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만 알고 있는 단어'가 누구든 하나쯤은 있으리라 생각한다. 어쩌다 알게 되었을 수도 있고, 필요에 의해서 찾다가 알게 되었을 수도 있고, 알게 된 경우가 어떤 경우였든지 간에. 닉네임을 만들때, 아이디를 만들때, SNS 계정을 만들 때, 비밀번호 혹은 각인같은 이니셜을 새길 때 등등. '나만의 단어'가 필요한 경우는 꽤 많고, 그것이 흔하지 않은 것일수록 뭔가 있어보이는 듯한 느낌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누군가는 허세끼가 있다며 뭐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게 허세든 허세가 아니든 중요치 않다. 그저 '나만이 알고 있는 독특한 단어'가 있다는 사실과 그것이 유니크해서 자신을 좀 더 어필할 수 있는 것이라면 나는 그것보다 금상첨화인 것이 없다고 생각한다.

 

<마음도 번역이 되나요>를 보면서 '나만 알고 있는 단어'라는 느낌이 확 들었다. 단어 자체가 가지고 있는 예쁜 느낌도 있었고, 발음하면 예쁜 단어들도 있었으며, 나름 심오한 뜻을 가지고 있는 단어들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이 어느나라 말이건 그건 중요치 않다. 그 안에 담긴 내용이 누군가의 마음에 들었다면, 누군가에게는 이 단어들 역시 앞에서 이야기했던 '나만 알고 있는 단어'들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서평 제목에도 '나만 알고 있는 단어'라는 말이 들어가게 된 것이고 말이다.

 

번역이란 것이 참 힘든 일이다. 그 나라의 정서와 우리나라의 정서를 잘 버무려야 하는 것도 만만찮은 일인데, 우리말로 치환될 대체 단어를 찾지 못할 때야 말로 무척 '난감한 일'일 테니 말이다. 외국어의 모든 단어들이 정확하면서도 비슷한 뜻을 가진 단어들로 완벽 치환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마는, 그렇지 않은 일이 더 많기 때문이다. 이와는 반대로, 어떤 상황에서 쓰고 싶은 단어가 있는데 딱히 그 상황을 한 단어로 표현하기 힘들 때 우리는 외국어를 종종 쓴다. 우리에게 쩍 달라붙은 외래어들이 그 대표적인 예들이고, 아직도 그런 상황들은 존재한다. '프러포즈' 라는 단어로 예를 들어보자면, 우리 말로 '청혼'이라는 말이 있긴 하지만 일반적으로 우리가 '프러포즈 받는다'라고 했을 때의 그 행위와 '청혼 받는다'라고 했을 때의 그 행위 자체에 있어 다른 느낌을 받을 수밖에 없다. 왜인지 프러포즈는 결혼을 승낙받기 위해 여자에게 하는 모든 행동들을 일컫는 느낌이고, 청혼은 결혼하자라고 이야기하는 바로 그 순간만을 일컫는 느낌이랄까. 그렇기에 '어감과 느낌상의 묘한 이질감'을 갖는 단어들을 대체할 단어들을 찾는다면 <마음도 번역이 되나요> 속에서 찾을 수도 있을지 모르겠다.

 

 

 

<마음도 번역이 되나요>에는 52개의 단어들이 각각의 느낌들을 가지고 우리 앞에 섰다. 생전 처음 들어보는 말 투성이일 수 밖에 없는 책은 꽤 신선하게 다가오고, 관심이 간다. 나 또한 닉네임을 쓸 때 찾을 때 여러 단어들을 '뒤졌던' 경험이 있는 사람들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세상에는 내가 알지 못하는 단어들이 너무나도 많고, 그 아름다움을 충분히 표현할 우리말이 있지 않으며, 그렇기 때문에 그 느낌을 온전히 받아들이기엔 '사전'의 정의는 너무 한정적이기만 하다. 그래서 이 책이 필요하다.

 

<마음도 번역이 되나요>는 왼쪽에는 뜻풀이가, 오른쪽에는 단어와 일러스트와 기본 뜻이 적혀있는 구성이다. 조금 더 그 단어에 대한 이해도를 높이는 일러스트들도 충분히 눈길을 사로잡고 여러 방면에서 도움이 되지만, 사실 잘 알지 못하는 낯선 단어를 접할 떄는 모름지기 뜻풀이에 더 눈길이 가는 법. 책 속 역자는 그런 독자들을 이해하고 번역한 듯, 독자를 자신 옆에 앉혀두고 일러스트에 적힌 단어들의 뜻을 이야기해주면서 '어떤 상황에서 쓰이는 단어다'라고 친절히 설명해주는 느낌이 든다. 뜻풀이가 '해요'체여서 그런 걸 수도 있겠지만 굉장히 다정하게 느껴졌다. 알고보니 루시드폴이라는 싱어송라이터의 번역이란다. 루시드폴의 음악을 들어본 사람들은 그 사람을 어느정도는 알고 있기 때문에 다정하다고 느껴졌을 수도 있겠지만 (일단 싱어송라이터라면 그가 가진 성향이 음악적으로도 드러날 테고, 루시드폴의 대표곡 '보이나요'와 '바람 어디에서 부는지' '걸어가자' 같은 노래들만 보더라도 그의 부드러움은 예상할 수 있다.) 역자가 누구인지 모르더라도 그 부드러움은 충분히 느껴진다. 진짜 세상을 보는 눈이 따뜻한 사람이 따뜻한 단어들을 골라서 이야기해주는 느낌을 받았달까.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일본어 단어 '코모레비'가 등장해서 반가웠다. 상대적으로 내게는 익숙한 일본어들 속에서 이미 알고 있는 단어들조차 새롭게 느낌을 받게 했으니, 이것은 역자의 덕분일까 지은이의 덕분일까. '코모레비'는 '나뭇잎 사이로 스며 내리는 햇살'을 뜻하며, 이를 '찰나의 눈부신 이 순간이 그지없이 아름답습니다. 초록빛 이파리 사이 스며 내리는 햇살은 황홀한 마법 같아요'라고 뜻풀이한 것만 봐도 어떤 느낌인지 대충 감이 오지 않나. 물론 책 속에는 예쁜 단어들 뿐만 아니라 정말 우리말로 한 단어로 설명할 수 없는 이야기들 또한 등장한다. 빈정대고 조롱하는 비웃음을 뜻하는 웨일스어 '글라스 웬'이나 부정적 정서로 폭식을 하게 되어 불어난 몸무게에 의미를 부여한 독일어 '쿰메르스페크', 몸에 딱 달라붙는 걸 입고 신은 날 피부에 생기는 자국들에 명칭을 준 툴루어 '카렐루', 안 좋은 일이 일어나도 모르는 척하는 태도를 일컫는 네덜란드어 '스트라위스보헬폴리틱' 등, '뭐 이런 것에 이름을 붙였지?'라고 생각할 만한 사소한 것들에 대해 이름이 붙여지기도 하고, 굉장히 중요한 것 같은데 생각해보면 우리말로 딱히 표현할 방법이 없었던 순간들에도 이름은 붙어 있었다. 책 속 유일한 한국 단어가 있는데, 이를 알아보는 재미도 쏠쏠. (신기한 외국어들을 읽어오다가 만나니, 영어로 쓰여있는 단어도 낯설게 느껴지고 막 이 단어가 외국어 같고 막 그렇다.)

 

내가 모르는 세상의 단어들을 이해하고 그 단어들이 적재적소에 쓰일 수 있는 것, 그 단어가 굳이 외래어처럼 고착되지는 않을지라도 알고 넘어가면 좋을만한 그런 것들이 책 속에 한가득이다. (위에서도 이야기했지만 무려 52개의 단어다) 선뜻 이해가 되지 않는 단어들도 물론 존재하고, 일러스트와 뜻을 보고도 갸웃하던 고개가 뜻풀이를 통해 얼추의 뜻을 알게 되기도 하며, 일러스트와 뜻을 보자마자 이미지가 딱 머릿속에 그려지기도 한다. 이런 경험 되게 신선하고 재미있어서 책을 자꾸만 들춰보게 된다. 혹시나 내가 지금 쓸 수 있는 단어가 있지는 않을까, 내가 놓친 단어들이 혹시 더 있지는 않을까 읽고 또 읽고. 담겨 있는 내용은 짧은데 결코 짧게 느껴지지 않을만큼 많은 걸 담고 있는 느낌이 든다고나 할까.

 

지은이는 '이 책이 당신이 오래 잊고 있던 기억의 일부를 되찾아 준다면, 마음 속 깊숙이 자리 잡은 추억을 되찾아 준다면 좋겠습니다. 지금껏 제대로 표현할 수 없던 당신의 생각과 느낌을 비로소 말로 옮길 수 있게 된다면 좋겠습니다.'라고 책의 시작에 이야기했다. 그리고 지은이의 소망대로 이 책은 누군가에게 그런 기억들을 되찾아 줄 것이다. 스페인어 프랑스어에 능통한 누군가가 코모레비를 보고 반가워했던 나처럼 '나만 알고 있는 단어'를 찾아낼 수도 있고, (그러면서 그 단어와 관련된 여러 기억들이 생각날 수도 있고) 자신의 현재 상황과 너무도 잘 맞아 떨어지는 단어를 찾아내 '나만 알고 있는 단어'에 추가할 수도 있겠다.

 

'(미래의) 나만 알고 있는 단어'들이 가득한 '나도 알고 싶은 단어' 모음집. 나는 <마음도 번역이 되나요>를 그렇게 이야기하고 싶다.

 

 

 

* 인터파크도서 신간리뷰단을 통해 제공된 도서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마음도번역이되나요, 엘라프랜시스샌더스, 루시드폴, 시공사

캘리그라피가 대세다. 그건 굳이 더 붙이지 않아도 많은 사람들이 공감할 것이다. 자신만의 힐링이든 누구를 위한 선물이든 현대인들의 재미있는 놀이수단이 되고 있는 건 분명하니까 말이다. 그런 캘리그라피에 빠지지 않는 것이 '영어 필기체'다. 물론 '한글 글씨체'도 많이 있고, 한글도 멋있는 글씨체들이 너무도 많다. 하지만 영어 단어가 가진 높낮이가 만들어내는 그림같은 느낌은 한글 단어가 내는 느낌과는 그 종류가 다르기 때문에 어느 쪽이든 놓치고 싶지 않은 생각이 들곤 했다. 더군다나 멋드러지게 영어 필기체를 쓴 누군가의 캘리그라피 작품들을 보면 '나도 하고 싶다'는 마음이 굴뚝같이 솟아난다.

 

하지만 나는 그리고 내 또래들은 영어 필기체를 굳이 배운 세대가 아니다. 엄마의 말을 들어보니, 엄마가 학교 다니던 시절에만 하더라도 영어 필기체 쓰는 법도 교육을 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엄마는 영어필기체로 쓰여진 단어들을 곧잘 읽는다. 나는 전혀 알아볼 수 없는 글씨체조차도 말이다. 한글도 마찬가지지만 필기체는 생략과 흘림으로 점철된 글씨체가 아니던가. 알아볼 수 있는 글씨가 반 아닌 글씨가 반이다. 한글 필기체는 아무리 악필이어도 알아볼 수 있는데, 영어 필기체를 읽을 수 없는 것을 보면 눈에 익지 않아서 또는 읽는 방법을 몰라서 그런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럴때마다 엄마는 "너는 못 쓰지? 난 쓴다!"라며 "시간 뒀다 뭐하니? 알고 싶으면 배워야지"라는 말을 하곤 했었다. 

 

영어 필기체를 배우면 좋다. 그런데 딱히 시간을 내서 배우러 다니기도 뭣하고, 필기체만 전문적으로 가르쳐 주는 학언이 있는지도 모르겠고, (찾아보면 어딘가에 있겠지만 굳이 알아보지도 않았었다) 이러저러하게 미뤄두고만 있었는데, 이렇게 필기체의 기본부터 차근차근 알려주는 책이 나왔다. 그러니 나에게 이 책은 꼭 곁에 두고 봐야 하는 거다!

 

그 흔한 머릿말, 작가 인사말조차 없는 이 책 <나만의 영어 필기체 쓰기>는 말 그대로 책에 글씨를 따라 쓰게 만들어진 책이다. 일종의 워크북의 개념이다. 왜인지 <나만의 영어 필기체 쓰기>의 두꺼운 본 책이 어딘가 있을 것만 같은 느낌이 들 만큼, <나만의 영어 필기체 쓰기>는 워크북 느낌을 물씬 살려 책을 연습장 느낌처럼 꾸몄다. 실제로 속 내용 또한 워크북의 그것과 비슷하다. 처음엔 필기체들이 어떻게 생긴 모양인지 보여주고, 그 다음엔 알파벳 26자의 한 자씩 써볼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 뒀다. 대문자와 소문자를 각각 써볼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되어 있는데, 따라쓰고 있자니 마치 a,b,c,d를 처음 써봤을 때로 다시 돌아간 것만 같은 느낌이 든다.

 

대문자 소문자를 써봤으면 그 다음은 'a로 시작하는 단어', 'a가 중간에 들어가는 단어', 'a로 끝나는 단어' 3가지의 단어들을 통해 각각의 자리와 위치에서 필기체 단어가 가지는 느낌은 어떤 것인지 알아보는 차례다. 각 주제별로 단어가 2개씩 주어지고, 그 또한 따라써 볼 수 있게 되어 있다. 그렇게 26자의 모든 따라쓰기가 끝나면 그 다음은 일상생활에서 실제로 사용할 수 있는 단어들 위주로 선별된 페이지들이 등장한다. 12개월, 월요일부터 일요일까지, 영어이름, 한글이름. 그렇게 단어들이 끝난 다음에는 문장들을 연습할 수 있는 공간이 나온다. 새해인사, 발렌타인인사, 생일축하 인사, 크리스마스인사 등등. 모든 문장들이 마음에 든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굉장히 기본적인 문구들로 뽑아져 있어서 이대로 연습하면 다른 공간에 글씨를 쓰게 되더라도 멋드러지게 써 낼 수 있을 듯 하다.

 

이렇게 한 권에 글씨를 가득 채우고 나서도 용기가 없다면 넥서스 홈페이지에서 연습용 워크시트를 다운 받을 수 있다. 홈페이지의 검색하는 곳에서 <나만의 영어 필기체 쓰기>를 검색하면, '다운로드'라는 페이지가 보인다. 파일다운로드를 누르면 프린트 가능한 pdf 파일이 나온다. 이를 다운 받아서 더 열심히 연습할 수 있도록 후처리도 깔끔히 되어 있다.

 

이 한 권으로 필기체가 완전히 손에 잡힐 수 있을지 없을지는 알 수 없다. 그건 본인의 노력여하에 따라 다를 테니 말이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이 책은 영어 필기체의 'ㅍ'자도 모르는 모든 사람들에게 굉장히 많은 도움을 줄 수 있다는 것이다. 얇지만 알찬! 필기체가 궁금한 사람들은 꼭 이 책으로 도움을 받기를 바란다.

 

 

나만의영어필기체쓰기, 넥서스콘텐츠개발팀, 넥서스

실상의 나는 흔하디흔한, 지나치리만치 산문적인 인간이며, 이 세상의 괴로운 일들을 충분히 맛보면서 그 현실을 기꺼이 살아온 사람일 뿐이다. 누가 봐도 부러워할 것 없는 평균적인 일본인의 생활을, 별 것 아닌 희로애락에 울고 웃으며, 생각해 보면 창피한 일 쪽을 더 많이 하면서 넉살 좋게 살아온 사람이다.

나는 그런 나를 토해 내고 싶었다. 가능하다면 소곤소곤. (357쪽)

 

그녀는 본인을 '그림책 작가'라고 소개하며, 아이들을 위한 삽화들을 많이 그렸다고 했다. 하지만 나는 아이가 없으므로 아이들 책을 열심히 들여다 볼 일이 없어서, 사실 <열심히 하지 않습니다>는 저자인 사노 요코와 나의 첫 만남이다. 이미 작년에 그녀가 쓴 <사는 게 뭐라고>와 <죽는 게 뭐라고>의 책이 소개가 되어 사랑을 많이 받았는데, 나는 이 책들을 읽어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두 권의 책은 나도 제목은 아는 책들이다. 베스트 셀러 칸에 늘 올라 있었던 책들이니까. 하지만 연이 닿지 않아 (서평이벤트이든 직접 살 기회든 만날 기회는 충분히 있었으나 어찌어찌 내가 놓아버린 책들을, 나는 '책과의 연이 닿지 않았다'고 이야기하곤 한다) <열심히 하지 않습니다>를 먼저 만나보게 됐다. 두 책을 먼저 읽은 이들은 그녀가 이미 하늘로 갔다는 것을 알고 있을테지만, 나는 책을 다 읽은 뒤 책날개를 보고나서야 알았다. 책을 읽으면서 나는 그녀가 40대 중반 정도의 나이를 가진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마스다 미리와 비슷하지 않을까? 혹은 그보다 조금 윗년배려나?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이미 하늘에 계시다고 하니 얼마나 당황스러웠겠나. 그녀가 남긴 에세이들은 앞으로도 충분히 번역되어 출간될 가능성이 있지만, 앞으로의 이야기들을 들을 수 없음이 안타까웠다.

 

 

사노 요코는 위에서처럼 자신을 흔하디 흔한 사람이라고 소개하면서도, 솔직한 일상의 이야기들을 책 속에 담아냈다. 그 속에 담긴 이야기들은 특별하지 않지만 특별했다. 수더분한 그녀의 성격과 상상 혹은 공상 그 어느 쪽이든 조금은 특별한 생각을 가진 그녀의 머릿속 이야기들이 함께 만나다 보니, 특별하지 않은 것들도 특별하게 변하는 듯 했으니까. 물건들과 혹은 자신과 함께 사는 고양이와 대화를 나누는 모습이 종종 에세이 속에 등장하는 것을 예로 들면 조금 이해가 되려나. (실제로 그것들과 이야기를 하든 안 하든 간에) 아이들 책을 상대하는 직업을 가지고 있다보니 영혼이 맑은 듯한 느낌이 들었다. 나보다 나이가 있는 여인에게 이런 말을 해도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때묻지 않았다고 해야 할 것 같은 느낌. 나는 이런 맑은 느낌들을 좋아한다. 읽다보면 피식 피식 입가에서 바람이 삐져나올 수 있는 글을 쓰는 사람들의 공통점이 그것이다. 그녀의 글도 그랬고, 나는 금방 책 속에 빠져들었다.

 

글들은 어렵지 않다. 쉽게 짧은 호흡으로 읽히고, 어렵다 느낄만한 부분도 전혀 없다. 재미있었던 이야기 중 기억이 남는 건 창피한 일들이 여럿 열거됐었던, 제목도 '창피한 일'인 이야기. 미니스커트가 막 등장했던 시절 지하철에서 미니스커트 지퍼가 열려 창피했던 일, 전시장에서 콘택트 렌즈가 빠져 사람들 사이에서 바닥을 허우적거리면서 짚어댔던 일 등등. (이런 면은 은근 허당끼가 있어 보였다) 경찰 아저씨를 보면 흠칫 놀라는 에피소드라든가 어떤 책, 어떤 영화, 어떤 배우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도 하고, 역시나 이런저런 상상하는 이야기 또한 빠지지 않는다. 이야기의 주제는 소소하다. 소소하다 못해 '이런 것도 글의 주제가 될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주변에서 나도 당신도 겪었을만한 이야기들이었으니까. 하지만 그 글이 진행되는 과정이 오버스럽지 않은 건 특별히 그녀만의 능력이 있어서라기보다는, 그 상황을 담백하게 하지만 붙이는 살이 거의 없이 적어놨기 때문인 거라고 생각한다. 피식 웃을 수 있는 이야기들과 그렇지 않은 이야기들의 비율이 적당히 반반이 아닌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사람이 살면서 언제나 즐거울 수는 없는 법이니까. 작가의 기분따라 이렇게 저렇게도 변하는 글들을 보고 있자니, 이 '아줌마' 사노 요코는 굉장히 재미있는 사람이지 않을까 싶었다. 경험으로 써낸 듯한 글 속에서 와 닿는 글들을 보면서는 굉장히 공감도 많이 됐었고.

 

우리는 어딘지 모르게 거짓말 냄새가 나는 것을 보면서 구원받고 싶어하는 걸까. (138쪽)

세상은 모두 궁합이다. 오랜 세월 인생 공부하는 동안 학교도 다녔고 책도 읽었으니 갈수록 똑똑해졌어야 하는데, 어떻게 갈수록 논리고 나발이고 다 사라지고 '모두가 궁합'이라는 결론에 안착하고 마는지 모르겠다. (246쪽)

 

특히나 공감이 됐던 건 독서를 '나태한 쾌락'이라고 정의했던 부분이다. 어떤 부분은 나와 많이 다른 느낌이지만 어떤 부분은 너무 많이 비슷했기에 적지 않고는 배길 수가 없었다. 나의 독서는 그저 심심풀이다. 나는 따분함을 못 참는다. 하지만 타고난 게으름뱅이라서 몸을 움직이는 것보다 마음이 분주한 쪽을 선택하고 만다. (318쪽) 이 부분은 뒷쪽보다는 앞쪽 '심심풀이'라는 말에 많이 공감한다. 그리고 심심풀이로 읽기 때문에 활자는 그저 배경 음악처럼 흘러갈 뿐, 교양으로도 지성으로도 남지 않는다. 라는 부분은 소름 끼치게 나 같아서, 세상에 나와 같은 책읽기를 하는 사람이 있구나 괜한 안심도 됐다. 내 안에 축적되어 인격 형성에 도움이 되는 일 같은 건 없다. 백퍼센트 공감하는 말이다. 읽고 싶은 책만 골라 읽는 편식쟁이어서 씹어 삼키는 데 시간이 걸리는 책은 가까이 하지 않는다. 이 구절 역시 나와 비슷했다. 독서는 그처럼 나에게 지성도 교양도 가져다 주지 않지만 때때로 감동하거나 감탄하거나, 아름다운 마음씨가 되거나, 분노에 떨거나 하는 것을 몹시 싼 값으로 할 수 있게 해 주는 것만큼은 좋다. 나는 아무렇게나 드러누운 채로, 눈만 두리번두리번거리면서 마음 속에서 꺄아꺄아 기버하고 싶은 거다. (320쪽) 이런 얘기를 하면서 '책 좋아하는 여자의 이혼 확률' 같은 이야기도 함께 묶여 있다. 가장 마음을 빼앗긴 부분이라서 자꾸만 눈길이 갔던 부분이다.

 

 

'누군가의 일상'이라는 카테고리는 그와 똑같이 살아보지 않는 이상 '이해한다'라고 섣불리 말할 수 없는 영역인 듯 싶다. 사랑과 이별 같은 것들이 보편적으로 공감받을 수 있는 것은, 그것은 사람마다 다르게 일어나는 일련의 사건이지만, 그 모든 것이 '다르다'고 할 수 없는 보편성을 띠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그냥 사람이 살아가는 보통 일상을 다루고 있지만, 그 속에서 '되게 공감간다!'라고 할 수 있는 부분은 적다. 아무래도 개인의 생각을 적는 공간이니까 말이다. 하지만 상황 설명이 꽤 자세히 되어 있고, 그로 인해 그 상황에 충분히 저자의 감정을 이해할 수 있게끔 되어 있어 공감이 되는 것도 아닌 아닌 것도 아닌, 아주 애매한 상태로 책을 보게 된다. (뭔 설명이 이럴까..싶지만 직접 읽어보면 느낄 테다) 하지만 흥미로운 저자의 생각을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재미가 있는 책이다.

 

 

 

* 인터파크도서 신간리뷰단을 통해 제공된 도서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열심히하지않습니다, 사노요코, 을유문화사