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서히 흐르는 이별의 시간, 낙하하는 저녁
얼마 전에 읽은 독서 관련 책에서 소개되었던 책. 낙하하는 저녁.
에쿠니 가오리의 소설을 그 동안 접하지 않았었는데, 그를 계기로 오래간만에 읽어보고 싶어졌다.
<낙하하는 저녁>은 애인과 헤어진 한 여자가 이야기하는 내용이다.
그녀, 리카의 연인 다케오는, 어떤 여자를 사랑하게 되어 이별을 고한다.
다케오가 내 곁에서 없어진다.
그것이 사실의 전부였다. 나는, 내가 어느 정도 상처 받았는지 모른다. (p.15)
함께 동거중이던 연인은, 그렇게 리카의 곁을 떠나간다.
예기치 못한 이별. 리카는 그 이별을, 순순히 받아들이지 못한다.
하지만 겉으로 드러내어 그걸 표현하지는 않는다.
그저, 그러한 현실을 부정하기 위해, 그녀는 일상을 유지한다.
나는 다케오가 나간 후에도 울부짖지 않았다. 일도 쉬지 않았고 술도 마시지 않았다. 살이 찌지도 야위지도 않았고,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긴 시간 수다를 떨지도 않았다. 무서웠던 것이다. 그 중 어느 한 가지라도 해버리면 헤어짐이 현실로 정착해버린다. 앞으로의 인생을, 내내 다케오 없이 혼자 살아가야 하다니, 나로서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p.16)
이별을 한 뒤, 속에 있는 물을 눈물로 다 쏟아내는 것보다, 이렇게 차분히 일상을 유지하는 모습에서...
이별할 준비가 더 안되어있었던 모습을 발견한다.
그녀는 이별의 상황이 낯설다. 연인과의 헤어짐은 변화를 가져온다.
하지만 그녀는 변화를 거부함으로써, 헤어지는 것도 거부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녀의 그런 마음과는 관계없이, 의외의 변화가 그녀 삶에 찾아온다.
그녀의 전 연인 다케오가 사랑하는 여인인, 그러나 그를 거부하는 하나코가 그녀의 집에서 살게 된 것이다.
한 남자의 전 여자친구와 현재 그가 사랑하는 여인이 한 집에 산다.
뭔가 묘한 상황이지만, 리카는 하나코를 받아들인다. 하나코를 보러 오는 다케오를 보기 위한 목적도 있었을 것이다.
그만큼 그녀는 다케오에 대한 미련이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리사는 점점 부재에 적응해간다.
그것을 리사는 하나코가 갑작스레 집을 떠나간 후 혼자 남으면서 점차 깨닫게 된다.
일주일이 지나도 하나코에게서는 아무 연락이 없었다. 나는 규칙적인 생활을 하고, 가끔 다케오에게 연락을 취했다. 연락이라고 해 봐야 서로 전화만 걸 뿐, 다케오는 놀러오지 않았고 나도 달려가지 않았다. 그 거리감을 쾌적하다 생각했다. (p.133)
요즘 나는 굉장히 편안하다. 지금까지 그런 적도 없을 정도로 편안하게, 하루하루가 그저 흘러간다. 겨울 방학도 이제 이틀밖에 남지 않았는데, 나는 조금도 정신을 차리지 않는다. 정신을 차려야 할 이유도 생각나지 않는다.
하나코가 없어진 후에 알았는데 나는 다케오의 부재에 이미 길들어 있었다. 지금은 이 거리감이 에사로운 감각이 되었고, 가끔 다케오가 놀러오면 오히려 안절부절못할 정도다. 하나코 없이는 어색하다. 잊고 있었는데, 우리는 헤어진 것이다. 둘이서 마주하고 있다 보면 그 사실이 되살아나 경악한다. (p.151~152)
그리고 돌아온 하나코.
그동안 그녀는 리카의 친구 료코가 리사에게 주었던 티켓으로 홍콩에 다녀왔던 것이다.
하나코를 사랑하는 남자인 두 사람... 다케오와 카츠야, 그리고 질투심을 지닌 카츠야의 전 부인이 그녀를 만나려 한다.
하지만 하나코는 그들이 올 것을 알면서도 다시 도망치려 한다. 리카는 충동적으로 그녀를 따라나선다.
다케오가 올 것이라는 걸 알면서도.
사람이 찾아올 줄 알면서 도망치다니, 처음 있는 일이었다. 창문을 잠그고 커튼을 닫으면서, 찜찜함에 어쩔 줄을 몰랐다. 내가 생각해도 우스운 일이지만 정말 가슴이 두근거리고 마음이 동요했다. 다케오에게서 도망치려 하고 있다. 그것은 실제로 놀랄 일이었다. (p.204)
그렇게 두 사람은 하나코의 지인의 별장에 가게 되고, 거기서 시간을 보낸 리카는 홀로 먼저 집에 돌아온다.
그리고, 하나코가 자살했다는 소식을 듣는다.
또 다시 이별.
그러나 하나코는 사라졌지만 사라지지 않았다.
그녀가 머문 곳에서, 그녀는 여전히 존재했다.
그렇게 죽은 하나코의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던 리카는, 카츠야의 전 부인을 만난다.
지극히 현실 속에서 사는 여자.
그녀를 보면서 리카는 무언가를 깨닫는다.
언젠가, 가령 언젠가 다케오가 현실 속의 누군가를 필요로 한다 해도, 나는 그때, 다케오를 도울 수 없다. 마찬가지로 다케오 역시 두 번 다시 나의 혼이 깃들 곳일 수 없다. 나는 지금은 그것을 알 수 있다. (p.242)
그렇게 리카는 연인과 완전히 헤어진다.
그리고, 하나코가 죽은 지 모르고 이야기하는 나오코의 어떤 면을 보고, 현실감을 느낀다.
그렇게, 죽은 하나코의 영향에서도 벗어난다.
그리고 다케오를 찾아간다. 그곳에 있을 하나코의 영향을, 흔적을 지워갈 수 있게 해주기 위해.
방식은 좀 많이 과격했지만.
나는 현실의 이쪽에 있기로 마음먹었다. 다케오도 그래주기를 바랬다. 내 기분이 다케오에게 전달됐는지 어쩐지는 잘 모르겠다. 그러나 아무튼 시간은 흘러간다. 우리 주위를. (p.256)
사실, 이해되는 내용은 아니었다.
등장인물 모두에 대해서, 나는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언젠가는 이해할 수 있게 될까.
누군가에게 집착할 정도로 빠져드는 마음을, 이별을 아주 오랜 기간에 걸쳐 받아들이는 과정을.
이 책을 읽으면서 얼마전에 읽은 와타야 리사의 <불쌍하구나> 수록작 2편이 떠올랐다.
사랑의 라이벌(?)이라고 할 수 있는 존재를 무리없이 받아들이는 면에서는 '불쌍하구나'가,
그리고 묘한 매력으로 남자들이 사랑에 빠지는 존재라는 점에서 '아미는 미인'이 닮아있었다.
물론, 하나코는 아미와 많은 면에서 다르지만.
읽으면서 느꼈는데, 내용을 알고 보는 건 일종의 '고정관념'을 형성시켜서, 때로는 위험한 것 같다.
그렇게 만든 틀에 갇혀 읽게 되기 때문이다.
이 책을 알게 된 글이 리카 위주로 이야기해서, 다른 이들의 감정에 대해서는 정말로 모르겠다.
그 다른 사람들의 생각에 대해서도. 어쩌면 이 책이 리카의 1인칭 서술이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글로는 잘 표현을 못하겠는데, 리카의 헤어짐의 과정과 감정의 변화가 잘 드러나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별을 일방적으로 통보받았는데도 너무나 차분한 리카.
그녀는 화가 나는 감정을 속으로 숨기고 있는 것도 아닌 채, 그저 부정했었다.
그런 점이 서술에 나타나서, 함께 차분해진 상태로 이야기를 읽어나갔던 것 같다.
리카와 다케오, 그리고 카츠야는 어떤 면에서 비슷했는지도 모른다.
그들은 그들이 사랑하는 사람에게 집착적인 면이 있었다.
계속 보고 싶고, 다른 누군가를 만나는 것이 싫고.
하지만 리카가 다른 사람들과 달랐던 것은, '이별'이라는 현실에 결국 적응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그런 차이가 느껴지는 이야기이기도 했다.
사랑 그리고 집착에 관한 차이, 또 리카가 겪은 두 번의 이별에서 벗어나는 과정의 차이들.
책을 다 읽었지만 결국, 낙하하는 저녁의 의미는 알 수 없었다.
놓친 것일지도 모른다.
아무튼 참 멋진 제목이다.
서서히 저무는 해.
리카의 이별의 과정과도 닮은 것 같기도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