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안 살바도르는 펭귄이다. 암울하고 불안한 시절을 살아가던 사람들을 매료시킨 펭귄이다. 테러 조직이 미쳐 날뛰고 여기저기 폭력적인 시위가 일어나는 가운데 금방이라도 무정부 상태로 치달을 듯 위태로웠던 친 페론정권에서 살아가던 사람들에게 위안을 준 펭귄이다. (중략) 젊은 여행자였던 나와 죽음의 바다에서 우여곡절 끝에 구조된 씩씩한 펭귄 후안 살바도르는 더없이 행복한 우정을 나눴다. (11쪽)
바로 위의 문단은 프롤로그의 글을 그대로 옮겨온 것이다. 자신이 다른 사람보다는 '동물'들에 열려 있었음을 설명하면서, 글을 끝맺기 전에 저자가 간략하게 책을 설명해 둔 것이다. 책의 내용은 이 간략한 정리가 전부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물론 크고 작은 일들이 많지만 모든 가지를 제외한 줄기만을 이야기하자면 그렇다) 저자가 교사로 재직했던 1970년대 아르헨티나의 정치적 상황들은 위험했다. 책에서 당시의 상황을 설명하는 저자의 목소리는 차분해 그리 위협적으로 느껴지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위험의 강도가 낮은 것은 아니니까 말이다. 집 밖으로의 외출 금지가 됐던 상황도, 말도 안되는 인플레이션으로 인해 화폐에 대한 가치가 없어서 물물교환까지 해야 하는 상황도 책에는 꽤나 담담하고 오히려 유쾌하게 표현된 부분도 있었다. 옮긴이의 말에도 보이지만 '톰 미첼은 후안 살바도르의 이야기뿐 아니라 후안과 자신이 함께 지낸 시대의 풍경과 그곳을 둘러싼 사람들, 그너머의 세상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어 했다.(349쪽)' 그렇기에 자칫 무거워질 수 있는 상황들도 저자의 추억들과 잘 버무려 에세이 특유의 분위기를 잃지 않을 수 있지 않았나 생각한다.
<우리집 테리스에 펭귄이 산다>는 읽으면 저절로 입가에 미소가 지어지는 책이다. 왜 이 책이 미국과 영국에서 베스트셀러에 올랐는지 알 수 있을만큼, 저자의 글은 유쾌했고, 즐거웠고, 공감됐다. (그때의 저자의 곁에는 펭귄이 있었고, 지금의 독자들의 곁엔 다른 동물이지만 어찌됐든 반려동물들이 자리잡고 있다. 동물과의 교감이야기 속 공감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다.) 더군다나 책을 읽다보면 펭귄이 펼치는 이상한 '마음 마법'은 읽는 이에게도 마법을 걸어주는 것 같았다. 펭귄이 건 마법은 예쁘고 따뜻해서 만약 실제로 마법에 걸릴 수 있다면 평생 걸려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정도로 말이다. 책의 원제가 THE PENGUIN LESSONS인 것이 내가 생각하는 그 마법과는 다를거라 생각하지 않는다.
책에 등장하는 마젤란 펭귄 '후안 살바도르'는 사실 나이도 모른다. 원유를 뒤집어 쓴 채 밭은 숨을 내뱉던 제 무리를 모두 잃은 가엾은 펭귄일 뿐이고, 우연찮게 펭귄들의 죽음을 목격한 저자에 의해 구조되어 기적적으로 살아났다. 저자가 여유로운 휴가를 잘 보내고 출국 전날 왜하필 그 해변쪽으로 가고 싶었던 것도, 그 까만 죽음들 사이에서 살릴 수 있는 생명을 찾아낸 것도, 운명이라고밖에는 설명이 안 된다. 그렇게 맺게 된 인연은 생각보다 길게, 어쩌면 더 오랜 시간을 함께 할 수 있을거란 생각까지 하게 만들었다.
마젤란 펭귄은 '어린아이 같은 매력이 있으면서도 그 매력의 유효기간이 어린아이처럼 짧지 않은'(137쪽) 요물같은 동물이었다. 생각지도 못한 매력들이 사방에서 튀어나오고, 거기에 마치 인간들을 이해한다는 눈빛을 보내며 치유까지 해 주는데 어찌 사랑하지 않으랴. 특히나 의기소침하고 모든 것에 자신감이 없던 한 학생이 후안으로 인해 변화하는 모습은 짜릿하기까지 했다. 그렇기에 저자는 '후안 살바도르를 위한 최선의 선택이 무엇인지, 해줄 수 없는 것은 무엇인지를 신중하게 생각(187쪽)'했다. 어떤 것이 펭귄에게 더 도움이 되는 것인지를 늘 걱정했다. 그 걱정에 보답하듯 후안은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으며 건강해졌다.
하지만 예상치 못한 이별이 찾아왔고, 어쩌면 더 오랫동안 이야기가 이어질거라 생각했던 것들이 와르르 무너졌다.
나는 그 놀라운 새를 알고 사랑했다는 사실이 얼마나 큰 특권이었는가를 온몸으로 절감했다. 그 존재의 상실감이 견디기 힘들 정도로 나를 짓눌렀다. 이별의 고통은 사랑했던 대상이 그동안 우리에게 준 모든 기쁨에 대해 요구하는 대가다. 나는 마음을 가눌 수가 없었다. (318쪽)
정말 너무도 갑작스럽게 후안이 떠나버려서, 책에는 그 당시의 상황이 잘 묘사되지 않아서 (아니 묘사될 수 없었다는 것이 맞겠다) 더 아쉽게 느껴지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후안은 저자가 잠시동안 휴가를 보내러 다녀온 동안 다른 이들의 곁에서 급작스럽게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슬퍼할 겨를도 없었다. 여운을 느낄 새도 없이 저자가 보지도 못한 사이에 후안은 땅에 묻혔으니까. 그래서 저자도 마지막을 제대로 마무리하지 못했음을 많이 아쉬워했다.
너무 갑작스런 끝이긴 했지만, 저자는 자신과 펭귄과의 행복했던 추억들을 떠올리며 사람들이 후안을 기억해주길 바랐는지도 모른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나이를 먹어간다는 게 참 행복해요. (224쪽) 저자와 같은 학교에서 청소를 하며 일을 봐줬던 '마리아'란 인물이 한 말처럼, 후안은 함께 있음으로써 행복하다는 것을 온 몸으로 맘껏 이야기해주었다. 함께 하는 시간이 쌓일수록 너무도 당연하게 행복감은 더해진다는 것을 말도 하지 못하는 동물이 몸소 보여준 것이다. 긴 시간은 아니었지만 저자와 후안 사이에는 뗄 수 없는 유대감이 생겼었고, 그것은 행복함을 느끼기에 충분한 시간이었을테니.
1970년대 아르헨티나. 저자가 있었던 기숙학교에는 펭귄이 걸어놓은 행복한 마법이 걸려있었다. 그 시간을 함께 보내온 사람들의 한켠에 여전히 담겨 있을 후안을 생각하며, 후안이 우리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가 무엇인지 다시 한 번 생각해보며 이 글을 마친다.
우리집테라스에펭귄이산다,
톰미첼,
21세기북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