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해 봄이라고 생각하고 사진을 찾아봤더니 어느새 2009년 봄이었다. 경황없이 헤어질까봐 예쁜 봄 꽃 구경 갔을 때 사진을 찍어주었다. 저 즈음부터 고속도로 달리기가 조금 힘겨워지기 시작했기에 다시 오지 못할거란 생각에 찰칵! 하지만 2010년을 보내고 2011년 봄이 다가올 때까지 우려대로 다시 고속도로를 나갈 수는 없었지만 집 근처에서는 부지런히 우리를 태워주었다. 오늘까지... 오늘도 사진을 아파트 마당에서 찍어주었지만 아무래도 봄꽃의 분위기, 2년 더 젊었을 때가 더 좋지 않을까해서...저 사진을 선택하게 되었다.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는 1993년 11월 25일. 내게 큰 환영도 받지 못한 채 만났고 몇 년간은 간간이 찾아주는 나를 외롭게 기다려야했다. 그 때만해도 난 지하철이 훨씬 편했다. 여성 운전자도 많지 않을 때, 더더구나 어린 나이에 내겐 부담스런 만남이었다. 하지만 통신을 시작하고 부산을 찾아오는 벗들이 많아지면서 친구들 관광을 시켜주며 나와 더 친하게 보냈다. 남자친구들이 많았지만 운전을 하는 친구가 없었기에 항상 내가 남자친구들을 옆에 태우고 다녀야했다. 결혼하기 전까지 남편이랑 연애할 때도 그랬다. 그래서 나의 소원은 남자가 운전하는 차 옆에서 간식 입에 넣어주면서 여유있게 데이트 하는 것이었다. 남친들 연수도 해주고 결혼해서 남편 연수까지 함께 해줬던 세피아. 아이들이 부산에서 태어나서 수원까지 올 때 처음으로 타고, 아이들이 교육을 위해 여기저기 멀리 다닐 때도 늘 함께하고 남편 퇴근도 나와함께 책임졌던 세피아. 먼 곳에서 매주 달려와 준 친구를 태우고 굽이굽이 길을 갈 때 꾸벅꾸벅 졸던 친구가 ’쿵’하고 부딪히던 기억, 애인이랑 싸웠다고 새벽 댓바람에 찾아와 어디론가 데리고 가달라는 친구를 태우고 달렸던 기억, 추운 겨울날 허허벌판에 새로지어진 공연장에서 혼자 공연을 보고 나오며 눈에 띄는 커플들. ’너라도 없었음 참 처량했겠다...’라고 생각했던 기억들...결혼하고 나서 친정 오가고 아이들 데리고 여기저기 다니느라 고생도 참 많았다. 운전습관 거친 남편의 운전을 견디느라 참 수고 많았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남긴 채, 내일이면 아니 이제 오늘 날이 밝으면 이별이다. 원래는 폐차장까지 내가 데려다주려했는데 돌아서는 걸음이 마음 아플 것 같아 그냥 맡기기로 했다. 내부 외부 세차까지 깨끗하게 마쳤다. 나를 위해 18년을 수고해주었는데 마지막 가는 길 깨끗하게 단장해주고 싶었다. 애니메이션 원피스에서 메리호가 마지막까지 태워주고 싶어하였듯이 왠지 그럴 것만 같은 착각에 빠지며...하지만 기운이 조금 남았을 때, 아름답게 헤어지기로 했다.
사람이 아닌데도 마음이 저리고 이별이 아프다. 내 고운 젊은 날과 온전히 함께하고 그 이야기들을 함께 간직했을 것만 같아 그럴지도 모르겠다. 남편을 만나고 아이들이 태어나고 자라는 동안 고스란히 함께해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앞으로는 여자도 운전을 할 줄 알아야 한다고 운전면허증을 준비하라고 하시는 아빠께 필기는 합격했으니 운전학원비를 주십사했던 기억. 아마도 아빠가 며칠만 늦게 말씀하셨다면 내 돈 주고 등록했을텐데 필기합격하고 며칠 되지 않았을 때 말씀 하신 덕분에 내 돈은 굳었다. 엄마도 아빠도 단번에 붙은 실기라 떨어지면 부끄러울듯해서 살짝 따서 말하려했는데...운전면허 따자마자 아빠차를 연습용으로 내주셨고 이삼년 후 차키가 담긴 케이스를 내미셨다. 어쩜 세피아와의 헤어짐이 더 서러운건 편찮으신 아빠의 따뜻한 선물을 그 땐 고맙게 받지 못한 것이 미안해서 일까? 큰 선물을 받고도 진심으로 감사를 전하지 못했다. 일과 술이 벗인 아빠께 골프라도 쳐보시기를 권하면서 아무 생각없이 그럼 새벽마다 연습장에 모시고 가겠다고 말했는데, 담 날로 시작하신 골프. 서너달 매일 모시고 다녔다. 술 드시고 아무리 늦게 오셔도 악착같이 깨워서 모시고 다녔다. 결국 아빠가 포기하셨지만...운전 잘 한다고 칭찬해주셨던 기억. 그 때 처음으로 내가 운전하는 차를 타셨다. 그 후에도 내 차는 거의 타지 않으셨다. 차키를 살짝 챙겨두었다. 내일은 남편에게 주었던 예비키를 마지막으로 보낼까한다. 그리고 키는 그 때 그 상자에 담아둘까한다. 아빠 덕분에 운전 시작하자 쉬지 않고 계속 할 수 있었고 기동력있게 살아온듯하다. 어느새 20년이 조금 더 넘었다. 무사고 20년 베스트 드라이버~
아쉬운 헤어짐을 이렇게 달래볼까한다. 그리고 밝아오는 시간엔 새로운 만남을 준비해야겠지.
남편이 남편 차를 타다 세피아를 한 번 몰고가더니 "어떻게 아직도 탔어? 너니까 탄다." 하지만 오랜 시간 같이해서 그런지 힘들면 힘든대로 그렇게 난 잘 탔는데...97,98년쯤 기아영업사원인 친구가 차를 바꾸라고 권했는데 지난 해 봄에 차를 문의하니..."왜 더타지?" 그런다..간만에 만난 친구가 여직껏 세피아와 함께 하는걸 보고 "너네도 어지간하다." 하지만 그러고도 5~6년이 더지났으니까.. 정말 어지간했나? 정성껏 관리해준듯하다. 나는 검진도 못받고 주치의도 없지만, 세피아는 꼭 정기적으로 정비받고....부부의 정성을 듬뿍 받았다. 만족하겠지? 아이들도 못내 아쉬운지 마지막 사진을 함께 찍으려했다....함께한 시간 좋았다고, 고맙다고 말해주고 싶고.............
"마지막 밤...잘 자~~~ "
덧붙임 : 세피아는 떠나면서 새 차에 블랙박스를 선물하고 갔다. 그렇게 다른 모습으로 또 함께하겠지.
나 대신 마지막 배웅해주신 분께는 커피 한 잔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