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리에 대한 열정 하나로 스승 쓰부라양 밑에서 수련하며 양식당 엔푸쿠테이에서 종업원으로 일하는 후지마루. 엔푸쿠테이에서 가까운 거리엔 배달까지 하게 되면서 배달원으로서의 업무도 떠맡은 그는 자신과는 인연이 없을 것만 같은 T대 자연과학부에 발을 들이게 되죠. 그곳에서 요리에 대한 열정으로 가득찼던 그가 사랑에 빠지게 되는데요, 바로 대상은 T대에서 식물연구에 여념없는 대학원생 모토무라랍니다. 모토무라는 기공 무늬나 버섯이 그려진 티셔츠를 입고 다니며 애기장대에 온정신을 쏟는, 식물연구에 평생을 바칠 태세로 열정이 가득한 인물이에요. 후지마루랑 모토무라가 음식점 종업원 대 주문자가 아닌 개인적인 이야기(?)를 처음 나눈 것도 바로 모토무라의 식물 사랑-물론 후지마루가 그녀에 대한 호감, 그리고 순수한 호기심을 가진 인물이었기에-에 기초한 것이었을 정도로 모토무라는 식물에 빠져있죠.
모토무라에 대한 사랑을 생각보다 일찍, 초반부에 고백하는 후지마루. 돌아온 대답은 누구와도 사귈 생각이 없다는 말. 그녀는 식물에게는 뇌도 신경도 없으니 사고나 감정도 '사랑'이라는 개념도 없지만, 왕성하게 번식하고 환경에 적응하여 지구에 살고 있어 신기하지 않냐고. 이 신기한 세계에 매료된 자신은 사랑 없는 세계에 사는 식물 연구에 모든 것을 바치겠다고 마음먹었다는 이야기를 하죠. 이후 후라마루(차였다는 의미+후지마루)라고 불리기도 하지만 전과 같이 대하며 모토무라와 그녀와 함께 식물연구에 한창인 T대 자연과학부 대학원생과 이래저래 함께 하게 되면서 식물이라는 미지의 세계에 대해 조금씩 알아가는 후지마루. 덕분에 독자인 저도 식물학에 살짝 관심이. 그래서 작가 미우라 시온이 일본 식물학의 발전에 공헌한 사람에게 수여하는 일본식물학회 특별상을 수상했던가 봐요.
후지마루는 모토무라가 들려주는 애기장대+식물에 대한 이야기에 관심이 있고(모토무라에 대한 호감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또 상냥하고 새로운 것도 잘 받아들이는 솔직한 사람, 게다가 분야는 다르지만 요리에 대한 열정이 가득하다는 것에서 자신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기에 모토무라는 그를 괜찮은 사람이라고 인정하죠. 과연 이들의 관계는 어찌 될지 궁금하시면 책을 보세요.
모토무라는 애기장대를 교배하여 사중변이체를 만드는 연구를 하고 있는데 그녀와 함께 책의 마지막까지 사중변이체를 만드는 과정을 쫓다보면 저도 모르게 식물학이라는 세계에 흠뻑 빠질 수 있답니다. 모래 한 알갱이 정도 크기의 씨앗 1200알을 채취하여 그 중 네 알이 있을까 말까할 정도로 얻기 힘든 사중변이체. 그녀가 고민하는 것처럼 이렇게 한정된 시간을 투자해 연구하면서 목적한 바를 이룰 수 있을지 불투명하기에 보통 열정을 갖고서는 하지 못하는 일이겠죠.
모토무라의 사중변이체, 그리고 그녀와 후지마루의 관계가 어떻게 될지를 지켜보는 것도 재미있지만 기본적으로는 식물학이라는 세계에 자연스럽게 입장할 수밖에 없게끔 만든 작가의 힘이 대단하다 싶은 책, <사랑 없는 세계>. T대 자연과학부 교수 마쓰다를 비롯하여 대학원생 동료들, 모토무라의 부모님까지도 따뜻한 마음을 지닌 사람들이라 미소지으며 마지막장을 덮었어요. 열정 가득한 소설 속 주인공에 공감하다 사그라들었던 나의 열정도 고개를 들게 하는 마력의 작가, 미우라 시온의 <사랑 없는 세계>도 꼭 읽어볼만한 책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