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판인쇄의 매력에 빠져드는 시리즈, 활판인쇄 초승달당 바다에서 온 편지
도서관 신간코너에서 우연히 발견했던 <활판인쇄 초승달당> 시리즈.
<활판인쇄 초승달당 바다에서 온 편지>는 순서로 따지만 시리즈의 2권이지만 이 시리즈에서 가장 먼저 읽은 책이었다.
이야기의 큰 줄기는 시간의 흐름에 변하는 부분이 있다.
그러나 각 에피소드가 독립적인 편이기 때문에 2권부터 읽어도 이해에 큰 불편이 없어 다행이었다.
1권에서 본격적으로 활판인쇄하는 '초승달당'을 운영하게 된 유키코.
2권에서도 손님들이 앞선 다른 손님들의 결과물을 보고 초승달당에 찾아온다.
첫번째는 '나비의 낭독회'.
취미로 낭독을 배우고 있는 모임에서 낭독회를 개최하게 되면서 프로그램 북을 활판인쇄로 인쇄하기로 결정한다.
앞선 1권 마지막에 나왔던 '청첩장'을 보고 활판인쇄의 독특한 매력을 느낀 것이다.
이 에피소드가 가장 '책'에 대한 이야기가 많았다.
활판인쇄와 연계해 '인쇄'에 관한 부분들을 이야기하는 것에 더해 '낭독'이라는 부분도 더했기 때문이다.
얼마전 읽었던 낭독 관련 책의 내용도 떠올라 예전에 읽었던 때보다 더 '낭독'이라는 테마에 관심을 둘 수 있었다.
"등장인물들의 진짜 마음은 어느 누구도 모르잖아. 우리는 작가가 아니야. 어쩌면 작가도 전부 아는 건 아닐지도 모르지. 완벽한 대답은 어디에도 없으니까." (p.51)
"인쇄물은 읽는 사람에게 말을 전하기 위한 도구잖아요. 글자가 번지거나 뒤틀려 있으면 시선이 거기서 멈춰 버리죠. 그래서 깨끗하지 않으면 안 돼요. 게다가 너무 응축되어 있으면 글자가 자기주장을 하는 것처럼 보이죠. 그러면 읽는 사람이 글자가 있다는 걸 의식하게 돼요. 읽는 사람이 내용으로 들어가게 하기 위해서는 글자를 의식하게 만들면 안 되거든요." (p.62)
"참 신기해요. 책에는 글자밖에 없잖아요. 색깔도 형태도 무게도 없지요. 그런데 그 말이 우리 안에서 색깔과 형태의 무게를 가지게 돼요." (p.65)
정말 신기하다. 활자는 분명히 여기에 존재한다. 하지만 '문장'은 없다. '의미'도 없다. 활자로 문장을 만들어도 다시 흩어뜨리면 원래의 활자로 돌아간다. 그런데 인쇄한 문장에서는 등장인물의 생각이 떠오른다. 목소리도 떠오른다. 그 사람이 그곳에 있는 것 같다. (p.67)
할 수 있는 일을 넓히려고 한 순간, 세계도 넓어지는 법이다. (p.77)
두번째 에피소드는 '아와유키가 떠난 뒤'.
선생님의 낭독회에 참석했던 소년이 프로그램 북을 보고 호기심이 생겨 초승달당에 찾아간다.
그곳에서 한 손님이 명함 인쇄를 맡기는 것을 보고, '첫번째 명함'에 대해 알게 된다.
자신이 태어나기 전 죽은 누나가 있었음을 알게 된 소년은 초승달당에서 '첫번째 명함'을 인쇄하기로 한다.
이 '첫번째 명함'이라는 게 인상적이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선물받은 나만의 것. 이름. 그걸 기념해서 만드는 명함.
죽음과 삶이란 명제가 주는 분위기가 깔려 있어서 가라앉는 느낌이 있었지만 우울하진 않았다.
"이 세상에 태어난다는 건 그 사람의 인생에서 첫 번째 이벤트잖아. 어쩌면 제일 크고 제일 멋진 이벤트일지도 모르지. 그？？ 받는 첫 번째 선물이 이름이야. 이 세상에 태어나면 반드시 이름을 받으니까. 그걸 기념해서 명함을 선물하고 싶다고 하시더라고." (p.95)
세번째는 표제작이다. '바다에서 온 편지'.
가족모임에서 조카가 가져온 '첫번째 명함'을 보고 활판인쇄란 분야를 알게 된 여자.
그녀는 연인과 헤어지게 되면서 그녀가 빠져있던 판화도 그만둔 상태였다.
그런데 '활판인쇄'와 판화의 연결점이 있음에 흥미를 느껴 초승달당에 찾아간다.
그곳에서 '콩알책 마켓'이 개최된다는 소식을 접하고, 자신이 만들었던 판화들에 몇 장을 새로 더해 콩알책을 만들어보기로 한다.
다시 판화작업을 시작하려 가게 된 공방에서 과거의 아픔을 조금씩 치유할 계기를 맞게 된다.
콩알책을 실제로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격은 조금 비싼 편이라고는 하는데, 예쁜 판화그림에 분위기 있는 활판인쇄라면 그만큼의 가치를 하지 않을까 싶다.
이제 예전으로 돌아갈 수는 없다. 삶은 항상 일방통행이다. (p.216)
아주 작다. 하지만 강력하다.
글자는 움직이지 않지만 마치 살아서 종이에 뿌리를 내린 것 같다. (p.222)
마지막은 '우리의 서부극'.
몸 상태가 나빠지며 퇴사하고 가족과 함께 본가에 내려오게 된 남자.
우연히 방문한 '콩알책 마켓'에서 초승달당의 콩알책을 발견하고 기억 속 초승달당을 떠올린다.
그리고 초승달당에 자신의 아버지의 칼럼을 묶은 책을 내기 위해 조판한 작업물이 아직 남아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렇게 아버지의 예전 칼럼들을 보면서 그때는 미처 알지 못했던 부분들을 되짚어 보게 된다.
더불어 사춘기 아들과의 서먹했던 관계도 풀어나갈 실마리를 잡게 된다.
이 에피소드는 관심사와는 어긋나는 부분이 있어 확 끌리는 건 아니었지만, 글 쓰는 것에 대해 화자와 화자의 아버지가 나누었던 대화 부분이 상당히 인상적이었다. 꽤 길지만 정리해 옮겨 적어 본다.
"글을 쓰기 쉽지 않지? 있어야 할 형태는 저 멀리 보이고, 더구나 제대로 보이지 않지."
"있어야 할 형태요? 그게 뭔데요?"
"네가 쓰고 싶은 게 머릿속에 떠오르지? 하지만 막상 글로 표현하려면 제대로 표현할 수 없어. 네가 쓴 글을 읽어보아도 말하고 싶었던 것과 다르다는 생각이 들고. 이 문장만 보면 앞뒤가 맞아. 하지만 역시 뭔가 다르지 않니?"
깜짝 놀랐다. 나의 고민을 정확히 짚었다. (중략)
"그런 때는 다시 네 안을 들여다봐. 말을 찾아서 생각에 접근시켜. 아무리 고쳐도 완벽해지는 일은 없지만 말이야. 자기 생각임에도 자기가 확실히 알 수 없다는 게 이상하지?" (p.267~268)
괴롭다. 모든 걸 내던지고 편해지고 싶다.
하지만 삶이란 건 그런 것인지도 모른다. 누구나 그렇게 살아간다. 출구가 보이지 않는 터널 안에서 "괴로워! 힘들어!"라고 말하면서 달려나가는 것이다. 출구가 있다면 그것은 저세상으로 갈 때다. (p.295)
비닐 포장이어서 몰랐는데 포장을 뜯고 보니 표지 촉감이 부드러워 좋았다.
부록인 활판인쇄 티코스터도 소중히 보관하려고 한다. 종종 써보고 싶은 마음도 있다.
1, 2권에는 이렇게 부록으로 활판인쇄 인쇄물들이 있어서 좋다!
물론 내용은 더 좋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