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시유스케의 작품을 처음 접한 것은 영화로도 성공한 [검은집]이었다.

영화도 훌륭했지만 내가 처음 접한 기시유스케를 표현하기엔 많이 부족했다.

그 후 [크림슨의 미궁]과 [악의 교전]을 접하면서 어느새 그의 팬이 되었다.

[검은집]과 [악의 교전]에서는 싸이코패스에 의한 무자비한 학살을 그렸고

[크림슨의 미궁]에서는 판타지 게임을 연상시키는 무대를 만들어 냈다.

이번에 읽은 [다크존]은 [크림슨의 미궁]이 거대한 스케일로 확장된 완성편이다.

현실이라고 할 수도 없고 비현실이라고 할 수도 없는 판타지적 공간인 다크존에서

오직 살아남기 위한 본능만으로 서로를 끝없이 죽이는 잔혹한 게임을 벌이는 내용.

지독하게 끔찍하지만 어느새 인터넷 게임 등을 통해 익숙해져 버린 기시감이 생긴다.

그리고 끔찍한 게임의 이변에 숨겨진 한 청년의 비극은 우리의 슬픈 자화상이 된다.

 

책의 도입부에 전투의 무대가 되는 섬의 지형도가 나오고 일본 장기에 대한 설명이 나온다.

다크존에서 인물들이 벌이는 게임의 규칙은 일본 장기에서 따왔다고 한다.

작가 스스로 일본 장기의 팬이어서라고 하는데 일본 장기를 몰라도 읽는데 전혀 문제가 없다.

나도 일본 장기를 한 번도 본 적이 없지만 이렇게 재미있게 읽은 소설은 드물 정도의 몰입감이다.

일본의 전통장기에 서양의 체스와 조합하고 거기에 컴퓨터 게임의 외양을 입힌 시스템.

소설의 주인공들이 장기판이 말이 되어 컴퓨터 게임 속으로 들어가서 싸우는 것 같은 이야기.

마치 게임에서 온 몸이 찢겨서 피를 튀기면 죽어가는 캐릭터의 입장에서 항변하는 느낌이다.

실제로 우리가 그런 상황에 처한다면 너무나도 공포스러워 사고가 마비될 정도일텐데

우리는 너무도 쉽게 잔인함을 목도하고 아무렇지도 않게 폭력에 중독된 것은 아닐까?

작가가 다크존이라는 공간을 게임 속 배경와 연결시키는 부분은 중독된 폭력에 대한 경고가 아닐까?

 

서로를 죽이기 위한 치열한 대국의 마지막에 '단장'이라는 제목으로 이어지는 쓰카다의 이야기.

오로지 프로 장기기사를 목적으로 치열한 경쟁을 벌이며 살아가는 그의 모습은 바로 우리의 모습이다.

누군가 밟고 올라서야 살아남을 수 있는 지금의 치열한 경쟁사회는 우리가 겪고 있는 현실이다.

환상과 현실을 오가며 이야기하지만 어쩌면 정상적으로 생각하는 현실이 더 비참할 수 있다.

다크존에서처럼 피가 튀고 온 몸이 찢기는 잔인함은 없지만 현실의 경쟁은 오히려 더 잔인하지 않은가?

결국 벼랑 끝에 몰린 쓰카다의 선택이 가져 온 현실의 비극은 그래서 더 끔찍하게 느껴진다.

나도 언제든지 그런 상황에 몰릴 수 있고 나의 선택은 그와 다를 것이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 없기에...

수미상관법을 사용한 마지막 장은 그런 공포를 극한까지 몰아넣는다. 결국 빠져나올 수 없는 것인가?

 

기시유스케라는 작가는 기대이상의 이야기를 준비하고 있다.

그가 만들어 놓은 세계에 빠지는 것은 오로지 독자의 선택이다.

나는 그의 세계에 빠질 것을 강력히 추천한다. 세상은 참으로 잔인한 곳이다. 강추 !!!

기시유스케, 다크존

언뜻 과학적인 상상력의 총아처럼 보이지만 가장 허구적인 장르인 영화.

그렇지만 '일어날 수도 있는 개연성'에 바탕을 둔 영화라는 장르의 특성상

일정 부분은 과학적 진실이나 알려지지 않는 과학적 사실을 가지고 있다.

이미 여러가지 시도를 통해 과학과 다른 장르의 크로스를 꾸준히 시도해 온 작가가

이번에는 영화라는 허구속에 녹아있는 과학적 사실들에 대한 이야기를 펼친다.

이 책에서는 주로 인간의 뇌속에서 일어나는 불가사의한 현상의 결과로 나타나는

수많은 이상행동들과 신경정신과적 질병들이 등장하는 영화들을 대상으로 했다.

'레인맨'의 자폐증,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다'의 결벽증, '아이다호'의 기면발작 등.

거기에 최근 이슈가 되고 있는 유전공학을 바탕으로 한 새로운 논쟁에 대해서도 설명한다.

 

인간의 뇌는 아직 인간에게 접근을 허락하지 않은 유일한 공간이고

우주보다 광할하고 복잡한 구조를 가진 인간 신체의 가장 은밀하며 섬세한 기관이다.

이전에는 단순히 '미쳤다', '악마에 씌였다' 정도로 인식되어 수많은 희생자를 발생시킨 일들도

과학의 비약적인 발전으로 과학적인 설명이 가능하고 치료까지 가능한 질병으로 인식되고 있지만

아직도 과학이 풀지 못한 수많은 문제들은 대부분 인간의 뇌가 작용한 결과의 산물들이다.

자폐증, 결벽증, 기면발작, 성정체성, 거식증, 폭식증 등의 신경정신학적인 질병들에 대해

그 원인이 되는 뇌의 활동을 추론해 보고 현재까지 밝혀진 원인들을 설명해 주는 것을 읽고 나면

우리가 우리 인체에서 유일하게 정복하지 못한 인간의 뇌의 신비로움에 빠져들게 된다.

 

또 다른 주제인 유전공학의 내용은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를 모두 가진 세계이다.

유전공학이 세계를 기아에서 구할거라는 희망과 또다른 차별로 인한 절망이 공존하는 세계이다.

'가타카'에서 보여주는 유전인자에 의한 선천적인 차별이 만들어 내는 무섭고 우울한 세계,

'로보캅'이 시도한 사이보그적 결합이 가져오게 될 지도 모르는 또다른 윤리적 논쟁에 대한 고찰 등

유전공학의 발전이 가져오는 희망과 절망의 세계관을 영화를 통해 살짝 엿보는 재미가 좋다.

그와 별개로 '스파이더맨'의 과학적 가능성과 '언브레이커블'에 대한 과학적 설명 등은

책을 읽는 또다른 재미를 준다. 물론 정재승 교수의 스토리텔링이 뛰어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무엇보다 이 책이 가장 좋았던 것은 내가 본 영화에 대한 회상과 보지못한 영화들에 대한 관심이다.

내가 본 영화들에 이런 과학적인 사실들이 배경으로 깔려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즐거운 경험이고

내가 보지 못했던 영화들은 기회가 된다면 꼭 한번 보고 싶다는 기대를 가지게 해 주었다.

과학을 실험실 안에서만 연구하는 따분하고 박제된 학문으로 머물게 할 수는 없지 않은가?

아이들이 똑같은 꿈만 꾼다는 광고가 떠오르며 과학을 실생활로 가져올 수 없을까?라는 고민을 하고 있다면

정재승 교수의 이 책은 그런 시도를 어떤 방향으로 이끌어야 하는가에 대한 좋은 표본이 되지 않을까? 강추 !!!

올 여름 내가 만난 최고의 소설인 [제노사이드]를 통해 처음 접한 작가.

다카노 가즈아키를 세상에 알린 첫번째 소설이 [13계단]이라기에 주저없이 선택.

[제노사이드]를 너무 재미있게 읽어서였는지 아니면 기대가 너무 컸던 때문인지

기대했던 만큼의 만족도를 보여주지는 못했지만 뛰어난 수작임에는 틀림없다.

억울하게 사형위기에 처한 사형수를 위해 진범을 찾아나서는 추리소설적 재미에

끊임없이 논란이 되고 있는 사형제도에 대한 사회적 논란에 대한 여러가지 시선까지.

소설적 재미와 사회적 논쟁의 적절한 조화를 통해 읽을거리와 생각할거리를 동시에 던진 소설.

작가의 처녀작이라고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치밀한 구성과 뛰어난 반전이 있는 재미난 소설이다.

 

우발적인 과실치사로 인해 2년을 선고받고 1년 6개월 만에 가석방된 미카미 준이치.

교도소에서 자신을 담당하던 난고 교도관이 그에게 사형수의 누명을 벗기는 작업을 제안한다.

자신의 잘못으로 인해 집안이 경제적인 난관에 부딪친 상황에서 미카미는 보수를 위해 승락한다.

10년전 자신이 있었던 장소에서 벌어진 강도살인 사건의 범인의 기억은 계단을 오르고 있었다는 것 뿐.

부족한 단서와 빠져나갈 수 없는 정황적 증거들로 인해 진범의 추적은 쉽지만은 않는 일이된다.

난고와 미카미의 추적은 과연 사형수의 억울함을 밝히고 진범을 찾을 수 있을까?

 

현대의 법치국가는 질서유지를 위해 사적인 복수를 금하고 국가가 대신하는 사형제도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피해자의 가족의 입장에서 본다면 법의 테두리에서 벗어안 범인을 용서할 수 있을까?

자신의 가족은 이미 죽었는데 가해자는 죽지않고 갱생이라는 이름으로 사회에 복귀한다면 그것이 정의일까?

반면에 국가라는 이름으로 자행되는 사형제도는 과연 윤리적인 관점에서 용인될 수 있는가?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해야 하는 국가가 오히려 국민의 목숨을 빼았는 이런 아이러니는 용납될 수 있는가?

혹시나 사형수가 억울한 누명을 쓰고 있다면 이미 사형이 집행된 이후에 진범이 잡힌다면 그것은 살인이 아닌가?

순간의 잘못으로 사형수가 된 사람이 잘못을 뉘우치고 새로운 삶을 살아가려 한다면 그것을 허용해야 하는가?

흔히 말하는 '개전의 정'이라는 것에 대한 명확한 판단을 과연 국가가 정확하게 한다고 확신할 수 있는가?

결국 사형제도는 있어야 하는가? 없어져야 하는가? 국가의 판단은 어디까지 신뢰할 수 있는가?

 

공지영 작가의 베스트셀러이며 이나영,강동원 주연의 영화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이 작품을 통해서 우리 사회에도 사형제도에 대한 찬반 논쟁이 팽팽하게 맞섰던 일이 있었다.

현재 우리나라는 10년 넘게 사형이 집행되지 않아서 사형제도가 없는 나라로 분류된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 형법에는 엄연히 사형제도가 존재하고 그것이 집행되어도 아무런 문제가 없는 상태이다.

아직 우리 사회에는 사형제도에 대한 논쟁이 진행형일 수 밖에 없는 상황이고 이 소설은 거기에 생각할거리를 던진다.

그렇다면 소설이 사형제도의 반대측의 논리만을 대변하기 위해서 쓰여진 것은 전혀 아니다.

이 소설은 찬반 양쪽의 이론적 근거를 치우치지 않는 시각으로 펼쳐 놓으면서 작가의 생각을 분명히 담든다.

개인적으로 찬성론자인 나도 작가의 이론에 수긍하는 모습을 보면서 작가의 논리적 이론이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개인적으로 사형제도를 찬성하면 반인권적이라는 편견에 반기를 들어 사형제도를 찬성한다)

언제든지 다시 논쟁의 중심으로 나설 수 있는 사형제도에 대한 많은 생각거리를 던지는 소설이다. 강추 !!!

다카기가즈아키, 13계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