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경리-하면 대표작인 『토지』가 떠오른다. 고등학교 교과 과정에서부터 그의 작품을 부분적으로나마 보았기에 친숙한 느낌이 드는 작가이지만 이 작품, 『그 형제의 연인들』은 생소한 소설이다. 익히 들었던 작가이지만 그의 소개에서도 이 작품은 못 본 것 같은데? 알고보니 이 작품은 1962년 대구일보에서 연재했던 소설이 그동안 잊혀진 채로 있다가 2004년 그 존재가 세상에 알려진 후, 많은 노력 끝에 처음으로 선보인 작품이라고 한다.

 

  심인성과 주성 형제와 그들의 연인인 규희, 혜원의 이야기가 얽히고 섥혀 있는 것이 이 소설이다. 의사인 인성은 현숙과 결혼했지만 무미건조한 결혼 생활을 하고 있다. 그의 말마따나 불만도 만족도 없는 것(p.176)이다.

 

  '권태? 애초부터지... 우리들에게는 시초부터 아무런 감격도 없었다. 현숙에게 나는 권태를 처음부터 느낀 것일까? 아니야. 인생 자체가 끝없이 즐거운 것이 아니냐.' (p.24)

  건조한 부부 관계... 인성은 집안에서 권하는 대로 현숙과 결혼한 것이다. 사랑해서 한 것은 아닌 결혼을. 가끔 나오는 지금 듣기엔 어색하게 느껴지는 말투 빼고는 1960년대 소설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세련된 문장이 많다. 인성과 현숙의 대화는 애정 없는 결혼이 이런 걸까 싶게 소름끼치기까지 했다.   

 

  "선생님? 샐비어의 꽃말을 아세요?"

  "모릅니다."

  인성은 좀 화난 듯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불타는 사랑."

  규희는 까르르 웃었다.

  "불타는 사랑..."

  인성은 소년처럼 얼굴을 붉히며 규희의 말을 바보같이 되뇌었다. 전신이 부르릉 떨렸다. 바로 자기 턱밑에 규희의 커다란 눈동자가 인성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축축이 젖은 입술이 인성의 시야에서 흔들리고 있었다. 와락 잡아당기기만 하면 맥없이 그대로 자기 가슴에 쏠리고 말 얼굴이다 생각했다. 인성은 다리에다 힘을 주었다. 그리고 상반신을 겨우 가누었다. (p.100)

  인성은 환자인 규희를 만나 마치 소년으로 되돌아간 듯이 사랑에 빠진다. 현숙이 그들의 관계를 눈치채고 인성에게 매달리기도 하고 그를 탓하기도 하며 변하는 모습이 안타까웠다. 처음부터 인성과 맞지 않는 현숙이었지만 시간이 갈 수록 망가지는 모습을 보니 한편으론 슬프기도 했다.

 

   "애정문제에 있어서 연령의 차이 같은 것이 큰 장애가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자연스러운 일은 못 되겠죠."

  혜원은 자기 자신도 놀라우리만큼 냉정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왜 자연스럽지 못합니까? 남의 눈 때문에 그렇습니까? 하나의 풍습 때문에 그렇습니까?"

  "남의 눈도 한국의 풍습도 중요하겠죠. 하지만 오랜 세월 속에서 어쩔 수 없이 몸에 배어버린 자기 자신이 더 중요하지 않겠어요?" (p.63)

  그리고 인성의 동생인 주성은 7살 연상인 친구의 누나 혜원에게 사랑을 느낀다. 혜원은 결혼한 적이 있는 여자로서 전남편에게 받은 열등감으로 더욱 꼿꼿이 자좀심을 세우고 산다. 그런 그녀가 결국 주성을 받아들이지만, 둘에게 미래가 보이지 않는다. 의욕에 차 있던 주성은 혜원과의 만남으로 이전의 총기는 사라진 채 사소한 감정의 노예로 전락하고 만 것이다. 이들의 관계를 알게 된 주성의 아버지가 혜원에게 주성의 곁을 떠나 줄 것을 부탁한다. 혜원이 처음부터 우려했었던 관습적으로 용납할 수 없는 관계라는 것이 내내 걸림돌이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인성은 흥분하는 심상호 씨로부터 얼굴을 돌리며,

  "출세하는 것과 개인의 행복이 반드시 합치된다고는 볼 수 없는데요."

  "그럼 넌 주성이 옳은 짓을 했다고 생각하느냐?"

  심상호 씨는 화를 발칵 낸다. 

  "옳은 짓이라 생각지는 않습니다만 반드시 나쁘다고 할 수도 없습니다." (p.368)  

  "언젠가도 말했지만 모든 잘못은 나에게 있었어. 혜원이 뭐라 해도 난 할 말이 없지만... 사람이란 때때로 장님이 되어 진실을 식별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어. 결국 세월이 그런 우둔함을 가르쳐주기는 하지만..."

  "세월이 들어서?"

  혜원은 넋이 나간 사람처럼 뇌었다. (p.391)   

  "바라는 마음이 있다면 나를 기다려주오. 그곳에 가서 나는 내 감정을 정리해볼 작정이고 무엇이든 손에 잡히는 일을 해볼 마음이오. 우리가 서로 애틋하게 사랑하지는 못하더라도 신뢰감으로 서로의 마음이 가까워질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그리고 오랜 세월이 흘러가면 설마 상처도 아물지 않겠소?" (p.414) 

  시간이 해결해 준다는 말은 그리 좋아하지 않지만 진리라고 생각한다. 두 형제에게 바람이 스치고 지나간 것이기에 그 잠시만 견디면 앞이 잘 보이지 않는 열정에 빠졌을 때와는 달리 좀 더 객관적으로 자신을 볼 수 있겠지. 보는 내내 참 얄궃은 인연이구나 생각했다. 왜 그런 타이밍에 만나서 저리 힘들게 사랑할까. 대체 어떻게 될지 궁금해서 손에서 책을 놓지 못하고 쭉 읽어내려갔다. 참 불쌍한 사람들... 하지만 형제가 굳게 손을 잡은 마지막 모습에 안도하며 책을 덮을 수 있었다.   

  미술 작품을 보다 보면 그 속에 역사적인 사실이 녹아 들어가 있는 것을 많이 볼 수 있다. 어떤 가치도 보이지 않는 것 같은 작품도 있지만 화가의 눈을 통해 그려진 것들이기에 가치나 역사적 사건이 있을 수밖에 없다. 특히 사진이 없던 시절에 그려진 역사적인 사건들을 그린 그림이 서양화에는 참 많다. 이런 그림들을 한번에 모아서 설명해 주는 책은 없을까? 그런 생각을 하던 내게 딱 맞는 책을 발견했다. 바로 『명작, 역사를 만나다』이다. 신고전주의에서 후기인상주의까지 명작으로 본 사회사라는 부제가 붙은 책은 미술 책답게 그림이 많이 수록되어 있어 술술 넘기며 볼 수 있었다.

 

  전체 4개의 챕터로 나누어져 있는데, 시대별로 신고전주의, 낭만주의, 사실주의, 인상주의와 후기인상주의 작품을 보여준다. 

 

  신고전주의는 18세기 후반 서양 문화를 지배했던 사조로 우아하고 장엄하며 감정을 절제하면서도 중후한 감동을 이끌어내는 방식이다. 17세기 중반부터 19세기까지 유럽 귀족들의 필수적인 교육과정이었던 이탈리아 여행을 그랜드투어라고 하는데 이 때 기념품으로 초상화가 많이 그려졌다고 한다. 오늘날 관광지에서 여행 왔던 것을 인증하려 사진을 찍는 것처럼 말이다.

 

  안 루이 지로데의 『엔디미온의 잠』은 그의 스승인 다비드의 신고전주의 작품과는 전혀 다른 스타일의 작품이다. 다비드의 작품에서는 강인한 육체를 가진 근육질의 영웅들이 등장하지만, 이 지로데의 엔디미온은 미의 여신 비너스를 떠오르게 하는 포즈에 부드럽고 여성스러운 육체를 가지고 있다. 이렇게 앞 시대와 대조적인 사조가 나타나는 사회적 배경을 잘 설명해 준다.  

 

  역사적 사건 중 잘 몰랐던 것을 이 책으로 알게 된 것도 있고, 사건별로 그림이 분류되어 있으니 정리가 되는 느낌이었다. 게다가 수록된 그림들이 한번쯤 어디서 봤음직한 유명한 작품이 많아서 더 편하게 볼 수 있었다.    

  어릴 땐 책을 좋아하고 많이 읽었지만 중고등학생이 되면서 책과 자연히 멀어졌다. 너무 오랜 기간 멀리해서일까? 책을 보려고 마음먹고 펴더라도 그리 재미있게 읽을 수가 없었다. 그러다 학교 도서관에서 우연히 발견한 책, 『마호로역 다다 심부름집』을 발견하고 다시 책에 흥미를 느꼈다. 그때 살짝 훑어보려고 별생각 없이 펼쳤던 것이 폭 빠져들어 볼 만큼 매력적인 책이어서 서가에 서서 책을 반쯤 보고 곧장 빌려 와서 봤던 것이다. 무척 마음에 들어 결국 책을 샀다. 그 후부터 작가인 미우라 시온의 팬이 되어 그녀의 책이라면 꼭꼭 읽어보고 사두곤 한다. 그녀의 책을 만나지 않았다면 지금도 난 책과 가까이 지내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내가 특별히 애정하는 작가인 미우라 시온의 최신작인 『배를 엮다』는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작품일 수밖에 없었다. 특이한 제목을 가진 이 책은 표지의 일러스트가 재미난 느낌이라 가볍게 읽을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이 책이 2012년 서점대상 1위(서점직원들이 나오키상을 수상하지는 못했지만 가장 팔고 싶은 책에 주는 상이라고 한다)를 수상하여 미우라 시온은 나오키상과 서점대상을 둘 다 받은 작가가 되었다고 한다.

 

  대형출판사인 겐부쇼보에서 37년간 사전 만들기 외길을 걸어온 아라키 고헤이, 교수직을 은퇴하고 사전편집부의 고문으로 있는 마쓰모토 선생, 사전편집부에서 선전광고부로 이동한 가볍고 경박한 말투의 니시오카, 언어에 대한 날카로운 감각을 가진 다소 엉뚱한 마지메, 실무능력이 뛰어나고 무뚝뚝한 계약 사원 사사키, 마지메가 하숙하는 집주인 다케 할머니의 손녀이며 요리사인 가구야, 한참이 지난 후에 사전편집부에 들어온 기시베까지 개성이 가득한 인물들이 겐부쇼보의 숙원 사업인 사전 《대도해》를 만들어가는 이야기를 전혀 지루하지 않게끔 해 준다.

 

  사전에 대해 모르는 단어가 있을 때 찾아보는 것 이상의 생각은 하지 않고 있던 내게 이 책은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사전에 실린 것도 누군가가 말의 의미를 정리해서 실어놓은 것으로 이젠 쓰이지 않는 말도, 새로 생겨난 말도 있다는 것을 처음 인식했다. 그리고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마지메가 연애하는 것도 있지만 주된 초점은 사전을 만드는 작업이기 때문에 사전에 실을 준비를 하기 위해 용례채집카드를 만드는 거라든가 용어의 의미를 정리하는 것, 그리고 마지막엔 사전에 쓰일 용지를 선택하는 것까지 자세히 나와서 조금이라도 사전 편찬 작업에 함께 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마지메는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니시오카 씨. 저는 니시오카 씨가 다른 부서로 이동되는 것 정말로 유감입니다. 《대도해》를 피가 흐르는 사전으로 만들기 위해서도 니시오카 씨는 사전편집부에 절대로 필요한데."

  "바아보."

  니시오카는 차갑게 말하고 마지메의 손에서 원고를 낚아챘다. 마지메가 빨간 연필로 쓴 수정안을 바탕으로 교수에게 확인 메일을 보냈다.

  되도록 눈을 깜빡이지 않고 컴퓨터 화면을 응시하려고 했다. 자칫하면 울어 버릴지도 모른다.

  기뻤다. 만약 마지메가 아닌 사람이 말했다면 동정이거나 마음에도 없는 위로라고 받아들였을 것이다. 니시오카는 안다. 마지메의 말은 진심에서 우러나온 것이다. (p.170)

  이름처럼 성실한 마지메의 서툰 연애도 재미를 줬지만, 니시오카와 마지메의 우정이랄까 연대랄까 그게 마음에 와 닿았다. 마지메처럼 진지하게 사전편집 일을 하지는 못하지만 음으로 양으로 사전편집부를 위해 애써왔던 니시오카가 광고선전부로 이동하게 되었을 때 마지메의 언어에 대한 천부적 재능에 열등감을 느끼지만 마지메와의 대화를 통해 자신이 쓸모없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느끼며 구원받는다. 난 재능이 있는 사람이라기보단 노력하는 평범한 사람에 속해서 니시오카의 그 심정에 깊이 공감했다. 

 

  내 생각에 미우라 시온의 전문 분야는 열정을 가진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이라 이 책을 읽을 땐 푹 빠져서 읽었다. 벌써 끝인가 싶어 아쉬운 느낌이 들었지만, 사전을 만드는 과정에서도 그리고 책의 마무리에서도 재미와 감동을 모두 느끼게 하다니, 역시 미우라 시온의 책! 매번 독특한 책을 쓰는 그녀가 다음엔 또 어떤 얘기를 들려줄지 벌써 기다려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