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종교가 없다. 그래서 불교 관련 책도 읽을 일이 없는데, 언젠가 지인에게 이 책을 선물받고 몇 년째 책꽂이에 꽂아두고는 가끔 눈길만 주고 있었다. (저 제목과 띠지그림에 어떻게 눈길이 안 가겠는가.) 그러다 얼마 전에 하도 우울하고 짜증이 나서 급기야 '병원에 가봐야겠다'는 기특한 결심을 하던 찰나, 이 책을 집어들었다. 그리고 다 읽은 지금, 확실히 덜 우울해졌다.

책을 꼼꼼히 밑줄쳐가면서 음미해가면서 읽는 편이 아니라서 구체적인 내용은 벌써 거의 까먹었지만, 첫머리에 실린 무상과 무지에 관한 내용은 참 새로웠다. 나처럼 밖에서 구경만 하는 사람은 불교를 허무주의 또는 염세적 세계관이 만연한 사상으로 보게 된다. '무상' 등 몇몇 단어 때문이다. 그러나 '무상'을 '변화'로 해석할 때, 세상을 대하는 눈이 달라지고, 무상한 것 뒤에 있는 변하지 않는 것을 고민하게 되었다. 회사와 집만을 오가며 아이들의 시덥잖은 반항을 적당히 회유해가며 하루하루 살아가는 게 참 소모적이라고 느끼고 있던 차에 이 책의 가르침(이라기보다 고민 또는 화두-강론자들도 함께 고민하는 주제들이므로)은 작은 치유가 되었다. 내 삶의 무상함을 깨달은 것도 아니요, 불교에 귀의해야겠다는 결심이 설 만큼 완전공감한 것도 아닌데, 어디서 위로를 받았는지 참 묘하다. 그러나 어쨌든 어떤 글로도 이렇게 획기적으로 마음을 가라앉히지는 못했는데, 그런 점에서 고마운 책이다. 그리고 가끔 하는 생각이었지만, 철학 또는 가치관으로서의 불교는 정말 매력적이라는 걸 다시 느꼈다.

아이 책 고르려고 서점에 들렀다가, 그 자리에서 서서 읽으며 콧등이 시려서 혼난 책이다. 아이들 책이 왜 이렇게 슬픈 거야... 하며. 일하는 엄마 기다리는 우리 아이들이 덩달아 슬퍼질까봐 사지는 못했다.

그런데 오늘 책소개에 '마지막 장면'을 얘기하길래 다시 자세히 보니 엄마와 아이 풍경이 있네. 코가 빨개서 마냥 기다리고만 있는 장면이 끝인 줄 알고 그렇게 슬펐는데, 그게 아니라니 참 다행이다.

내가 기억도 못하는 세살적에 이사간 첫날 아빠를 마중한다고 나갔다가 난 길을 잃었다(고 한다). 전화도 없던 시절이어서 저녁 내내 엄마 아버지가 뛰어다니다가 어느 파출소에서 울고 있는 날 발견했다는데, 지금 책에 나오는 이 아이가 딱 그때 나 정도인 것 같다. 그 뒤로 내게 '마중'은 더위가 꺾인 여름밤에 아버지 마중하러 엄마랑 버스정류장에 나가곤 했던 10살 시절이 유일하다. 내가 어린시절의 '낭만'으로 떠올리는 유일한 기억인데, 그만큼 그때의 마중은 살갑고 좋았다. 책에 나오는 이 아이는 엄마를 기다리면서 세살 때 내가 느꼈던(느꼈음에 분명한) 두려움과 10살 때 내가 느꼈던 반가움을 한꺼번에 경험했겠지. 엄마손 잡고 골목을 오르는 아이를 보러, 책 다시 한번 봐야겠다.

뒤늦게 미네르바의 글들을 찾아서 읽고 있다. 과연 엄청나게 우울한 예상들을 쏟아낸 글들이군, 하고 읽고 있는데 더 맘이 아픈 건 실제로 겨울이 된 지금 그 예상들이 전혀 헛것으로 들리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몸도 마음도 추운 겨울, 나야 손절매한 투자금이 아깝고 내일이 불투명하다는 것으로 힘들지만, 이웃돕기 기부금은 줄어들 게 뻔한데 그 도움이 절실한 어려운 사람들은 또 어떻게 이 겨울을 날까. 미네르바의 글을 읽으면서 이번 겨울은 정말 '생존'이 시험받는 장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책을 읽게 된 것도 '누구에게나 인생의 겨울이 온다'는 문구 때문이었다. 이 책은 개미나 너구리 같은 작고 작은 것에서 인생의 겨울을 나는 지혜를 얻어 보여준다. 잔잔하면서도 깊이 있는 문체로. 다른 자기계발우화처럼 환상을 오간다는 게 약간 뻔하다 싶긴 하지만, 주제 자체가 참 특이해서 흥미롭게 읽었다. 무엇보다도 이 책은 자기계발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형태의 성공, 즉 명예와 부, 사회적 지위 같은 물질적 성공을 다루지 않는다. 걔네들은 어쩌면 부산물일 뿐이고, 그보다는 작은 존재가 거인으로 당당하게 사는 지혜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별다른 스펙도 없어서 그저 일찍 태어나 정규직 체제에 막차를 타고 88만원 세대가 안 된 게 다행이라는 황당한 위안을 하는 나로서는 이 책에서 나오는 작고 힘없는 사람들의 심정에 공감을 안 할 수 없었다. 특히 있는 것들은 그것만으로도 떵떵거리며 잘 사는, 사람의 노동값이 손바닥만한 땅값보다 하찮게 취급되는 이상한 현실에 대해 일상적 분노를 느끼는 나로서는, 허수아비 같은 큰 것들 말고 진정한 작은 거인이 되라는 책의 메시지가 그저 성공하라고만 주문하는 다른 자기계발서들보다 진정성이 느껴져서 좋았다(뭐, 결국은 주인공도 작은 성공을 거두는 것으로 이야기가 흘러가고 말지만). 오랜만에 만난, 특이한 주제와 섬세한 문체를 가진 좋은 자기계발우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