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입도가 엄청난 작품이다.

예전에 <빅 브라더>라는 티비 프로그램이 있었는데, 출연자들의 사생활을 낱낱이 보여주면서 호감 비호감의 여부에 따라 탈락자를 가려내고 결국 우승자를 배출하는 내용이었다. 사실 뭐 사람 사는 게 나와 그렇게 다른 것도 아니고, 기껏해봐야 갈등을 겪는 게 흥미요소의 다인데 그걸 그렇게 넋놓고 봤다. 혹시라도 본방을 놓치는 날엔 녹화본까지 봤고 언니랑 하루종일 이번 탈락자는 누가 될건지 누가 가장 재수없는지 얘기하곤 했다. 애석하게도 이사를 와서 채널이 안나오는 바람에 우승자까지는 확인하지 못했지만.

헝거 게임에서는 그보다 더한 자극적 요소를 가지고 소설을 이끌어나간다. 간혹가다 싸우는 게 아닌 죽지 않기 위한, 죽이기 위한 프로그램을 실시간으로 방송하고 있다. 만약 현실세계에서 이런 걸 방영한다면 사람들은 또 얼마나 넋빠지게 볼 것인가.

지금이야 인권이 인류의 최대가치로 여겨지기 때문에 당연히 이런 프로그램은 제작부터가 난관에 부딪힐 게 뻔하다. 하지만 불과 몇 십년 전 몇 백년 전으로 건너 뛰기만 해도 사람 목숨이 얼마나 홀대받았는지 알 수 있다. 글래디에이터라는 영화 하나만 봐도 사람과 사람이 죽고 죽이는 게임에 관중들은 열광하지 않는가. 고로 <헝거게임>의 소재도 마냥 황망하다고만은 할 수 없다. 개인적인 생각으론 사실 인권은 지금 이 시점이 가장 높고, 기계 문명이 발달할수록 더 낮아질 거라 보기 때문에 미래에도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그 안에서 주인공 캣니스는 살아남는다. (처음엔 캣니스가 깻잎인 줄 알고 신기해했으나 깻잎과 캣니스는 전혀 다른 풀인 모양이다) 아주 일사분란하게 싸우고 먹고 자고 피타를 돕고 우승자가 된다. 책의 호흡이 전반적으로 바쁘다는 느낌이다. 덕분에 몰입도가 뛰어나서 앉은 자리에서 다 봐버렸다. 그리고 후편이 있다는 데서 왠지 충격받음과 동시에 납득이 갔다. 이 책이 그저 생존하기 위한 본능만을 얘기했다면 그렇게 인기있진 않았을 것이다. 느닷없이 때려죽여야되는 배틀로얄이나 온갖 짓을 해서 살아남아야하는 쏘우와 다를 게 없다. 하지만 후편에서는 나아가 권력에 대한 의문을 품고, 혁명을 꿈꾸고 개혁을 바라는 암시가 있어서, 작가가 이 이야기를 어떻게 풀어나갈지 궁금해진다.

나는 스포를 기분나빠하는 편은 아니다. 오히려 누군가 죽는다 안 죽는다 이걸 알지 못하면 조마조마해서 진득하게 책을 읽지 못한다. 알고 읽는 게 차라리 마음이 편하다. 피타가 끝내 죽을지 안 죽을지 너무 불안한 나머지 결국 후편의 결말까지 찾아봤다.

조만간 도서관 가서 후속을 빌려봐야겠다. 후속은 조금 실망스럽다고 하긴 한다만. 나도 이렇게 몰입도 높은 글을 쓰고 싶다. 빅 브라더처럼 안 보곤 견딜 수 없는 그런 글.

너무 오랫만에 글을 써서 영 엉망같기도 하다.

또 다른 편으로 생각해보면 나는 원래 글을 엉망같이 쓰는 것 같다. 발전해나가는 거지 뭐.

왜이리 요즘 기분이 들뜬 것 같지.

검색해보니 절판이란다. 절판된 책을 읽는 건 어떤 의미로는 책이 형편없이 인기가 없는 건가 싶으면서도 어떤 면으로는 이제 다시 못 구할 지 모르는 것이 내 손에 있다는 게 뿌듯하기도 하다.

알랭 드 보통에 대해 일단 알고 싶어서 가장 얇은 책으로 빌렸다. 어떤 소설가에 대해 알려면 단편집을 봐야한다고 생각한다. 단편은 소설가가 비교적 짧은 기간에 쓸 수 있고, 독자도 단숨에 소설가를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소설 <나무>와 <파피용>에 대한 나의 평은 전혀 다르다. 한쪽은 신선하고 쉽다면, 한쪽은 어렵고 관심 밖이다. 하지만 단편집이 훌륭했던만큼 베르나르에 대한 내 생각은 긍정적이다. 긴 글에서 지루함을 느낀 건 나의 역량이 아직 부족해서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사실 무슨 소리를 하는가 잘 모르겠다. 어쨌든 이 책은 새벽에 읽기에 안성맞춤이었다. 낮에 읽었더라면 작가의 감성을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다. 조금 지나치게 관계를 해석하려하고 꿰뚫어보려고 노력하는 것이 보였기 때문이다. 이 점이 나와 조금 맞지 않았다. 나는 억지로라도 세상을 해석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지금 심정으로는 평생토록 어린아이의 마음을 가지고 싶다. 어린애가 그린 그림을 누가 "잘 그렸네!"라고 말한다. 그러면 어린이는 칭찬 받았다는 사실에 기뻐할 뿐이다. 하지만 다 큰 어른의 그림을 두고 같은 말을 듣는다면, 어른은 일단 이것이 진심인지, 예의상 말하는 것인지, 비꼬는 것인지, 믿을만한 전문가의 말인지, 대중적이고 보편적인 생각인지, 자신의 신념에 맞아 떨어지는지 따져본다. 이런 것들이 세상을 '피곤하게'하고 '꿈을 흑백으로 꾸게하는' 생각인 것이다. 어떤 말로는 철들었다고도 하지만, 솔직히 그건 자신의 발목에 채워진 족쇄를 더 단단하게 죌 뿐인 것 같다. 그리하여 나는 인간 관계에서도 큰 의미를 두지 않으려하고, 쉽진 않지만 싫고 좋음의 의견을 떠올리되 흑백논리로는 치우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즉 억지로 분석하지 않으려고 한다는 게다. (사실 잘 되진 않고 아직 노력하고 있는 중이다. 도 닦는 거랑 비슷한 것 같다) 허나 알랭 드 보통의 이 단편집에서는 무조건적으로 해석하려는 그의 습관이 반영된 것 같았다.

나와 안 맞는다 해서 못 읽을 책이라는 건 아니다. 앞서 소개했던 <느낌으로 아는 것들>이나 <세상은 언제나 금요일은 아니지>에서처럼 일상에서 의미를 찾아나서는 것이지만 조금 더 어렵게 살 뿐이다. 괜히 새벽이나 한밤중 사소한 것에 그보다 더 큰 의미를 부여하고 싶을 때 읽으면 좋을 것 같다. 나와 맞지는 않다지만 작가가 싫어진 것도 아니고 오히려 인문학적인 보통의 지식엔 존경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으므로 기꺼이 다른 책도 읽을 수 있다.

아빠는 한 번만 더 이따위 음식을 차리면 페페(우리 할아버지) 집으로 가버리겠다고 했다.

 

"거짓말이라니요! 선생님, 사실입니다!"

 

그러자 담임선생님도 자로 교탁을 쾅쾅 내리치면서 우리가 야만인들처럼 행동한다고, 선생님도 정말 지겹다고, 이제 선생님도 정말 엄하게 할 거라고 소리를 질렀다.

 

빌리고 돌려주기 싫은 책이 있다. 책 도둑은 도둑도 아니라니 나쁜 생각은 아닐거다.(하지만 도서관은 돌려주지 않으면 빌릴 수 없는 시스템이 구축돼 있어 돌려줘야만 한다) <내 영혼이 따뜻했던 날들>이 그렇고, 꼬마 니콜라의 빨간 풍선이 그렇다. 꼬마 니콜라 본편은 양장으로 사버려서 돌려준다해도 별 미련 없다만, 이건 사기도 애매하고 안 사기도 애매해서 쓸데없는 욕심만 부리고 있는 것이다.

 

이 책을 '어린이실'에서 왠지 굴욕을 느끼면서 빌렸지만, 아동문학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내가 생각하는 아동문학이란 어린이들의 흥미를 벗어나면 어른에게는 감흥이 없는, 예를 들면 <무지개 물고기>나 <괴물들이 사는 나라> 정도 일 것 같다. 그림이 무진장 화려하고 알록달록하지만, 어른이 본다면 이걸 다시 양장본으로 사고싶어한다거나 두고두고 읽고싶어하진 않을 거다. 지나간 추억을 곱씹어보는데 도움이 되는진 몰라도. 하지만 니콜라는 곁에 두고 싶다. 이미 세상에 태어난 지 오십년이 지났지만 자라지도 않고 때묻지도 않고 인생이 무엇인지 고민하지도 않고 진로 결정에 애를 먹지도 않는다. 니콜라는 태어나던 순간에도, 그리고 지금도 그대로 니콜라다. 나는 갓 스무살 넘은데다 니콜라를 만난지 오래 안돼서 잘 모르겠지만, 아마 오십년 전부터 니콜라를 데리고 있던 사람들은 아직도 그 어린 소년과 좋은 친구일 것이다. 고시니의 천재적인 글솜씨, 상페의 맑은 그림이 합쳐져 바래지 않는 종이장으로 시간이 멈춘 것이다. '오십년 전 그때가 좋았지' 라고 생각하기엔 니콜라는 늘 한결같아서 어린 갈증을 채워주는 역할을 한다, 물뿌리개를 들고.

 

내가 정말 마음에 들었던 건 책 내용보다(오리 스웨터는 정말 귀여웠다!) 고시니의 아들 안 고시니의 말이었다. '니콜라의 눈 밑에서 오십년의 그늘을 발견하더라도, 우리를 슬프게 한다는 이유로 지워버리면 안된다. 그것들과 더불어 살고 상처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말에서 왠지 모를 찡함을 느꼈다. 그리고 아직 나의 글솜씨는 멀었구나 라는 생각을 했다. 

 

나는 인기있는 작가가 되고싶다. 이 말을 했다가 사람들에게 성공의 기준이 명예나 물욕에만 있다고 여론몰이를 당한적이 있는데, 그땐 빈정상해서 그냥 글을 지워버려 해명하지 않았으나 딱잘라 그 이유는 아니다. 딱히 지금 의식주 생활에 불만을 느낀 적이 없는 터라 돈은 지금처럼만 있으면 된다. 조만간 직업을 가질테니 더 가난해지지도 않을 것이다. 내가 인기있어지고 싶은 이유는, 사람들에게 잠깐이나마 마음을 따뜻하게 해주고 싶기 때문이다.

각박하지만 포기할 수 없는 스마트 세상을 살아가면서 사실 사람들은 누구보다 애정과 연민, 공감을 바라고 있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고, 어쩌다 가끔 주옥같은 책에서 위안을 받는다. 그렇다, 개중 하나가 니콜라다. 나는 그런 글을 씀으로써 옆에 있으면 머리를 쓰다듬어주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아이같은 모습으로 , 그렇지만 유치하지도 않은 선까지 사람들 옆을 기웃거리고 싶은 것이다. 새끼 강아지처럼.

정말 갈길이 멀다는 건 알겠다. 하지만 시간이 많이 남았다는 것도 안다.

방향만 똑바로 세우고 깃대를 바라보며 앞으로 가길 바란다. 그럼 언젠간 니콜라의 친구를 만들어줄 수 있을지도 모르고, 도서관에 돌려주기 싫은 책을 쓰는 인기있는 작가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