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금이 남한산성으로 들어와 문을 걸어 잠근지 47일째 임금은 꼭 47일전 자신이 들어 왔던 남문을 스스로
열고 청나라의 칸에게 걸어가 세 번 절하며 청의 신하가 되기를 자청한다.』
도대체 남한산성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누군가 쳐들어 왔고, 조선의 군사들은 남한산성을 기반 삼아 열렬하고도 장렬하게 싸워 조선을 지킨 것일까?
역사에 길이 남을 만한 전투가 이루어졌던 걸까? ......
책을 읽기 전 했던 생각들이다. 우리나라의 역사에 대해서 내가 알고 있는 것이 얼마나 조악한지를 새삼 알게
되었다. 어떻게 나는 남한산성에서 만화에서나 나올 법한 멋지고 위대한 전투가 있었을 거라는 생각을 했을까.
1636년 12월의 조선에는 그렇게 끔찍하고 치욕스러운 일이 있었는데 말이다.
병자호란.
인조 14년, 조선이 명의 신하로 있을 때 명을 서서히 쓰러뜨리고 있던 청나라 칸이 용골대를 파견해
조선을 청의 신국(臣國)으로 만들려고 한다. 하지만 청을 오랑캐로 칭하고 청의 국서를 접수하지 않자
청군이 침입하여 임금(인조)과 세자(소현세자)는 남한산성으로, 빈궁과 왕자들은 강화도로 피난을 가게 되는 것이
병자호란의 기초이다.
성문을 걸어 잠그고 임금과 세자, 중신들과 백성들의 의식주를 해결하기에는 가진 것이 없어 너무 작게만 느껴지던,
밖에서의 공격을 대비해 동서남북 4문을 지키고 경계하며 한 치의 틈도 허락하지 않기에는 너무 크게 느껴지던 남한산성.
그 안에서 모두가 살기 위해서는 청과 화친(和親)을 도모해야 한다고 말하는 최명길과, 예의도 모르는 천하의 무식한 놈들과는
맞서 싸우는 것이 도리라고 말하는 김상헌과, 이도 저도 아니고 말을 아끼는 영의정 김류사이에서 임금은 철저하게 혼자였다.
비록 신하들이 언제라도 자신의 목숨을 내놓아 임금을 지킬 준비가 되어 있다 하더라도 성문을 열고 청 앞에 무릎을 꿇을 것인지
말 것인지 결정하는 것도, 그 청의 칸 앞에서 무릎을 꿇어 죽기 보다 힘든 치욕을 견뎌야 하는 것도 온전하게 임금의 몫이었다.
작가는 책의 서두에서 "이 책은 소설이며, 소설로만 읽혀야 한다."라고 말하고 있다. 기본 틀은 사실에 기초하고 있겠지만
재미를 위해 결정적인 장면에 극적 요소를 더 했을 거라는 짐작을 할 수 있다. 그렇다 하더라도 조선의 임금이 머무는
행궁 옆에, 똑바로 행궁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교묘하게 피해서 겁을 주려는 목적으로 홍이포를 방포하고, 임금에게 보내는
문서에 '너'라는 칭호를 사용하고, 조선 백성들의 몸뚱아리를 발판 삼아 한 겨울 산등성이에 길을 내어 전진하고, 성문을
열고 나온 임금에게 땅에 머리를 박고 세 번 절하게 하고, 그나마 절하는 사이 잠깐 기다리라 하고 칸은 바지를 벗고 아무렇게나
오줌을 갈긴 후 다시 절을 받는 장면은 상상하는 것 만으로도 화가 나는 동시에 부끄러운 마음이 든다.
우리가 약해서 다른 나라들의 침입을 받는 것인데, 침략 당하는 자 보다는 침략하는 자가 더 나쁜 것인데, 이미 350년도 전의
일들인데 왜 이렇게 울컥하는 마음이 드는 것일까? 누군가 전하지 않았으면 알지도 못 했을 과거이고 내가 직접 보고 겪은 것도
아니고 단지 글자로 전해져 오는 것을 받아 들였을 뿐인데.
사실 나는 그 시대의 사람들이 겪었을 어려움 따위는 알 수 없다. 단지 내 조상들이 다른 나라 왕에게 한겨울의 차가운 땅바닥에
머리를 조아리고, 한 나라의 세자가 수레에 얹혀 오랑캐 나라의 볼모로 잡혀 갔다는 사실이 화가 난다.
사실 이 책은 작년에 큰 인기를 끌며 베스트셀러에 올랐던 것이기도 하고 김훈이라는 작가를 어느 정도 믿고 있기 때문에
꼭 읽어 보고 싶었던 책인데, 중반까지는 이상하게 별 흥미를 느끼지도 못했고 한 페이지를 넘기는데 평소보다 더 긴 시간을
들었었다. 하지만 용골대만 조선으로 보냈던 청나라의 칸이 조선으로 오고, 조선의 임금과 칸 사이에 급하게 서신이 왕래하고,
청의 무례한 행동들과 앞날을 예측할 수 없는 고단한 날들 속에서 백성들이 자기 나라를 배신하고 그것을 처벌하는 조정이 등장
하면서부터는 눈을 뗄수가 없을 정도였다.
사실, 후반부에 책에 몰입했던 이유중의 하나는 남한산성에서의 기록이 내가 상상했던 것과는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전개되서
'이럴수가!' 라며 충격을 받았던 탓도 있을 것이다.
책을 덮으며 뭔가 석연치 않은 느낌이 드는 것은 그 추운 겨울을 이겨낸 사람들에 대한 애틋한 마음이고, 그럼에도 덮은 책을
뒤돌아보지 않는 것은 이미 지나간 과거이기 때문이다.
크고 작은 어려움을 겪어오고 어찌보며 지금도 나름대로의 어려움을 겪고 있는 우리나라지만 과거의 힘든 일들을 잘 견뎌낸
것을 보면 새삼 애국심이라는 것이 생기는 것 같기도 하고, 이 나라가 자랑스럽게 느껴지기도 한다.
본문 중
[그러나 알 수 없는 것은 조선이었다. 송파강은 날마다 부풀었다. 물비늘 반짝이는 강물을 바라보며 칸은 답답했다. 저처럼
외지고 오목한 나라에 어여쁘고 단정한 삶의 길이 없지 않을 터인데, 기를 쓰고 스스로 강자의 적이 됨으로써 멀리 있는 황제를
기어이 불러들이는 까닭을 칸은 알 수 없었고 물을 수도 없었다. 스스로 강자의 적이 되는 처연하고 강개한 자리에서 돌연
아무런 적대행위도 하지 않는 그 적막을 칸은 이해할 수 없었다. 압록강을 건너서 송파강에 당도하기까지 행군대열 앞에 조선
군대는 단 한 번도 얼씬거리지 않았다.
대처를 지날 때에도 관아와 마을에는 인기척이 없었다. 조선의 누런 개들이 낯선 행군대열을 향해 짖어 댈 뿐이었다. 도성과
강토를 다 비워 놓고 군신이 언 강위로 수레를 밀고 당기며 산성 속으로 ㄷ르어가 문을 닫아걸고 내다보지 않으니, 맞겠다는
것인지 돌아서겠다는 것인지, 싸우겠다는 것인지 달아나겠다는 것인지, 지케겠다는 것인지 내주겠다는 것인지, 버티겠다는 것인지
주저앉겠다는 것인지, 따르겠다는 것인지 거스르겠다는 것인지 칸은 알 수 없었다]
나는 인조에 대해서는 극단적으로 나쁜 감정을 갖고 있다. 그 이유는 병자호란 당시 청의 볼모로 잡혀갔던 소현세자가
조선으로 돌아온 뒤 얼마지나지 않아 죽었는데 그 배후에 인조의 음모가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의심 때문이다.
조선으로 돌아왔을 당시 소현세자의 나이는 20대의 건장한 청년 이었다. 청에서도 무사히 건강하게 있다가 돌아온
소현세자가 돌아와 얼마 지나지 않아 죽게 된 것도 이상하고 그 원인이 독극물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추측이 있는데
정말 인조는 이 모든 일과 연관이 없는 것일까?
전에 읽은 책에 의하면 광해군이 왕으로 있을 당시 반정을 통해서 왕위에 오른 인조는 자신이 적합한 절차를 통해 왕권을
계승 받은 것이 아니라 그것에 대해 컴플렉스가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볼모로 잡혀 갔던 소현세자가 청나라에 있던
선교사들에게 서양의 문물을 배우고 청나라에도 좋은 이미지를 심어주는 등 고단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청의 생활을 생각보다
잘 마치고 돌아오자 인조는 소현세자가 청과 손을 잡고 자신을 배신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막연한 두려움과 의심을 하고 있었다.
이런 의심을 갖게 된 것은 아마도 인조 자신이 반정(인조반정)을 통해 왕이 됐기 때문에 자신 또한 언제든지 반정을 통해
왕권에서 내려올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인 것 같다. 확실하지는 않지만 이런 추측이 있기 때문에 나는 인조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 남한산성을 읽고 보니 인조를 단순하게 아들을 버린 아버지로 볼 것 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고 인조를 자존심까지 버려가면서 백성을 지킨 성군이라고 생각하지도 않는데 과연 인조는 자신을 버려 백성을 구한
성군일까 통치기간 동안 여러가지 불미스러운 일이 많았던 실패한 왕이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