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널을 파나갈 때 제일 끝에 있는 지점을 채굴장이라고 합니더. 터널이 뚫리면
채굴장은 없어지지만, 계속 파는 동안은 언제나 그 끝이 채굴장이지예."
아직 터널이 뚫리기 전의 막다른 길. 그 채굴장 안에는 무엇이 있을까.
주인공 세이는 화가인 남편과 함께, 작은 섬의 초등학교 양호 선생으로 지내고 있다.
단조롭지만 조용하고 평화로운 일상에 만족스러운 삶을 살던 그녀인데 어느 날,
도쿄에서 내려온 젊은 음악 선생 이사와의 출현으로 그녀의 마음 속에 작은 파문이
일어난다. 첫 만남부터 그리 좋은 인상을 준 이사와는 아니지만 왠지, 심술 궂고
무심한 듯한 그가 자꾸 신경이 쓰이는 것을 참을 수가 없다.
사랑같은 정확한 명사로 그에 대한 감정을 단정할 수는 없지만, 의도하지 않아도
이사와에 대한 생각을 하는 자신에 대해 조금씩 겁이 나는 세이.
물론 책 속에서 그녀가 이사와와 불륜을 저지른다거나, 그에 대한 말 할수 없는 애정으로
괴로워한다던가, 남편과 마찰이 생긴다건가 하는 사건은 일어나지 않지만 같은 학교
교사 쓰키에와 이사와의 스캔들 같은 것에 은근히 신경쓰는 세이를 보면서 그녀의
흔들림을 이미 눈치 챈 독자로서는 그런 세이가 상당히 위태로워 보인다. 혹시나 그녀의
혼란을 남편이 눈치채 버리는 것은 아닐까 하는 걱정과 함께.
결국 이사와는 예고없이 왔던 것처럼 홀연하게 떠나가 버림으로써, 처음부터 그런 사람이
없었다는 듯이 남겨진 사람들은 그를 잊어 가지만, 단 몇개월의 짧은 시간동안 세이에게는
한 가지의 추억을 남기고 간다.
일본소설 특유의 분위기나 문체에 어쩐지 질려버려서 한동안 일본책을 거의 읽지 않았었는데
이번에 책 카페에서 당첨되는 바람에 오랜만에 다시 읽게 되었다. 제목이나 스토리만으로는
크게 동하지는 않았지만 2008년 나오키상 수상작이라는 타이틀에 슬쩍 기대가 들었다.
이런 명함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것은 아니지만 지금까지 이노우에 아레노라는 작가는 접해 본
적이 없기 때문에 어떤 느낌의 글을 쓰는 작가인가 궁금했다고 할까.
소박하지만 빈틈없이 채워 진 책을 읽고 있자면 '성숙한 어른들의 글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남편이 있는 여자가 잠시나마 다른 남자를 마음에 둔다,는 지극히 객관적인 요약만을 보면
어째서 일본은 이런 책만 쓰는 걸까라는 나의 편견에 무게를 더 실어줬을지도 모르겠지만, 이 책
을 읽고 있으면 문장과 문장 사이사이를 통해서 등장인물들의 불안하고 초조한 마음같은 것들을
느낄 수 있어서 보이는 글자 이상의 생각을 할 수 있는 작품이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만약에 세이와 이사와가 한 순간의 감정에 휩쓸려서 하룻밤을 지내거나 하는 장면이 있었다면
실망했을지도 모르겠지만 말 없이 떠나버린 이사와와 남편과의 생활에 만족하는 세이를 보면서
이게 더 현실적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마음에 들었다.
무엇보다 나는, 신선하고 아슬아슬한 매력을 가졌지만 정체를 알 수 없는 이사와 보다는 항상 곁에
있어주는 편안하고 자연스러운 화가 남편쪽이 마음에 들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