지슨이고 수학자라고 알려져 있듯이 그의 이야기는 상상의 세계라고 규칙이 없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더욱 논리적이고 더욱 수학적이다. 억지에 가까운 이야기들은 글을 끝까지 읽어나가다 보면 앞과 뒤가 충실히 연결되어 있음을 알게 된다. 어떻게 보면 미스터리와 같기도 하기에, 추리소설에서 이 이야기들을 많이 차용하는 것이리라.

이번 작품을 읽다 보면 또한 느낄 수 있는 것이 언어유희라고 할 수 있는 말장난이다. 요즘 세대에선 드립이라고 표현하던데. 같은 낱말의 다양한 표현이나 같은 발음의 다른 표현 등은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서도 충분히 맛봐 왔지만 여기서도 어김없이 등장한다.

"아무도 안 보이던데요."
"나도 너처럼 눈이 밝았으면 좋으련만."
"'아무도'를 볼 수 있다니! 쳇, 이 정도 밝은데도 나는 진짜 사람만 보는 게 고작 이거든."
('아무도 안 보인다'를 영어로 'I see nobody'라고 하지만, 문법을 무시하고 단어만 보면 '나는 아무도를 본다'가 된다. 옮긴이) (p. 158)

"'밀가루'로..."
"그 '꽃'은 어디서 따는데?"
('밀가루'와 '꽃'의 철자는 각각 'flour'와 'flower'로 다르지만 발음이 같다. 옮긴이) (p. 212)

뭐, 우리나라도 이런 말장난 중에 '눈에 눈이 들어가면 눈물인가, 눈 물인가.' 혹은 '아버지가방에들어가신다.'의 띄어쓰기에 따라 뜻이 달라지는 표현, 그중 가장 센 것에는 경상도 사투리를 접목한 '가가가가가?'도 있지 않은가. 최근에 내 조카인 초등학생 입을 통해 '오렌지를 먹은 지 얼마나 오랜지.' 라는 말을 듣고 그야말로 웃퍼서 혼나기도 했는데 이런 언어유희야말로 언어가 수학인 듯 더하기 빼기를 시켜가며 아이들에게 한껏 재미를 주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예를 들면, 지금 감옥에서 벌을 받고 있는 왕의 전령이 하나 있는데 다음 주 수요일까지도 재판이 시작되지 않을 거란다. 물론 죄는 제일 마지막에 짓게 될 테고." (p. 114)

이 작품의 주제가 <거울 나라의 앨리스>이기에 가장 강력하게 등장하는 것이 원인과 결과의 순서가 바뀐다는 것이다. 죄를 짓기도 전에 벌을 받고 있는 전령이나 케잌을 잘라서 나눠 주는 것이 아니라, 나눠 준 후 자르는 이런 사소한 것들이 바로 '거울나라'이기에 바뀔 수밖에 없는 것이다.

가끔 나도 어린 시절에 몇 번은 거울 속의 세상을 향한 상상의 나래를 펼쳐본 적이 있다. 하지만 그곳은 판타지와 모험이 가득했지, 이렇게 논리로 좌우되진 않았었다. 그것을 루이스 캐럴은 그가 할 수 있는 언어적 유희와 기상천외한 이야기들을 그의 탄탄한 공식 아래 펼치고 있다. 그래서 팀 버튼도 <앨리스>를 가지고 영화화 할 수 있었다고 생각된다. 영원히 자라지 않은 피터팬이 어른들에게 향수이고, 어린 왕자를 통해 사람과 사람 사이에 있어야 할 소중함을 되새길 수 있었듯이 앨리스 역시도 아이뿐만 아니라 어른인 우리들에게는 한때 존재했으나 잃어버린 상상의 세계를 현실로 만들어 주었기에 더욱 의미 있는 작품이라는 생각이다. 우리들도 한때는 아이였노라고. 그 감성들을 잠시 잊고 지내기도 했지만 이렇듯 조그만 도화선으로 우리 어른들도 아이와 같은 이상향을 바라볼 수 있노라고. 그렇기에 우리들이 살아가고 있는 각박해 보이는 세상일지라도 여전히 꿈들이 존재하기에 안심하고 아이들과 발맞추어 살아갈 수 있노라고 그렇게 눈을 반짝이게 되는 것이다.

인디고에서 나온 <거울 나라의 앨리스>는 김민지 작가의 몽환적인 그림들과 한껏 어우러졌기 때문에 아이, 어른 할 것 없이 모두 거울 나라 속으로 퐁당 빠져버리게 될 것이다. 아, 150년 동안 사랑을 받아온 작품이라는 것이 너무도 이해되지 않은가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