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단 사촌과의 사랑...이라는 말을 보고 금단의 사랑에 관한 내용인가 싶었다.
하지만 내용을 보니 일단 사촌과의 사랑은 그 때 시기에선 꽤나 보편적이었던 것 같다.
어렸을 때도 읽었던 책이지만 그때는 무슨 말인지 이해 못했는데, 크고 나서 읽으니 상당히 인상 깊고 또 깨끗하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는 책이다.
알리사에 대해선 답답하기도 한 한편 숭고함을 느꼈는데, 오히려 그녀의 일기장을 읽는 부분에선 알리사가 아프다는 이유만으로 그렇게 제롬을 밀어내는 것이 아니길 바랐다. 그런 이야기는 최근의 아름답고 가슴아픈 사랑 이야기로 잘 나타나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대대로 알리사는 아픈 몸이긴 하였지만(허나 정확히 얼마나 아팠는지 짐작할 수는 없었다) 그 이유 뿐만이 아니라 자신의 신앙심을 근간으로 하여 제롬과 사이를 두려고 하는 것이다.
<장미의 이름> 이후로 기독교적인 책은 나에게 쥐약일거라고 생각했지만, 이 책은 충분히 기독교적임에도 불구하고 무교인 나에게 조차 신앙의 고결함을 느낄 수 있게 하는 책이었다. 또한 현대의 젊은이들은 절대로 견뎌내지 못할 사랑의 인내, 인고, 그리고 죽음도 떼내지 못하는 알리사에 대한 제롬의 사랑이 시대가 흐르면 많은 것이 변하는 구나를 알 수 있게 해주었다. 요즘 사람들은 인스턴트 사랑을 많이 하니까.(모두는 아니다) 심지어 나는 그런 인스턴트조차 해보지 못했기에 오히려 이런 종류의 사랑을 기대하는 걸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너무 극단적으로 흐르면 곤란하기는 할 것 같다.
마지막 쥘리에트가 "그럼 오빠는 희망 없는 사랑을 그렇게 오래도록 마음속에 간직할 수 있다고 믿는 거예요?", "이제 깨어나야만 해요."라고 말하는 부분을 별 의미없이 넘겼었는데, 이것이 제롬의 알리사에 대한 사랑을 묻는 게 아닌 자신의 사랑에 대한 자조적인 부분이었음을 알고 얼마나 소름이 돋았는지 모른다. 이는 다른 사람의 해석 없이는 작가의 뜻을 헤아릴 수 없다고도 말할 수 있으나 해석은 해석일 뿐이니 나는 내 자신의 개성 그대로 읽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딱히 뭐라고 벅차지도 않고 깊게 슬프지도 않는 소설이었지만 무언가 모르게 기억에 계속 남았다. 잘때까지도 남는 소설이었다. 불과 백여년 전만해도 이런 신성하고도 범접할 수 없는 사랑이 만연했다는 게 신기하기만 하다.
다음은 기억에 남는 구절들이다.
"진실하고도 영원한 영광을 참된 마음으로 바라는 자는 속세의 일시적인 영광을 마음에 두지 않느리라."
나는 속세의 성공을 바라기는 하지만, 당장 바라지는 않는다는 점에서 이 문구가 내 사상과 근접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머리로 하는 사랑'이라...... 이 말에 뭐라고 답을 하면 좋을까? 내 온 영혼을 다 바쳐 너를 사랑하고 있는데 너는 어떻게 내 머리와 가슴을 구분할 수가 있지?"
지적이고 멋있다.
"처음에는 그녀가 뛰어 나와서 나를 맞아주지 않은 사실이 실망스러웠지만 그런 마음이 들기가 무섭게 피차간에 으레 나누기 마련인 흔해빠진 인사치레를 면하게 해준 그녀에게 되레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이는 뭐랄까. 발상의 전환이 아닐까 싶다. 흔해빠진 인사치레는 지금도 흔한데, 그것이 형식이 돼버려서 이를 빠트리면 우정이나 사랑에 금이가지 않나 한다. 허나 오히려 작가와 그 사상이 투영된 제롬은 반대로 생각하는 거다. '배움'이란 건 사람을 창의적이고 우물의 물처럼 깊게 만들면서도, 또 그 안에서 생각을 여러 번 밧줄처럼 꼬아트리니 좀 피곤할 것 같기도 하다. 나도 작년까지만 해도 책을 거의 읽지 않았는데, 그때는 아무 생각없이 받아들이고 내뱉었던 말들이 지금은 불편하게 들리고 입에 담기에 번거로울 때도 있는데 아마 이건 독서를 하며 생각하는 습관을 들여서 인 것 같다. 아직 너무 불안정하지만 이는 인생으로 가는 바른 길을 겪고 있는 거겠지.
"이끄는 이를 스스로 따를 때, 얽매인 굴레는 느껴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저항하고 따로 걷기 시작하면 몹시 고통스러운 법이지요."
제롬은 이 글귀가 사무치게 느껴진다고 해놨는데, 나 또한 마찬가지다. 어차피 할 일이라면 그냥 순응하는 것도 좋다. 그렇다고 내 길을 뿌리쳐버리라는 게 아니라, 그 굴레에 따르되 다른 굴레를 모색하며 여차하면 다른 굴레 속으로 뛰어들을 준비를 하라는 것이다.
아, 그리고 딱히 인상깊은 구절로 표시한 것은 아니지만 인상깊은 장면 중에 이런 것이 있었다.
제롬은 알리사를 위해 공부하고 알리사는 그런 제롬을 따라가기 위해 공부하는데, 이는 그들의 사랑을 거짓말로 점철되게 하는 것이라는 장면. 제롬은 다시 원점으로 돌아온 알리사를 이해할 수 없고 알리사는 제롬이 자신의 거짓된 모습을 사랑하는 것 같아 슬퍼한다. 음, 정확히 기억은 안나지만 거의 이런 식이었던 것 같은데, 사랑과 인간관계에 대해 곱씹어보게 하는 계기가 됐다. 사람 간의 사랑 사이에서 이럴 수도 있구나 싶고. 책을 읽으면서 전혀 예상치 못했던 부분에서 맺는 갈등이 아닐까 싶고.
별점은 정확하겐 4.5 정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