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책을 선택하는 기준에는 나름대로 여러가지 사항이 있다.

머릿말, 작가, 책 크기(가방에 넣고 다니면서 읽기 편해야 하니까)

그리고 다른 사항은 보지 않더라도 꼭 확인하는 펴낸날.

이 책이 재미있는 책인지 재미없는 책인지는 사실 읽어보지 않고서는 알 수가 없다.

이런 경우 다른 사람들의 판단을 참고하는데 내게는 그 참고하는 방법이 바로 책의

맨 뒤에 있는 펴낸날이다. 1쇄에서 멈춘 책은 별로 읽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지만,

3쇄, 5쇄 정도 되는 책들은 왠만큼 재미가 보장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사람마다 취향이 다르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의 평가를 절대적인 판단 기준으로

삼을 수는 없지만 수천, 수만개의 책들 중에서 지금 읽을 단 한 권의 책을 선택하는데는

꽤 좋은 기준이 된다.

 

사실 이 책의 경우, 거의 600 페이지에 달하는 꽤 두꺼운 책이기 때문에 책의 내용과는

상관없이 들고 다니기가 너무 불편해서 평소라면 선택하지 않았을테지만, 도서관에서

읽어본 처음 몇 페이지가 괜찮은 것 같아서 별 기대 없이 빌려 버렸다.

 

 

 

천개의 찬란한 태양은 전생 속 아프가니스탄에서 힘겨운 삶을 살았고, 살고 있는 두 여자

마리암과 라일라의 이야기다.

마을에서 극장을 경영하는 부자 아버지를 둔 마리암. 하지만 그녀는 그의 사생아이다.

세상에 공개되지 않은 숨겨둔 자식. 가끔씩 찾아와 자신에게 애정을 보여주는 아버지를

믿고 그의 집에 찾아가지만 차가운 대접만 받고 오히려 나이든 구두장이한테

시집 보내지고 만다.

15살의 어린 나이에 자신의 두배도 훨씬 넘는 나이의 남자는 처음에는 잘해주는 것

같았지만 그녀가 한 번, 두 번 유산을 하자 곧 그녀에 대한 마음이 싸늘하게 식고

그녀를 핍박하기 시작한다. 온갖 무시와 폭력에 쌓인채 18년의 세월이 흐른다.

 

 

여자도 배워야 하고 사회 일원으로서의 역할을 할 수 있다고 가르치는 아버지 밑에서

자란 라일라. 소련이 침공 했을때도 잘 견뎌낸 그녀의 가족이지만 탈레반이 도시를

점령하자 더이상 견딜 수가 없다. 항상 옆에서 자신을 지켜주고 아껴주던 이웃집의

타리크가 가족들과 함께 파키스탄으로 떠난 후  2개월 뒤, 라일라의 가족도 카불을

떠나기로 마음 먹지만 집에 떨어진 폭탄에 의해 부모님은 죽게 되고 이웃에 살던

마리암과 그녀의 남편은 라일라를 데려와 치료해 준다.

 

마리암에 대한 애정이 식었던 남편은 손녀뻘 되는 라일라에게 자신의 첩이 되던지

아니면 탈레반이 들끓는 거리로 나가라고 한다. 그 제안을 받아들일리 없는 라일라는

어느날 한 남자로부터 타리크가 파키스탄으로 가는 중에 폭격을 맞아 죽었다는 소식을

듣는다. 목숨을 걸고라도 찾아갈 단 한 사람이 없어진 것이다.

자긍심 높은 라일라지만 자신의 뱃속에 타리크의 아이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그녀는

결국 아이를 위해서 그의 첩이 되기로 한다.

 

자신의 영역에 들어와 남편의 관심을 받는 라일라가 마음에 들지 않는 마리암과

친해지고 싶지만 마음을 열어주지 않는 마리암 때문에 괴로운 라일라.

처음 두 사람은 서로 엇갈리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라일라도 남편의 관심 밖

대상이 되고 마리암과 별반 다르지 않은 처지가 되면서 유대감을 느낀다.

 

딸 아지자와 아들 잘마이가 태어나고 남편은 아들이 태어나자 그에게 한없는 애정을

바친다. 하지만 세명의 여자에 대한 인간 이하적인 행동은 계속된다.

아이를 낳고 함께 키우고 남편이라는 공통의 적을 가진 마리암과 라일라는 곧 친모녀

이상의 유대감을 갖게 되는데, 어느날 외출에서 돌아온 집 앞에는 타리크가 기다리고 있다.

라일라는 타리크가 죽었다는 소식을 전한 남자가 남편에게 사주를 받았던 것을 알게 되고,

그날 밤 퇴근을 한 남편에게 타리크와 만난 것을 들키게 된다. 그일로 라일라를 죽음

직전까지 때리는 남편을 마리암은 삽으로 머리를 쳐 죽이게 된다.

 

라일라는 자신이 남아서 마리암의 정당방위를 변호한다하지만 그런 것이 통하지 않을

아프가니스탄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마리암은 타리크, 두 아이와 함께 떠나라 하고

자신이 모든 죄를 받아들이며 사형을 받게 된다.

 

파키스탄에서 나름대로 안정된 생활을 하는 네사람이지만 라일라의 마음속에는 늘

자신의 고향인 카불과 마리암이 자리 잡고 있다. 이쯤 미국의 무역센터가 빈라덴의

주도하에 비행기 폭격 테러를 맞게 되고 미국은 탈레반을 쫓아내고 빈라덴을 찾아

아프가니스탄을 공격한다. 소련의 침공, 탈레반의 폭력 이후 다시 전쟁이 일어나려 하지만

이번 전쟁 후에는 뭔가 변할거라는 작은 희망이 보인다.

어느 날 라일라는  타리크에게 카불로 돌아가자 부탁하고 곧 그들은 고향으로, 어린시절

자신들이 뛰어 놀던 그 곳으로 돌아오게 된다. 아직은 전쟁의 폐허 속에서 모두들 힘든

날들을 보내고 있지만, 다들 기운을 내서 새로운 삶을 준비하고 내일은 좀더 나을 거라는

희망을 갖고 살아간다.

 

 

본문 중

 

『아름다운 순간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마리암은 대부분의 삶이 자신에게 친절하지

않았다는 걸 알았다. 하지만 그녀는 마지막 스무 걸음을 걸으면서 조금 더 살았으면 싶었다.

라일라를 다시 보고 싶었다. 그녀의 웃음소리를 듣고 싶었다. 그녀와 같이, 별들이 떠 있는

하늘 밑에서 차를 마시고 먹다 남은 할와를 먹었으면 싶었다. 마리암은 아지자가 커가는

모습을 볼 수 없다는 사실이 슬펐다. 그녀가 아름다운 처녀로 성장하는 걸 못 본다는 게

슬펐다. 그녀의 손톱을 헤나로 칠해주고 결혼식 날에 노쿨(사탕)을 뿌려주지 못한다는 게

슬펐다. 아지자의 아이들과 놀아줄 수 없다는 게 슬펐다. 늙어서 아지자의 아이들과 놀아주

는 건 참 좋을 것 같았다.

(중략)

마리암은 이 마지막 순간에 그렇게 많은 걸 소망했다. 그러나 눈을 감을 때, 그녀에게

엄습해온 건 더 이상 회환이 아니라 한없이 평화로운 느낌이었다. 그녀는 천한 시골 여자의

하라미(사생아)로 이 세상에 태어난 것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그녀는 쓸모없는 존재였고,

세상에 태어난 것만으로도 불쌍하고 유감스러운 일이었다. 그녀는 잡초였다. 그러나 그녀는

사랑을 하고 사랑을 받는 사람으로서 세상을 떠나고 있었다. 그녀는 친구이자 벗이자 보호자

로서 세상을 떠나고 있었다. 어머니가 되어, 드디어 중요한 사람이 되어 이 세상을 떠나고

있었다. 마리암은 이렇게 죽는 것이 그리 나쁜 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리 나쁜 건 아니었다.

이건 적법하지 않게 시작된 삶에 대한 적법한 결말이었다.』

읽은 책의 거의 모두에 대해서 짧게라도 코멘트를 남기는데 이 책을 읽으면서는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 책의 내용을 짧은 글로 얘기 할 수 있을까?

두 여자의 긴 고단한 삶과 우정에 대해 느낀 만큼 설명 할 수 있을까?

아무래도 자신이 없었다. 역시 글을 쓰는 지금도 위에 써 놓은 내용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정말 재미있게 읽었는데 글로 표현하기가 쉽지 않다.

이 책은 단지 소설일 뿐이다. 하지만 아주 없는 얘기라고는 할 수 없다. 마리암과 라일라는

분명 가상의 인물이지만 소련, 탈레반, 미국의 등장은 실제 상황과 맞아 떨어진다.

그렇기 때문에 마리암과 라일라 같은 삶을 산 여자들이 아예 없다고는 할 수 없다.

 

이 글을 읽으면서 놀라운 것은, 21세기니 인공지능이니 하며 너도나도 발전과

새로움을 말하는 이 시대에 아직도 원시적인 전쟁이 발생하고 있으며, 우리가

겪어보지 못해 상상도 할 수 없는 처참한 삶을 사는 사람들이 여전히 존재 한다는

것이다. 과거에 사람들이 직접 칼과 총을 들고 몸과 몸을 부대끼면서 싸우던 것이

탱크, 폭탄 같은 거대한 무기를 이용한 싸움으로 변한 것 말고는 사람이 사람을 죽인다는

것은 달라지지 않았다.

TV에서 미국의 전쟁 선포, 폭탄 투하, 자살 폭탄, 수십명의 무고한 사람들의 죽음 같은

것들을듣기는 했지만 그건 나에겐 너무도 먼 나라의 이야기로, 실제로 벌어지고 있는

상황이라기 보다는 어딘가 영화처럼 현실감 없는 말들 이었다. TV에서 나오는 소리들을

별 생각 없이 멍하게 듣는게 아니라 , 상상을 하면서 마리암과 라일라의 삶을 통해 훔쳐 본

전쟁이라는 무차별적인 폭력은 생각보다 훨씬 잔인하고 위협적인 것이었다.

나는 전쟁이라는 것은 착하고 못된 사람을 가리지 않으며, 내일 아침에 눈을 뜨는 것이

더이상 평범한 일이 아니고, 머리 위로 떨어지는 폭탄 앞에서는 그 무엇도 장담 할 수

없다는 것을 아주 조금은 이해하게 되었다.

 

 또 한가지 놀라운 점은 이렇게 파괴적이고 위협적인, 절대로 견딜 수 없을 것 같은 상황

에서도 두 여자는 희망을 찾아 냈다는 것이다. 견제하던 처음과는 달리 서로 의지하고 힘이

되어주며 자신의 목숨까지 버리는 우정을 두 사람은 발휘한다. 죽을 만큼 힘든 상황에서도

자기의 목숨보다 더 소중한, 지키고 싶은 한 가지는 결국 존재하고 만다.

 

 

 

 

도서관에서 책을 빌리고 틈틈이 읽었지만 반납하는 날까지 반 밖에 읽지를 못했다. 다시 빌리

려면 일주일을 기다려야 하는데 그 시간이 너무 길게 느껴졌다. 직접 산 책은 절대 재미있지

않고, 끝까지 읽지 못한다는 징크스가 있어서 책을 빌려 보는데 이 책은 반납과 동시에

사버렸다. 이미 중간까지 읽어 버렸지만 사서 보는게 당연하다고 생각됐다.

생계유지가 어려워 라일라가 딸을 고아원에 맡기고 미친듯이 울어대는 그녀의 손을 뿌리치고

달려가는 장면이나, 라일라를 위해서 남편을 죽인 마리암의 최후. 그것 말고도 몇몇 장면에서

가슴이 먹먹해지는 것 같았다. 일부러 슬픔을 자극하는 내용은 없지만 두 사람의 일상의

고단함과 이겨내고자 하는 의자와 희망이  글에서 고스란히 느껴져 몇 번 책을 덮었다 다시 열였다.

언뜻 보면 굉장히 지루한 주제의 책 같지만, 읽다 보면 계속 읽고 싶어지는 마음이 드는 글

이다. 이 책을 통해 아프가니스탄이라는 나라에 대해 조금이나마 관심을 갖고 약간의  역사적인

사실들을 알게 되었고, 전쟁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해준 계기가 되었다.

 

 

『모든 강물은 바다로 흐른다.

그래도 바다는 넘치지 않는다.

어딘가에서 흘러왔던 그 강물은 결국

다시 흘러왔던 곳으로 되돌아가는 법이니까.』

 

 

 

수영은 온전히 자신만의 싸움이다. 팔을 휘젓고 발길질을 해대는 만큼 앞으로 나아간다.

고개를 빼꼼히 내밀고 한 숨, 두 숨 마시고 내뱉을 때마다 힘이 들지만 다른 사람이

자신을 대신해서 몸을 움직여 줄 수는 없다.

하지만 물 밖에서 힘들어 하는 사람에게 힘을 내라고 응원을 하고, 옆길로 빠지지 않도록

이끌어 줄 수는 있다.

 

 

 

15세의 소녀 제시는 수영을 너무도 사랑한다. 숨을 토해내고 마실 때의 리듬을 사랑해서

기분이 좋을 때나, 불안할 때도 늘 수영을 했으며, 수영을 하고 있지 않을 때도 그 리듬을

떠올리며 마음을 가라앉혔다.

그녀의 할아버지는 무뚝뚝하고 약간은 괴짜에다 사람들이 상대하기 피곤한 성격을 가진

꼬장꼬장한 노인이지만, 제시는 그런 할아버지를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사랑하고 할아버지가

다른 누구보다 자신에게 애정을 갖고 있음을 안다. 그런 할아버지가 어느 날 심장발작으로

쓰러지게 되고 제시와 제시의 부모님은 할아버지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느끼게 된다.

의사는 절대적인 안정이 필요하다고 하지만 도무지 당해낼 수가 없는 고집을 가진 할아버지는

미리 계획했던 여름휴가를 떠나자고 한다.

 

결국 할아버지를 이길 수 없었던 가족들은 할아버지의 고향으로 여행을 떠나게 된다. 지금의

제시와 같은 나이인 15살에 화제로 집과 부모를 잃고 고향을 떠났던 할아버지는 그동안 한 번도

고향을 찾은 적도 없고, 다른 사람들에게 과거 이야기를 하는 것 조차 싫어했는데 그 고향으로

여름휴가를 온 것이다. 그 곳은 아주 한적한 시골이라 주위 몇 km 안에는 사람이 살지도 않으며

온통 제시 가족만의 공간이 만들어지는 곳이다. 그런 곳에서 제시는 한 소년과 자꾸 마주치게

되고 그 소년의 정체가 궁금하지만 쉽게 다가가지 못한다. 제시는 그 소년을 리버보이라 부른다.

 

가족들의 바램과 달리 할아버지의 병세는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고 가족들은 도시와 떨어진

곳에서 할아버지에게 무슨 일이 생길까 염려하지만 그 곳에서 예정된 휴가를 보내려는 할아버지의

고집은 좀처럼 꺽을 수가 없다. 그런 날들이 계속 되면서 제시는 생각하고 싶지는 않지만

할아버지와의 이별을 조금씩 준비해야 함을 느끼게 되고 그 사실에 가슴 아파한다.

결국 할아버지는 다시 심장 발작을 일으켜 병원으로 옮기지만 죽음을 맞이하게 되고 할아버지가

그린 리버보이라는 그림을 통해, 제시는 리버보이라 이름을 붙인 신비한 소년이 과거의

할아버지임을 알게 된다.

 

 

 

 

성장소설이라고는 하지만 죽음을 앞둔 할아버지의 과거의 모습을 손녀가 만나게 되는 이야기에는

약간의 판타지적인 요소가 가미되어 있다. 늘 강인할 것만 같던 할아버지가 스프를 떠먹을 힘조차

없어지고 어딘가 초점 흐린 눈빛을 하면서 결국 세월을 이기지 못하고 점차 죽어가는 모습은 분명

제시와 가족들에게는 견디기 힘든 고통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사람은 누구나 태어나면 언젠가는

죽게 되어있다. 다만 죽음을 맞이하는 상황과 시간은 인간의 힘으로는 결정할 수 없는 것일 뿐이다.

 

'너를 위해 뭔가 해줄게 없을까?'라고 묻는 할아버지에게 제시는 '그냥 행복해주세요.'라고 말한다.

어릴 적 강물이 시작되는 근원지에서 바다까지 헤엄쳐 가보고 싶었던 할아버지는 먼 훗날 어린아이의

모습으로 다시 나타나 제시와 함께 결국 그 일을 해내게 되고 그 순간 나이든 할아버지는 죽게 된다.

현실적으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영원히 잠든 할아버지의 얼굴을 본 제시는 할아버지가 결국

어릴적 바램을 이루게 된 것을 알고 제시의 소원대로 행복하게 가신 것을 이해하게 된다.

저자는 이 책에서 "인생이란, 가장 슬픈 날 가장 행복하게 웃는 용기를 배우는 것"이라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내 생각에 이것은 슬픈 상황이 닥쳤을 때 억지로 그것을 이기려 하는 것이 아니고

슬픈일이 있을 때는 그 슬픔을 거스르지 않고 기꺼이 눈물을 흘린 후, 시간을 갖고 마음을 다스려

언제까지고 그 슬픔에 빠져 있는 것이 아니라 슬픔을 통해 기쁨과 행복의 소중함을 알아가는 것이

정말 중요한 것이다라고 말하는 것 같다.

 

엄청난 입소문이나 판매량과는 달리 이 소설 자체는 단 며칠 간의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순간을

제시라는 소녀의 입장에서 강물처럼 잔잔하고 고요하게 마치 속삭이듯이 이야기를 진행시키고 있다.

나는 책을 읽었을 때 대부분의 경우 그 책의 좋은 점만을 보는 경향이 있다. 이 책의 경우도 소문과는

달리 별 볼일 없는 책이라는 혹평을 하는 사람도 있지만  아이도 어른도 아닌 다소 어중간한 사춘기

소녀의 풍부한 감수성을 그대로 단순하게 표현한 이 책을 '청소년'을 위한 책이라기 보다는 어른이

읽기에도 충분히 아름다운 책이라고 말하고 싶다.

 

『 "사람의 일생을 보는 것 같지?"

"일생이라고?"

"강은 여기에서 태어나서, 자신에게 주어진 거리만큼 흘러가지. 때로는 빠르게 때로는 느리게,

때로는 곧게 때로는 구불구불 돌아서, 때로는 조용하게 때로는 격렬하게. 바다에 닿을 때까지

계속해서 흐르는 거야. 난 이 모든 것에서 안식을 찾아."

"어떻게?"

"강물은 알고 있어. 흘러가는 도중에 무슨 일이 생기든, 어떤 것을 만나든 간에 결국엔 아름다운

바다에 닿을 것임을. 알고 있니? 결말은 늘 아름답다는 것만 기억하면 돼."

"하지만 죽음은 아름답지 않아."

그녀는 할아버지를 생각하며 말했다.

"아름답지 않은 건 죽음이 아니라 죽어가는 과정이겠지."

그가 여전히 바다를 바라보며 말했다.

"삶이 항상 아름다운 거 아냐. 강은 바다로 가는 중에 많은 일을 겪어. 돌부리에 채이고 강한

햇살을 만나 도중에 잠깐 마르기도 하고. 하지만 스스로 멈추는 법은 없어. 어쨌든 계속 흘러가는

거야. 그래하만 하니까. 그리고 바다에 도달하면, 다시 새로운 모습으로 태어날 준비를 하지. 그들에겐

끝이 시작이야. 난 그 모습을 볼 때 마음이 편안해 지는 것을 느껴."』

 

『결혼이란 무엇일까 생각해 보았다. 반려니 어쩌니 말은 그럴듯하다. 누군가 한 사람을 배우자로

정하는 것이 나의 긴 인생에 얼마만큼 중요한 일일까. 오직 한 사람과 부부로 살아갈 자신은 없다.

결혼을 한다 해도 바람피울 게 뻔하다. 그런데도 굳이 결혼할 필요가 있을까. 무엇을 위해? 사회적인

입장 때문에? 대체 나는 미츠코에게 무엇을 맹세하려는 걸까. 거기서 어떠한 마음의 평안을 구하려는

것일까. 』

 

 

호청년이라는 별명 답게 서글서글한 마스크와 유쾌한 성격을 가진 인기남이다. 하지만 이 인기남이라는

것은 이성으로서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누구나 그를 아낀다는 것이다. 호청년 유타카는 그런 자신의

장점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면 그것을 적당히 이용할 줄도 아는 청년이다.

 

1975년 8월의 방콕, 이스턴 에어라인 항공사의 직원인 유타카는 부인으로 너무도 이상적인 미츠코와의

결혼 사실을 자신의 친구들에게 알리고 있었다. 그 자리에는 유타카의 친구가 데리고 온 토우코라는

여자도 있었지만 돌아오는 크리스마스에 있을 미츠코와의 결혼식에 대한 설레임으로 그런 여자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그로부터 몇일후 자신의 집으로 느닷없이 찾아온 토우코와 관계를 맺은 유타카는

얌전하고, 상냥하고, 헌신적인 약혼자 미츠코와는 정반대인 토우코에게 깊고 빠르게 빠져들게 된다.

그 후 두사람은 거의 매일 토우코가 머무르고 있는 오리엔탈 방콕의 서머싯 몸 스위트에서 사랑을 나누게

된다.

약혼자인 미츠코는 먼 일본 땅에 있고, 자신에게 격렬하게 대쉬하는 토우코는 바로 코 앞에 있다. 미츠코

에게 질린 것은 아니지만 왠지 미츠코와는 다른 직선적, 도발적, 당당함 이라는 무기를 앞세운 토우코에게

빠져나가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유타카에게는 약혼녀가 있고 크리스마스에 결혼을 하게 될 것이라는 걸

두 사람 모두 알고있었지만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하는 사이에 둘은 진짜 사랑에 빠져버리게 되지만 결코

사랑한다는 말을 입 밖으로 내 뱉지는 못한다.

 

그렇게 초조함과 격렬함으로 가득 찬 4개월이 지나 결혼식을 하루 앞두고 토우코는 방콕의 생활을 정리하고

도쿄로 떠나게 된다. 토우코가 출발 게이트로 들어가서 나서야 유타카는 미친 듯이 그녀을 둘렀지만 결코

뒤돌아 볼 그녀가 아닌 것이다. 그녀의 모습이 사라진 후 유타카는 온 몸에 힘이 풀려 주저앉아 버리지만

금세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안된다. 4시간 후면 미츠코와 가족들이 다음 날 있을 결혼식을 위해 공항에 도착

하는 것이다.

 

 

 

그렇게 25년의 세월이 흘렀지마 유타카는 단 한순간도 토우코의 잔상을 머리속에서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미츠코와의 결혼생활에서 2명이 아들을 낳고 회사의 전무이사 자리까지 오른, 남들이 보기에는 성공한 인생을

산 유타카지만 늘 가슴 한 구석에 작은 구멍이 난 듯한 허전함을 떨쳐 버릴 수가 없었던 것이다. 어느 날

회사 일로 25년 전의 그 오리엔탈 방콕을 가게 되는데 그 호텔의 지배인이 된 토우코를 만나게 되고 두 사람이

그 옛날의 감정을 고스란히 가지고 있음을 알게 되지만 도망치듯 방콕을 떠나오게 된다.

 

다시 5년 후, 암에 걸린 토우코의 편지를 받고 방콕으로 날아간 유타카는 그제서야 사랑했다,가 아니라

사랑해요,라는 말을 하게 되고 그가 돌아온 2주 후 토우코의 사망소식을 듣게 된다.

 

 

단, 4개월의 짧은시간의 추억을 가지고 30년을, 그리고 그 이상을 살고 있는 두 사람을 보면서 과연 그런

감정의 지속이 가능할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아무리 아름답게 포장하려해도 결국 두 사람은 비록 결혼

전이라고는 하지만 두 사람의 사랑을 위해서 다른 사람들을 아프게 한 것이다.

미츠코는 유타카가 평생을 자신만을 보면서 열심히 일한다고 생각하지만 일이 일찍 끝나는 날이면 혼자 바에 들러

위스키는 시켜 놓고 옆자리에는 기억 속의 토우코를 불러내 가슴아파 한다는 것을 알지 못한 것이다.

헤어질 것을 알고 두 사람의 사랑이 계속될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 시작한 사랑은 오죽했을까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보수적이고 현실적인 나로서는 결코 두 사람의 가슴아픈 사랑을 이해할 수 만은 없다.

 

 

 

『유타카 씨는 죽음을 눈 앞에 두고 사랑받은 기억을 떠올리시겠어요. 아니면 사랑한 기억을 떠올리시겠어요? 저는

사랑한 기억을 떠올릴 겁니다. 네, 물론 사랑받은 기억도 떠올리겠죠. 그것은 기쁜 기억으로. 하지만 사랑했다는 것,

내 자신이 누군가를 진지하게 사랑했다는 것은 생물체로 태어나 할 수 있는 가장 귀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일생을 보내고 싶어요.』

 

 

 

 

안녕, 언젠가

 

인간은 늘 이별을 준비하며 살아가야 하는 거야

고독이란 절대로 배신하지 않는 친구라고 생각하는 게 좋아

사랑 앞에서 몸을 떨기 전에, 우산을 사야 해

아무리 뜨거운 사랑 앞이라도 행복을 믿어서는 안 돼

죽을 만큼 사랑해도 절대로 너무 사랑한다고 해서는 안 되는 거야

 

사랑이라 계절과도 같은 것

그냥 찾아와서 인생을 지겹지 않게 치장할 뿐인 것

사랑이라고 부르는 순간, 스르르 녹아 버리는 얼음 조각

 

안녕, 언젠가

 

영원한 행복이 없듯

영원한 불행도 없는 거야

언젠가 이별이 찾아 오고, 또 언젠가 만남이 찾아오느니

인간은 죽을 때, 사랑받은 기억을 떠올리는 사람과

사랑한 기억을 떠올리는 사랑이 있는 거야

 

난 사랑한 기억을 떠올리고 싶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