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블로그 포스트에서 우연히 러시아 그림을 보았다. 난 미술을 좋아한다고는 하지만, 미술에 대해 체계적으로 정리된 수준의 지식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몇몇 화가들을 제외하고는 어느 나라 화가인지조차 모르는 화가가 많다. 하지만 내 기억 중에 러시아 화가는 없어서 지금에야 처음으로 봤다는 것에 놀랐다. 그러고 보니 유럽의 미술은 책도 많고 전시도 자주 해서 친숙하지만, 러시아 미술은? 찾아보니 2008년에 칸딘스키와 러시아 거장전을 했었구나. 가까운 나라인 일본이나 중국 미술은 친숙한데 국경(물론 북한에 가까이 있긴 하지만)이 맞닿아 있는 러시아의 미술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다는 생각을 하면서 슬슬 관심이 가던 차에 도서관에서 이 책을 발견했다. 바로 내가 보고 싶던 그 책! 표지 분위기부터 독특해서 혹시 러시아 그림 아냐? 하고 고른 것이 딱 맞아서 읽기 시작했다.
책에서 소개된 러시아의 미술관은 네 군데이다. 모스크바에 위치한 트레티야코프 미술관과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위치한 러시아 미술관은 러시아 회화사를 한 곳에서 알 수 있는 곳이며, 에르미타슈 박물관과 푸슈킨 미술관은 서유럽 미술을 소개하는 컬렉션이라고 한다. 러시아 미술에 대해 소개하고 있는 책이기에 에르미타슈 박물관과 푸슈킨 미술관은 비중이 적긴 하지만 책에 실린 컬렉션을 보니 무척 유명한 작품이 러시아에 꽤 많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컬렉터가 소위 말하는 매의 눈을 가지고 있었나보다.
러시아하면 책의 제목처럼 눈 덮인 땅과 피로 얼룩진 역사가 떠오른다. 그런 이미지가 떠오르는 것일 뿐, 러시아에 대한 사전 지식이 없이 봤기 때문에 책에서 그림이 그려지게 된 역사적인 배경을 설명해 줄 때는 소화하기가 쉽지는 않았다. 역사적 흐름뿐 아니라 내겐 아직은 익숙하지 않은 러시아 이름도 머리에 쏙쏙 들어오지 않았으니까. 그래도 이 책을 끝까지 읽은 것은 역시나, 그림에 매료되었기 때문이다. 친숙한 유럽 화풍과는 확실하게 다른 느낌의 독특한 러시아 그림이 너무 매력적!!
미하일 브루벨 『백조 공주』 1900, 트레티야코프 미술관
표지이기도 한 백조 공주는 보는 순간 너무 예뻐서 한참 동안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평면적인 느낌을 주는 터치로 그린 이 그림은 장식적인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어서 그럴까? 우리가 생각하는 미술이라는 느낌보단 일러스트에 가까운 느낌이 든다. 요즘 그림이라고 해도 믿길 정도로 세련된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는 이 그림은 내게 무척 인상적이어서 백조 공주 이야기에도 관심이 갔다. 슬픈 느낌이지만 아름다운 이 그림 때문에 미하일 브루벨이라는 화가가 궁금해졌다.
레오니드 솔로마트킨 『경찰의 찬송』 1882, 러시아 미술관
인물의 과장된 표정이 한눈에 들어오는 이 그림은 그려진 시기의 세태를 풍자한 그림이다. 상인의 집에 들어와서 그에게 상납금을 받아가려고 노래를 부르며 돈이 건네지기만을 기다리는 경찰들. 가장 왼쪽에 위치한 경찰의 표정에서 돈에 대한 그의 탐욕을 엿볼 수 있으며, 또한 화가가 어떤 시각으로 이 상황을 보고 있는지가 드러난다. 러시아 작가 고골리의 검찰관이 떠오르는 작품이다. 우리나라도 그랬지만, 자본주의가 확산되면서는 이렇게 권력이 부패하기가 쉬웠나보다.
일랴 레핀 『1581년 11월 16일 이반 뇌제와 그의 아들 이반』 1885, 트레티야코프 미술관
공포정치를 폈던 이반 뇌제의 치세 동안 친위대가 그의 사촌 형제들과 친척들을 고문하고 처형했다고 한다. 어느 나라건 어느 시대이건 궁중에선 권력 다툼으로 암투가 끊이지 않지만 이반 뇌제는 자신의 아들까지 죽이고 마는데 그 장면을 그린 것이 바로 위 작품이다. 이반 뇌제는 아들을 자신의 손으로 죽이고 나서야 자신이 한 행동을 깨닫고 충격을 받은 표정으로 아들을 끌어안고 있고, 아들은 머리에서 피를 흘리고 있다. 얼마나 비극적인 장면인지! 주변의 흐트러진 물건들이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해주는 듯하다.
책 한 권을 읽었다고 러시아 미술을 알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시대별로 잘 정리가 되어 있던 덕분에 조금이나마 어떤 지 알 수 있었다. 러시아가 동방 정교를 받아들이면서 탄생한 종교화인 이콘에서부터 간략하게 소개되었지만, 러시아의 추상미술에 이르기까지 러시아 미술이 이런 것이구나 살짝 맛보기를 했다고 할까? 이 책을 읽기 전까지는 유럽의 미술관에 가 보고 싶은 생각만 있었는데 러시아에 있는 미술관에도 가 보고 싶다는 생각이 슬그머니 들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