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에는 그와 관련된 어떠한 기억이라도 들추어낼만한 사물, 소재는 무조건 피하고보자였는데 요즘은 그러한 기억들을 대함에 있어 조금은 '그것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더란 말이냐~'식으로 대하게 됩니다.

옛말에 '시간이 약이다'라고 하더니 정말 그런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니, 어쩌면 시간이 약이 아니라 시간에 의지해 점차 희미해지는 기억력 감퇴가 약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관련된 말만 들어도 뜨끔뜨끔 따끔따끔 마음이 아프더니 이제는 그저 웃음이 날 때도 있습니다.

오늘만 해도 그렇습니다.

헤어지고도 십여년이 넘도록 잊지 못하고야 마는 이별의 원인을 제공했던 그를 '정말 나쁜 놈'으로 딱 규정 짓는 방송 프로그램을 보면서 물론 웃자고 하는 소리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이 뜨끔하며 보다가 불현듯 깊은 생각에 잠기게 됩니다.

우리는 정말 서로 이별을 원했던가?

어쩌면 '사랑'이라는 작은 세계에 갇혀 너무 상대방만 바라본 것이 근원적인 문제가 아니었을까?

그가 원한 것은 단지 시간일 뿐이었는데 이별이 두려웠던 내가 혼자서 너무 이별을 서둘러버린건 아니었을까..?

이제와 이런 생각들은 다 부질없음을 알지만 어쩌면 이런 의문들이 여태 그와 저를 떼어놓지 못하고 있는게 아닐까 싶은 생각도 들고 또 단순한 미련이 아니겠나 싶어 제 자신이 한심하고 초라하게 느껴질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시간이 또 얼마가 걸리더라도 결국에는 그 의문조차도 희미해질 정도로 무덤덤해져야 한다는 것이겠지요.

그보다 더 분명하게 알고 있듯이 제게는 현재를 살아감에 제 인생의 밑거름이자 든든한 지원군이 가족들이 있으니까요.

현실의 삶을 살면서 과거의 기억에 연연한다는 것은 현실에게 죄를 짓는 것이며 부끄러운 일이란 생각때문에 날마다 괴로웠던 적이 있었습니다. 이후로는 가끔 그런 생각을 떠올릴때면 괜시리 가족들에게 미안해졌고요.

그런데 최근 읽은 책에서 아흔의 노인이 나이에 무색하게 여전히 플라토닉한 사랑과 육체적인 사랑 등 자신이 욕망하는 사랑에 대해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면서 저도 다시금 제 '사랑관'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되더라고요.

(물론 그 주인공의 사랑에 대해 모든 걸 찬성하거나 긍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분명 기혼자로서 그의 한편에서는 상처받는 아내와 아이들이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오랜 시간이 흐르고 그가 죽음을 맞이한 후 과연 그를 알았던 사랑했던 이들에게 남은 것이 무엇인가를 두고 생각할 때 이전과의 생각과는 약간 다른 생각이 들더란 말이지요..^^)

이별에도 예의를 갖추자는 그 개그 프로그램의 내용처럼은 아니더라도 그 주제만은 분명 옳다는 생각이 드네요.

제 이별에도 당시의 그가 조금 더 성숙해서 자신의 생각을 솔직히 말해 주기만 했더라도 아마 저도 어떤 선택을 하든 좀 더 수월하게 이별을 받아들이고 담담히 인내할 수 있지 않았을까요..?

어쩌면 오랜 시간이 지난 뒤 그에게 그러한 성숙한 이별을 주어 되려 고맙다는 생각이 들수도 있었을 텐데요..

더불어 저 자신도 반성해 봅니다. 이별에 있어 충분히 예의를 갖췄었던가 하고요..

낮의 그 시청 이후로 여전히 머릿속이 복잡하고 헷갈리지만 그래도 어떻게든 정리해 보고 싶어 끄적여 봤습니다.

하루종일 뭔가 답답하긴 한데 정확한 이유도 모르겠고 딱히 해결책도 모르겠어서 머리만 어지러웠는데 이제사 조금 머릿속이 편안해 지는 것 같습니다.

이미 헤어져 소식조차 모르는 '그'이지만 그래도 그를 죽도록 사랑했던 그 당시 시간들이 내게 얼마나 큰 기쁨이며 행복이었는지 그리고 내내 살아오는 동안 마음 찢어지는 아픔이면서도 동시에 죽을만큼 그리운 대상이었다는 것을 오늘 하루쯤 그도 어쩔 수 없이 인정해 주었으면.. 아니 자기도 모르는 사이 저를 그리워해 버렸으면 싶은 바람입니다.

아무래도, 가을은 가을인가 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